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족쇄를 날개로 (3)
아픈 건 싫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픔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는 감각이다. 적응은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가냘픈 위로일 뿐. 실제로는 그 어떠한 안식도 되지 못한다. 적어도 지금까지 겪어온 아픔이라는 감각을 돌이켜보자면, 분명 그것만이 고통에 대한 유일하고도 서글픈 진실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또 아픈 걸까.’
데미안은 가만히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미간의 근육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자그마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천천히 눈을 떠서 확인해 보라고.
‘나는…….’
새로운 심법을 시험하던 중이었는데. 처음으로 느껴보는 해일 같은 기세가 검을 통해 쏘아져 나가는 감각을 느끼긴 했는데.
그 뒤가 없다.
기억나지가 않는다.
그저 순식간에 세상이 어두워졌다고만 느꼈을 뿐. 그 뒤로 모든 감각이 사라져 버렸을 뿐.
‘설마 기절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우루스 경이 제법 놀랐을 텐데. 그러니 어서 일어나야…….
“정신이 드셔?”
“…….”
비로소 눈을 뜨기 직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데미안의 귓가를 콕콕 두드렸다. 약간의 책망과, 그보다 한결 짙은 짓궂음이 담긴 음성.
“전…… 하?”
데미안은 간신히 눈을 뜨며 대꾸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착각? 아니었다. 마치 쇠를 갈아서 만든 주스를 원샷한 사람처럼 온통 쉰 목소리였다.
자신은 그저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목이 이토록 쉬어 버린 걸까. 게다가 어째서 황태자 전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저는…….”
데미안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애를 썼다. 좀처럼 시야의 초점이 잡히지가 않았다. 서너 겹으로 겹쳐 보이는 황태자의 실루엣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대로 혼절해서 별궁 본관까지 실려왔지. 입에는 게거품까지 웅장하게 물고서.”
“…….”
“안 믿어져?”
“…….”
물론이다.
혼절에 게거품이라니.
자신은 그럴 정도로까지 타격을 받은 적이 없는데. 아니. 혹시 검격을 날린 동시에 우루스 경에게 카운터성 반격을 허용했던 걸까. 그것도 아닌 듯한데.
데미안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황태자의 음성이 그런 그의 고막을 찰지게 찰싹찰싹 때려댔다.
“쯧. 안 믿긴다는 표정이네. 안타깝구나. 이 형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신뢰가 안 돼?”
“예.”
“허.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거 보소.”
“워낙 짓궂으신 뉘앙스셔야 말이죠.”
“그렇지만 전부 사실인걸.”
“제가 그렇게 심하게 혼절했던 겁니까?”
“어. 눈도 하얗게 뒤집어지고 혓바닥도 붸뤩 하고 튀어나와서 덜렁거리고.”
“…….”
“안색은 또 얼마나 창백하던지. 난 무슨 미백크림 바른 줄 알았네.”
“제 피부가 원래 좀 하얀 톤이지 않습니까?”
“하얀 톤은 개뿔. 혹시 혈액형이 A4 용지세요?”
“A4 용지가 뭡니까?”
“그런 게 있고. 아무튼.”
“…….”
“너, 거의 죽을 뻔했어.”
“…….”
데미안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간 쌓인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황태자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이어지는 황태자의 물음 또한 그만큼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그런데 너 말이다. 혹시 마나하트로 혈당을 태웠던 건가?”
“예?”
“맞지?”
“…….”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겠다. 데미안은 비로소 온전해진 시야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말했잖아? 이 형님은 다 아는 수가 있어요.”
“…….”
“한번 짐작을 해 보자. 너는 이런 생각을 했겠지. 혈당도 에너지의 일종인 거니까, 그걸 신체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거라면 마나하트에서 대신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맞나?”
“……예.”
“그래서 우루스를 대상으로 삼아서 그걸 시험했고. 나름 성공을 했고. 그 직후에 의식을 잃었겠지.”
“예. 맞습니다.”
데미안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짐작대로입니다. 그 시도를 성공한다면, 다시 전하께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움?”
“예.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하는 도움 말입니다.”
“더는 환자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렇습니다.”
데미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검술과 심법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혈당을 낮출 수만 있다면, 아니, 그걸 오히려 힘의 원천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저는 더 이상 당뇨 환자가 아니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흐음.”
“그래서 저는…….”
“흐으음.”
“…….”
“발상은 참 좋았는데 말이야. 한 가지 문제점이 있네.”
“……문제점, 이라니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라키엘의 일침이 데미안을 콕, 찔렀다. 그의 뾰족한 책망이 이어졌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시도를 했는지는 알겠다. 나름 대견하기도 하고. 하지만 말이다. 그런 시도를 하려던 거였으면 나한테 먼저 좀 알려주면 안 됐던 거냐?”
“그건…….”
“나한테 알려줬으면 말이다. 어? 훨씬 안전한 상황에서 시험을 할 수 있었을 거잖아.”
“하지만 전하.”
“응. 말해봐.”
“저는 전하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바쁜 이 몸의 스케줄을 더 바쁘게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뭐 이런 뜻?”
“예.”
“아이고 눈물 쏙 빠지게 고마워라.”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데미안이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새로운 심법을 시험하려 했던 건지, 그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름 이쪽을 배려하겠다고 그런 거겠지. 설마하니 첫 시도에 자신의 검격이 그런 위력을 낼 줄을 몰랐을 테고. 그 결과 혼절까지 할 줄은 더욱 몰랐겠지.
라키엘의 쓴웃음이 살짝 짙어졌다.
“그래. 솔직히 요즘 내가 심하게 바쁘긴 했지. 밤에는 왕녀의 어깨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낮에는 보법을 배우느라 진땀 빠지고, 자투리 시간엔 별궁 한의원의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그 와중에 입원 환자들 외래도 틈틈이 돌아야 했고.”
“그래서 저는…….”
“쯧. 안다니까. 다 알아요.”
“…….”
“그렇게 바쁜 나를 나름 배려했다는 거, 알겠어.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오늘 네가 한 행동과 결과가 날 훨씬 많이 방해했거든. 잘 하고 있던 왕녀의 어깨 치료는 한 큐에 중단됐고. 원래라면 그나마 눈 좀 붙일 시간에 나는 이러고 있게 됐고.”
“……죄송합니다.”
데미안의 질끈 깨문 아랫입술이 하얗게 번졌다. 그만큼 라키엘의 쓴웃음도 더욱 짙어졌다.
“아니,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만, 다음부터는 알겠지?”
“예, 전하.”
미안하다.
죄송하다.
이 정도로 민폐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데미안은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만큼 라키엘은 흐뭇해졌다.
“그래. 알았으면 됐고.”
고맙다.
진심으로.
네가 혼자 그 정도로 애를 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는 말이 이유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간 내가 너에게 무심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니까.
하지만 라키엘은 그런 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오글거렸다. 대신 그는 데미안의 시도가 그의 신체에 불러온 과정과 결과를 진단해 주었다.
“뭐 어쨌건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에 내가 진맥을 좀 해봤거든?”
“예, 전하.”
“너, 체내의 혈당 거의 대부분을 한 번에 다 태워 버렸더라?”
“그건…….”
“아마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겠지. 넌 그저 마나하트를 통해 혈당을 소모하겠다, 라는 생각만 했을 거고. 그걸 위해서 일련의 동작을 통해 강제적인 마나의 흐름을 체내에 만들었을 거야.”
“맞습니다. 덕분에 혈당을 마나하트로 밀어 넣어서…….”
“조절이고 뭐고 할 틈도 없이 한 방에 시밤쾅.”
“…….”
“맞지?”
“……예, 전하.”
“그래. 우린 그걸 통해서 네가 시도한 새로운 심법의 중대한 하자 2가지를 유추할 수 있어.”
“중대한 하자, 말입니까?”
“어.”
라키엘이 검지를 펼치며 말했다.
“첫 번째.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혈당을 마나하트로 밀어 넣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혈당의 투입량을 조절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체내의 혈당을 한 방에 다 태워 버리게 된다.”
“맞습니다.”
“혈당을 좀 나누어서 태우거나 하는 쪽으로 조절하기가 어려워?”
“불가능할 듯합니다.”
“역시. 몸으로 시험해본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죄송합니다.”
“아니아니. 죄송할 거 없고. 불가항력인 부분이니까. 그래서 진단하는 하자, 두 번째.”
라키엘이 중지를 추가로 펼쳤다.
“이 심법은 사용하는 즉시 모든 혈당을 다 태우게 되고, 덕분에 결과적으로 자폭기라는 한정적인 용도로만 사용이 가능해. 왜냐. 쓰는 즉시 저혈당 쇼크 당첨일 테니까.”
그의 진단은 사실이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없는 기술은 쓸모가 없다. 심지어 사용 직후에 사용자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거라면? 그건 자폭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한 라키엘의 진단을 들은 데미안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역시 그렇군요.”
“그렇지. 아쉬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아직 아쉬워하긴 이르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라키엘이 뜻 모를 미소를 싱긋 머금어 보였다.
“하자가 있으면 고치면 되지.”
“고치면 된다는 말씀은…….”
“어. 방금 내가 진단했던 두 가지 하자, 고칠 수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데미안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살짝 뛰었다. 사실 그는 매우 실망하던 참이었다.
새로운 심법. 혈당을 효율적으로 태워서 오히려 힘의 원천으로 삼을 심법. 그것만 성공한다면 황태자에게 다시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현실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한데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심법에서 드러난 하자를 고칠 수 있단다. 대체 어떻게? 궁금해졌다.
황태자가 말했다.
“짚어보자고. 혈당을 소모하는 심법의 제일 큰 문제는 마나하트가 혈당을 한 큐에 태워 버린다는 점이었지?”
“예.”
“그건 아마 네가 마나하트를 너무 발달시킨 탓일 거야. 말하자면 마나하트의 용량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랄까. 그래서 들어오는 혈당을 마나하트가 한 번에 다 머금을 수 있고, 그걸 확 태워 버리는 거지.”
“그럼…….”
“간단해. 마나하트를 분산시켜서 개별 용량을 줄이면 되겠네.”
“예?”
“마나하트를 여러 개로 쪼개자고. 6기통, 8기통, 12기통 엔진처럼.”
“예에?”
“멀티 마나하트. 몰라?”
“…….”
모른다.
금시초문이다.
어벙벙해진 데미안의 귓가로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하긴 뭐. 흔한 기법은 아니긴 하니까.”
“그런 기법이…… 실제로 있습니까?”
“어.”
“제가 배울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멀티 마나하트를 특기로 삼는 가문이 있거든.”
라키엘이 소설 마검황 속의 설정을 슬며시 떠올리며 말했다.
“제국의 가장 굳건한 방패. 아스라한 변경백령. 그곳에 가서 배우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