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6화 (375/468)

376화. 족쇄를 날개로 (2)

스륵.

소리 없이 움직이는 철검.

기척도 없이 갈라지는 공기.

밤바람이 두 갈래로 고요히 찢겼다. 사이로 맹렬하고도 도도한 검기가 뻗어갔다. 그 끝에 우루스가 있었다.

“……누우?”

근육을 불끈거리던 우루스의 콧구멍이 벌렁.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는 잠깐 의문을 품었다.

지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저 검기는 무엇인가. 데미안 경은 어째서 갑자기 이 악물고 저런 진심(?) 검기를 날린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이해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우루스는 야수적 본능이 보내는 경고에 따라 반응했다.

“푸륵!”

맹렬하게 벌렁이는 콧구멍!

무자비하게 흡입하는 산소!

우루스의 거대한 근육이 더욱 폭발적으로 부풀었다. 곳곳에서 돋아난 아나콘다표 힘줄이 전신을 휘감았다.

모든 힘을 끌어모아 몸을 숙였다. 단단한 뿔을 앞세우고, 공성추 같은 두 팔뚝으로 상체를 방어하며 돌진했다.

데미안이 쏘아낸 검기를 향해서였다.

“누우우우!”

쿠콰콰콰-!

스쿼트 10톤쯤은 워밍업으로 칠 듯한 대퇴사두근의 폭발적 가속! 우루스의 8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제로백 2초대의 슈퍼카처럼 비현실적인 추진력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더욱 비현실적인 충격을 받으며 뒤로 튕겨 나갔다.

터커엉-!

검기와 우루스의 뿔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우루스의 뿔이 너무나 간단하게 뒤로 튕겼다. 우루스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누우?”

가까스로 잘리지 않은 뿔과 함께 뒤로 확 젖혀진 고개. 저도 모르게 활처럼 휜 상체와 허리. 우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츠츠츠츠츠!

뿔을 튕겨낸 검기가 허공에서 수십 갈래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우루스를 덮쳐갔다.

마치, 전신을 깍둑썰기로 다질 기세처럼.

스카카카칵-!

“……!”

와나 뭐 이런 미친.

우루스는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자신의 구강 구조를 원망(?)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더없는 위기감도 함께 만끽하며 확신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니, ㅈ된다. 저 검기를 모조리 다 맞으면? 워낭소리 고소한 연기 속에 한 줌 우삼겹으로 승천하는 엔딩을 맞이하겠지.

“누우우!”

그건 안 된다.

이런 곳에서 그런 꼴을 당하긴 싫다.

“누훅!”

우루스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수십 갈래의 검기가 자신의 전신을 완전히 휘감기 직전, 잽싸게 몸을 굴렸다.

쿠르르르!

이것은 야수적 생존본능에 입각한 필사의 회피! 덕분에 수십 줄기의 검기 대부분이 허공을 긁었다.

그중의 몇 줄기만이 우루스의 등판 소가죽에 바둑판 무늬를 새겼을 뿐. 나머지는 조업에 실패한 어부의 그물처럼 공기만 감싸고서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폭발했다.

……!

소리도, 빛도, 진동도, 모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낄 겨를이 없었다.

바닥을 구르며 회피를 시전하던 우루스는 근접거리에서 난데없이 터진 대폭발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투콱! 쾅! 쿠쾅!

당신은 혹시 아름다운 보름달을 바라보며 밤하늘을 날아본 적이 있나요. 우루스는 이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훨훨 날았으니까. 덕분에 바위 세 덩이와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를 몸통으로 박살 내고서야 착지(?)를 마칠 수 있었으니까.

“……누우우.”

이걸 착지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이건 불시착이다.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머리도 띵했다. 귓가에선 철딱서니 없는 탬버린 500쌍이 한꺼번에 짤랑이는 듯한 이명도 들려왔다.

하지만 우루스는 불굴의 의지로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분노의 콧김을 뿜어냈다.

“느, 누우…… 푸륵!”

아무리 친한 데미안이라 해도 이건 좀 심했다. 이렇게 엄청난 일격을 날릴 거면 미리 경고라도 좀 해주든가. 그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이래 버리면 이쪽은 어떡하란 말인가.

우루스는 보글보글 피어나는 억울함과 울분을 담아 두 눈의 초점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데미안을 홱 째려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쓰러져 있는 데미안의 모습을.

“……푸륵?”

어?

왜?

어이가 없었다.

멀쩡한 미노타우로스를 한 큐에 육회 비빔밥으로 만들 뻔한 주제에, 오히려 본인이 픽 하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라니. 이래서는 분노를 터뜨리지도, 따지지도 못하지 않는가 말이다.

“누우? 누우우?”

설마 이쪽의 책망을 모면하려고 데미안 경이 꼼수를 쓰는 걸까. 우루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데미안의 어깨를 검지 끝으로 콕콕, 찔러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

왜지.

어째서지.

우루스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누우우? 누우?”

다시금 어깨를 콕콕.

그러나 반응은 제로.

“…….”

아무래도 엄살이 아닌 것 같았다. 우루스는 엎드린 데미안을 호떡 뒤집듯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덕분에 데미안의 입에 물려 있는 게거품을 뒤늦게 목격하고 말았다.

“누우?”

우루스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건 진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데미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걸 깨닫자마자 우루스는 데미안을 가슴팍에 안았다. 그리고 바쁘게 쿵쿠쿵 달려갔다.

라키엘이 있을 별궁 본관을 향해서였다.

쿠웅!

“……읏?”

별안간 들려온 육중한 굉음. 치료용 침상에 엎드려 있던 왕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라키엘을 향해 도끼눈을 살포시 떴다.

“방금, 뭐였죠?”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졸지에 왕녀의 째릿한 눈길을 받게 된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왕녀의 등줄기를 두 손으로 짚으며 대꾸했다.

“일단 방금 굉음이 왕녀님의 척추에서 난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한데 말이죠.”

“그건 당연한 거고요.”

“네. 추나는 이제 시작하려던 참이니까요?”

“밖에 무슨 일인지 안 봐도 괜찮을까요?”

“아마도요?”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별궁이다. 딱히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건덕지가 없는 곳이다.

아니,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근위대와 특근대가 먼저 확인을 할 것이다. 그들의 월급은 공짜가 아니니까.

……라고 되뇌던 그의 생각은 틀리고 말았다.

“누우우우!”

돌연 창틀을 찌르르 울리는 엄청난 괴성. 발바닥으로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우루스의 목소리였다.

‘뭐지?’

왜 오밤중에 우루스가 여길?

라키엘은 의아함을 느끼며 창가로 다가갔다. 살포시 창문을 열었다. 덕분에 우루스의 장엄한 콧구멍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푸륵!”

공격적인 콧김과 함께 콧물 몇 방울이 톡토독 볼따구를 때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에겐 오밤중에 무슨 일이냐고 따질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루스가 대뜸 사람 하나를 떡하니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누우우! 누우!”

“……어?”

우루스가 다급하게 외치며 두 손으로 내미는 사람. 데미안이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감고서 축 늘어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했고, 입가엔 게거품을 물었던 흔적도 보였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인데.”

“누우! 누우우!”

“음, 뭐라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더 안쪽으로 보내줘. 그래. 옳지. 더. 더.”

때마침 우루스의 괴성을 들은 특근대원 세르지오와 근위대원 몇몇이 원장실로 바삐 들어왔다. 그들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받아서 치료용 침상에 눕혔다.

“무슨 일이죠?”

졸지에 침상을 양보하게 된 아델린이 황급히 물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저으며 데미안의 전신을 빠르게 살폈다.

“일단 진맥부터 해봐야겠습니다.”

라키엘이라고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할 뿐이었다.

‘이 녀석…….’

오늘 저녁에 여성과 약속이 잡혔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다른 특근대원에게 야간 호위를 부탁하고는 모처럼의 외출을 나갔을 텐데. 한데 어째서 혼절을 한 채로 돌아온 걸까. 그것도 우루스를 앰뷸런스 삼아서 말이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진맥.’

지금 예상되는 가장 위험한 사태는 데미안이 여전히 앓고 있는 1형 당뇨로 인한 급성 합병증, 혹은 혈당 트러블이다. 라키엘은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며 진맥 스킬을 발동하였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라키엘의 눈길이 빠르게 아래로 움직였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데미안 카이엔]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914세]

[신장 : 186.6 cm]

[체중 : 64.5 kg]

[혈액형 : He+ D]

[종합소견 : 대체적으로 매우 강건한 신체입니다. 전형적인 1형 당뇨병이 감지되나, 적절한 약물의 사용으로 혈당의 조절이 안정적인 상태였습니다. 다만, 최근 자발적이며 인위적인 일련의 동작을 통하여 대량의 혈당을 일거에 소비함으로써 급속도의 저혈당 쇼크를 겪게 되었습니다. 혈당의 회복을 위한 신속한 조치를 적극 권고하며, 이 권고를 어길 시 환자가 사망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급속도의 저혈당 쇼크?

그것도, 인위적으로 혈당을 활활 태웠다고?

“…….”

이놈,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하지만 궁금해할 시간은 없었다.

“세르지오! 꿀과 데운 물 가져와! 당장!”

저혈당은 위험하다. 당뇨 환자들이 주로 겪는 고혈당은 신체를 서서히 망가뜨리지만, 인슐린이 과도하게 투여되거나 격렬한 운동을 해서 겪는 저혈당은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건 말 그대로…… 신체와 뇌가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당분이 바닥나 버린 거니까.’

보통 사람들도 은근히 제법 겪어보았을 것이다.

격렬한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거나, 손발이 차갑게 느껴지면서 덜덜 떨린다거나, 헛구역질이 나온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그것이 전부 저혈당으로 인한 증상이다. 거기서 더 심해지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금의 데미안처럼.

‘현대 사회로 치면 발전소가 고장 나서 발생하는 대규모 정전사태랑 똑같은 거지. 말 그대로 몸 전체가 셧다운. 블랙아웃.’

라키엘은 재빨리 데미안의 상의를 벗겼다. 그리고 꼬슴이표 하얀 가시를 꺼내 들었다. 세르지오가 꿀물을 가져오기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톳! 토돗!

목 정중앙의 아래쪽, 쇄골 중앙의 푹 파인 부분. 임맥(任脈)의 천돌혈(天突穴)에 가시가 꽂혔다.

뒤이어 배꼽에서 위쪽으로 5촌 거리의 상완혈(上脘穴)에도 하나. 데미안의 가라앉아 있던 기혈이 조금 들뜨며 약간의 활력이 살아났다.

그 사이에 세르지오가 돌아왔다.

“여기! 꿀물입니다, 전하!”

때마침 도착한 꿀물을 데미안에게 조심스레 먹였다.

근위대원들을 시켜 데미안의 팔다리를 들어 올린 채로 주물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뇌로 통하는 혈류를 최대한 살리고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으로 데미안의 상세를 살폈다.

‘제발. 눈 떠라. 좀.’

다행히 꿀물을 비롯한 응급조치가 효과가 있는지, 녀석의 기혈이 안정되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장과 육부의 균형이 돌아오고, 뇌로 통하는 혈류가 차츰 활발해졌다.

그런데…….

‘음?’

유독 이상한 곳이 한 군데가 보였다. 마나하트였다. 특이하게도, 데미안의 마나하트가 오밤중에 때아닌 탭댄스를 추듯이 혼자서 엄청나게 활성화가 되고 있었다.

마치, 야식 달라고 부르짖듯이. 배고파서 잠을 뒤척이며 배달 어플을 두드리듯이.

“…….”

잠깐만.

이거.

설마.

‘데미안 이 녀석, 혈당을 마나하트로?’

불현듯 떠오른, 말도 안 되는 가능성.

그런데 은근 현실적인 시나리오.

동시에 라키엘의 두뇌가 팍팍 돌아갔다.

이 순간 그가 떠올린 것은, 데미안이 창안하려 시도한 새로운 심법의 치명적인 단점을 일거에 보완할, 획기적인 희망의 서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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