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아스라한 변경백령 (1)
제국의 영토는 광대하다.
그만큼 긴 국경을 지키기 위한 변경백령도 여럿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국의 방패라는 칭호는 받은 곳은 단 하나밖에 없다.
“아스라한 변경백령. 그곳에 가서 배우면 돼.”
제국의 강력한 방패. 멀티 마나하트라는 독특한 기예를 가문의 무기로 삼은 곳. 아스라한 변경백령은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아스라한이라면…… 설마 아스라한 심법의 시조였던 그?”
“어, 맞아.”
데미안의 물음에 라키엘이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역사상 유일했던 그랜드 마스터인 하비엘 아스라한의 후손들이야.”
라키엘은 문득, 소설 마검황에 나오던 내용을 떠올렸다.
약 300년 전이었던가.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가 탄생했다. 하비엘 아스라한. 그는 유례없는 강력함을 세상에 떨쳤고, 아직 왕국이던 시절의 마젠타노 왕가에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고 했다.
“그의 재능과 실력은 전무후무했다고 하지. 평범한 드래곤 정도는 가볍게 제압이 가능했고, 심지어 깊이 잠들어 있던 용왕 베르키스도 그의 일격에 잠에서 깼다고 했으니까.”
“용왕 베르키스의 잠을…… 깨웠단 말입니까?”
“어. 역사서에 적혀 있어.”
“그 사람, 그러고도 무사했던 겁니까?”
“아마도?”
“엄청나군요.”
“그렇지?”
“예.”
데미안은 솔직한 심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용왕 베르키스가 어느 정도의 잠탱이인지를 직접 보고 겪은 그였다. 한데 용왕의 잠을 두들겨서 깨우고도 무사했다니.
“남들이 모르는 용왕과의 엄청난 친분이 있었던 걸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랜드 마스터라서 가능했던 건지도? 뭐, 어쨌건-”
라키엘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그만큼 강력했던 하비엘 아스라한에게는 여러 독특한 기예가 있었다고 해. 오늘날까지 황실을 통해 전해진 아스라한 심법이 대표적이겠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기법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멀티 마나하트였던 겁니까?”
“어.”
“마나하트를 여럿으로 쪼개는 게 가능하다니,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래. 네가 생각하기에 그의 마나하트가 몇 개였을 거 같아?”
“으음…….”
“편하게 생각하고 대강 말해봐.”
“대략…… 무려 그랜드 마스터니까…… 10개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요?”
데미안은 나름의 추론을 거듭한 끝에 대답했다. 무려 10개의 마나하트. 그 정도는 있어야 그랜드 마스터로 불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대답이 정답과 아득하게 동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10개라. 하하하.”
“틀렸습니까?”
“어.”
“그럼 정답은?”
“최소 억 단위.”
“…….”
“어어. 째려본다? 거짓말 아닌데.”
“아무래도 너무 허황된 숫자 단위라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서에 실린 내용인걸.”
“혹시 조금 과장된 기록 아닙니까?”
“하비엘 아스라한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라던데.”
“그 사람 허언증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역사상 유일했던 그랜드 마스터가 허언증 환자일 확률은?”
“죄송합니다.”
“응. 씹고 싶으면 너도 그랜드 마스터 되고 나서 씹든가.”
“…….”
데미안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라키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하비엘 아스라한에게는 엄청난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가 있었다고 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후손들은 그의 기예를 온전하게 이어받지는 못했지.”
“재능의 차이 때문입니까?”
“아무래도.”
라키엘은 기억 속 소설 마검황의 설정을 되짚었다.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 그는 분명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후손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했던가.
“물론 그의 피를 이은 이들이 아주 맹탕은 아니었어. 사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여전히 엄청난 천재들이었지. 그의 손자와 증손자, 심지어 고손자까지 3연타석으로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니까.”
3세대를 연달아 소드마스터 배출. 그건 역사상 어떤 가문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걸출한 성과였다. 말 그대로 천재 가문이나 이룰 법한 위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 그랜드 마스터는 다시는 나오지 못했어. 그게 아스라한 가문의 불운이었지.”
“가문의 시조만큼의 초 천재는 없었다…… 라는 것이로군요.”
“맞아. 바로 그거.”
그것이 아스라한의 후손들이 겪은 불운(?)이었다.
“애당초 하비엘 아스라한이 지녔던 수많은 절기는 그랜드 마스터이기에 구현이 가능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거든. 그래서야. 그의 기예들이 후손에게 전수되는 과정에서 많은 퇴보의 과정을 겪은 것이.”
“그중의 하나가 멀티 마나하트인 겁니까?”
“응. 정확해. 아까 네가 대답한 10개의 멀티 마나하트. 그게 오늘날 아스라한 변경백이 구현할 수 있는 마나하트의 숫자라더군.”
“……억 단위에서 10개로의 퇴보라.”
“퇴보의 단위가 좀 크지?”
“예.”
“그래도 뭐, 소드마스터도 아닌 상태에서 구현하기에는 그 정도가 한계인 거겠지. 네가 익히기에도 그 정도면 충분할 거고.”
“10개의 마나하트…….”
“그래. 네 마나하트를 10개 정도로만 나누면? 네가 고안한 새로운 심법을 훨씬 안전하게 구사할 수 있을 거야. 마나하트로 혈당을 태우는 횟수를 10번으로 분산시킬 수 있을 테니까.”
“한 방에 모든 걸 쏟아붓는 자폭기가 아니게 된다는 뜻인 거로군요.”
“바로 그거지.”
라키엘은 흡족하게 웃었다.
딱 그거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심법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혈당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동시에 저혈당 쇼크에 빠지는 위험한 경우는 예방할 수 있을 테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그걸 배워서 당뇨를 해결하는 것도 전부 네가 새로운 심법을 고안한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지만 말이야.”
“그렇습니까.”
“어. 잘했다고.”
“예?”
“칭찬이야.”
“…….”
“…….”
“전하.”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글거렸다고?”
“예. 제가 헛구역질을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돼. 내가 먼저 할래.”
“하시죠, 그럼.”
“우웩.”
“훌륭하십니다.”
“칭찬이야?”
“……죄송합니다.”
데미안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야 했다. 안 그러면 정말로 오글거리는 말로 감사함을 표현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만큼 고마웠으니까.
‘전하, 당신은…….’
항상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남을 배려합니다. 매번 애써 타박을 놓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남을 끔찍하게 챙깁니다. 그 대상이 저인 경우가 많아서, 저는 종종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사이의 갈등에 빠져 표현의 길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지금 또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멋대로 일으킨 소란을 이해해주고, 그걸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주며, 그 와중에 이쪽의 섣불렀던 미욱함을 칭찬으로 감싸주는 황태자.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 외의 그 무엇이 가능할까.
데미안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서늘하고, 무감정하기만 하였다. 타고난 눈매 때문이었다. 아니, 덕분이었다. 데미안은 그 사실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기었다.
♣
아침이 밝았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데미안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장착(?)해줄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박차란 바로 밀린 일을 열심히 소화하기였다.
“흐압! 흐아압! 하압!”
파팟! 투팟! 츠팟!
낮이면 앙부아즈 왕가 격투술의 기초 보법을 더욱 맹렬하게 익혔다. 함께 수업을 듣는 비번 간호사들이 놀라워할 정도였다. 덕분에 배움의 진도가 깨알만큼 빨라졌다.
밤이면 왕녀 아델린의 어깨를 더욱 세심하게 집중적으로 치료하였다. 치료를 받는 아델린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녀의 회복세에 탄력이 붙었다.
그는 자투리 시간도 놓치지 않았다.
수시로 가르딘 경을 불렀다. 별궁 한의원의 운영 상황을 체크하고, 앞으로의 운영을 의논했다. 운영 자금의 분배, 약재의 수급, 입원 환자에 대한 관리와 방침 등등. 조금의 소홀함도 없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잘도 흘렀다. 해와 별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고, 만개했던 꽃이 시들고, 새로운 잎사귀가 돋아났다. 갓 태어나 꼬물거리던 강아지의 눈이 뜨이고, 수많은 구름이 수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그렇게 4주가 지난 어느 저녁.
“……자, 왕녀님? 오른 주먹으로 이걸 한번 쳐보시죠.”
라키엘은 원장실로 들어오는 왕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치료를 위한 꼬슴이 가시나 뜸봉이 들려 있지 않았다. 대신 그가 들어올려 보인 물건은…… 푹신한 베개였다.
그 모습에 왕녀 아델린의 미간이 살포시 찡그려졌다.
“뭐죠? 그건 무슨 뜻?”
“혹시나 도발이라고 여기신 거라면, 틀렸습니다.”
“그럼요?”
“치료입니다.”
“제가, 황태자께서 들고 있는 베개를 치는 일이요?”
“네. 가급적이면 스트레이트로 부탁합니다.”
“…….”
진짜로 무슨 뜻일까.
나는 평소처럼 어깨를 치료받으러 온 건데. 그런데 오늘의 황태자는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이러는 걸까.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였을 뿐.
그녀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라키엘을 믿기 때문이었다.
‘치료라고 했으니까 따라야겠지.’
이미 라키엘을 제법 겪은 그녀였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돌아이 같은 짓을 하더라도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하니 믿고 따르면 된다.
적어도 그가 이쪽에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분명 좋을 결과가 있을 테니까.
“그럼 갑니다?”
“네. 오시죠.”
타앙!
가볍게 발을 뻗었다. 군더더기 없는 스텝인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디딤발에서부터 올라오는 회전력을 실었다. 척추와 견갑, 어깨 관절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그녀는 아주 잠깐 자신의 어깨를 걱정했다.
또 아프면 어쩌지.
하지만 아니었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어깨가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힘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푸콱-!
두꺼운 베개에 그녀의 체중을 온전히 실은 스트레이트가 꽂혔다. 시원했다. 해방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당연했다. 이렇듯 후련하게 날려보는 주먹질이 몇 달만이던가.
동시에 그녀는 아차 싶은 기분을 느꼈다.
‘너무 세게 때렸나?’
황태자는 괜찮을까.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주먹질을 한 바람에 다치진 않았을까. 아무리 베개가 있어도 받아내기가 쉽지 않은 타격력이었을 텐데.
그녀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황태자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들어간 스트레이트. 그걸 받아낸 황태자가 상상도 못 했던 대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츠즈즛!
처음에는 타격력 때문에 황태자의 두 발이 주욱 미끄러지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태자의 발이 반원을 그리며 익숙한 방위를 밟기 시작하였다.
“……!”
앙부아즈 왕가 격투술의 기초 보법이었다.
황태자의 왼발이 힘을 받아내며 바닥을 긁었다. 좌후방의 방위를 디뎠다. 그 직후, 오른발이 대응하듯 움직이며 몸의 회전을 이끌었다. 받아낸 힘을 한 방울도 흘려내지 않으려는 듯이. 그동안의 배움을 온전히 내보이려는 듯이.
유려하게. 그러나 강맹하게. 힘을 담아. 물러나려는 듯 오히려 다가오며. 베개를 불쑥 내밀어 왔다!
“이번엔 왕녀님 차례. 오른팔로 받아 보세요.”
후욱!
폭신한 베개가 엄청난 힘을 싣고서 쇄도해 들어왔다. 왕녀가 질렀던 주먹의 힘을 고스란히 담은 채였다.
“……읏?”
생각지도 못한 대응이었다. 주먹을 온전히 받아낸 것도 모자라, 그 힘을 온전히 실은 반격이라니.
아델린은 당혹감을 억누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쇄도해 오는 베개를 옆으로 쳐냈다. 베개에 실린 힘은 유려한 보법으로 흘려냈다.
푸쿡, 와장창!
날아간 베개가 벽면을 강타했다. 불운한 액자 하나가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반격을 감행한 라키엘도, 그걸 걷어낸 아델린도 액자 따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감정이 담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을 뿐.
라키엘은 흐뭇함을 담아서.
아델린은 감격을 느끼며.
‘무슨…….’
왕녀 아델린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방금 베개에 담긴 힘을 걷어내는 와중에도, 어깨에서 그 어떠한 통증의 징조조차 느껴지지 않았음을.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바로…….
“축하합니다. 어깨, 완치되었습니다.”
라키엘의 따스한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