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9화 (378/468)

379화. 아스라한 변경백령 (2)

“축하합니다. 어깨, 완치되었습니다.”

가끔은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이 있다. 특히, 오랜 시간 애타게 염원한 말을 실제로 들어 버렸을 때가 그러하다.

너무나 바랐던 일이라서.

그만큼 간절했던 거라서.

설마 이루어질까 싶어서.

그럼에도 무수히 기도했기에, 오히려 실제로 듣고 나면 현실로 느껴지지 않게 되는, 그저 꿈속의 일인가 싶어지는, 그러한 말들이 있다.

‘나는…….’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쥐었다. 지난 몇 달의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항상 아팠다. 다친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욱신거리는 어깨 관절이? 아니. 비단 아픈 곳은 어깨만이 아니었다.

불안감과 막막함이라는 감정이 수시로 심장을 쥐어짰다. 언제까지 이렇게 부상을 달고 지내야 할지 몰라서. 완치가 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나 캄캄하여서.

혼자 남겨질 때마다 불안감에 휩싸여야 했다. 막막함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래서 황태자가 고마웠다. 원래라면 혼자 지내야 했을 무수한 밤을 그가 외롭지 않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마다 원장실로 자신을 불렀다.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다. 추나요법이라 하였던가. 그의 손길을 받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풀어졌다. 긴장이 느슨해지는 힘줄처럼, 불안감의 끈이 조금은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막막함을 잊고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하루 중에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의 순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완치에 대한 기대를 온전히 품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그러하였다. 통증은 가시겠지만, 완전히 예전의 기량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불안. 그런 회색빛 감정을 끝끝내 심장 한쪽에는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안 그러면 실망할 것 같아서였다. 끝내 온전한 어깨로 되돌아가지 못했을 때, 그간 품었을 헛된 희망의 무게만큼 무너질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

왕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얼띤 소리를 입술 사이로 흘려냈다. 뭔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럴듯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뭔가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멍해져 버린 까닭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입술은 저도 모르게 살짝 벌어지고. 눈길은 황태자를 향해 던져보고. 그렇게 이쪽을 향해 빙그레 웃는 황태자의 미소를 바라보고.

“완치, 되었다고요. 왕녀님.”

“……아, 네.”

“잘 안 믿기시나 봐요.”

“조금…….”

사실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안 믿긴다기보다는 뭐랄까.

“실감이 조금…….”

“안 나죠?”

“네.”

아델린은 솔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방금 확인을 했잖아요?”

“…….”

“완전한 가동범위로 힘을 온전히 싣고도 저리거나 아프지 않았죠?”

“네.”

“그럼 됐어요. 물론 당분간은 너무 혹독한 오버 트레이닝은 하지 마시고. 아, 말해놓고 보니 그건 항상 지켜야 하는 거군요. 앞으로는 어깨, 소중하게 쓰자구요.”

“…….”

“자, 궁금하신 점?”

이쪽을 보며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이는 황태자. 그 모습마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이쪽을 놀리는 것 같아서? 아니. 자신이 평생을 더 기울여도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궁금한 점 없어요?”

“있어요.”

“어떤?”

다시금 살포시 웃는 황태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스스로도 경악할 내용의 질문을 꺼내 들고 말았다.

“지금 교제하는 여성분이 있으신가요?”

“네?”

“아.”

“……네에?”

“아뇨. 방금 어깨 가동범위가 여유가 있었던 건가 해서요.”

“쓰읍. 질문 내용이 바뀌신 거 같은데.”

“아뇨. 바뀐 적 없어요.”

“제가 들은 내용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안 달라졌어요.”

“정말요?”

“정말요.”

“맹세코?”

“네. 맹세코.”

“아니라면요?”

“아닐 리가 없어요.”

“……네, 뭐. 그러시다면 그런 걸로.”

“확실히 그래요.”

“알겠습니다. 크흠, 흠!”

어째서 헛기침을 하는 황태자의 얼굴이 아까보다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듯 보이는 걸까. 아델린은 눈에 보이는 진실과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한껏 억누르듯 얼굴 가득 철판을 깔고서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라키엘이 갈라지려던 목소리를 간신히 수습하며 말했다.

“방금 움직이셨던 동작의 가동범위라면, 아마 스스로도 느끼셨을 테지요? 제대로 움직였습니다. 통증, 혹시 있었나요?”

“아뇨. 전혀.”

“네. 그럼 정상입니다.”

“그럼…… 다른 검사 같은 건 안 해도 되나요?”

“네.”

정말이다.

추가 검사?

당연히 필요 없다.

아까 왕녀의 스트레이트를 베개로 받아내고, 그 힘을 되돌려 반격을 가하고, 거기에 왕녀가 대응하는 모습과 단계를 모조리 경혈 스캐닝으로 관찰했으니까. 덕분에 그녀의 어깨 관절이 어떻게 가동되는지를 제대로 진단했으니까.

결과는 완치였다.

아까부터 눈앞에 떠올라 있던 메시지도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당신은 추나요법과 침술, 부항 스킬의 종합적인 활용을 통하여 환자 :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의 방카르트 병변(Bankart Lesion)을 성공적으로 완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수시로 엄습하던 어깨탈구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운동과 영양섭취를 취할 시 후유증 없는 튼튼한 어깨를 얻게 될 것입니다.]

[다만, 방카르트 병변은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질환이 아니므로, 이 경우에는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보너스 수명을 받지 못한 대신, 소정의 HP가 보상으로 지급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2,000의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6,700]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치료에 활용된 각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추나요법 : Lv.6 -> Lv.7]

[침술 : Lv.6 -> Lv.7]

[부항 : Lv.1 -> Lv.2]

‘좋구나.’

소득이 예상보다 짭짤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무려 일국의 왕녀를 치료한 성과다. 그것도, 격투술을 특기로 하는 왕녀를 어깨 불구의 위기로부터 구해준 성과다.

그런데 보상을 요 정도만 챙기고 끝낸다?

‘그럼 살짝 아쉽지.’

……촵촵!

라키엘은 혓바닥을 야물딱지게 적셨다. 그리고 더욱 알찬 보상을 향한 풀악셀을 밟았다.

“뭐, 그래도 말이죠. 후우.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사실 최근에는 왕녀님도 조금씩은 느끼고 계셨겠지요. 예전보다 일상에서의 움직임이 편해진 것 같고, 통증이 제법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네, 그렇긴 했는데…….”

“그래서 저는 두려웠습니다.”

“네에?”

“보통은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서 말입니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고, 통증이 줄어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이젠 괜찮아진 것 같다고, 환자가 자신감을 얻으면서 함부로 조심성 없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로 딱! 그런 어중간한 시기였거든요, 최근이.”

“아, 네에…….”

이쪽은 딱히 그런 마음은 아니었는데.

왕녀 아델린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황태자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덕분에 라키엘의 혀놀림이 더욱 기세(?)를 탔다.

“그래서였습니다. 저는 더욱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왕녀님? 혹시 지난 며칠 사이에 제가 웃는 거, 보셨습니까?”

“네?”

“제가 웃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느냐구요.”

“어, 으음…….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실 겁니다. 일부러 안 웃으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으니까 말입니다.”

“어째서……요?”

“행여나 왕녀님이 자신의 어깨를 과신한 나머지 무리를 하다가 또 다치실까 봐서요?”

“…….”

“아, 힘들었습니다. 희노애락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그중의 하나를 인위적으로 누르면서 살아야 하는 시간이라니. 이 어찌 험난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

“아, 네에…….”

“하지만 그 성과가 이렇듯 완치라는 결과로 돌아와서 기쁩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저는 이렇듯 비로소 웃을 수가 있게 되었네요.”

“…….”

일부러 활짝 웃어 보이는 황태자.

그래.

당신의 그런 모습이 좋아. 웃는 모습도, 진지한 표정도,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며 우기는 모습까지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래. 볼 때마다 마음 한쪽에 솜사탕이 새겨지는 것 같아서.

“하지만 황태자님?”

“네?”

“황태자께서는 따로 치료비는 받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럼 제가…… 사례로 뭘 해드릴 수 있을까요?”

“어이쿠. 사례라니요. 그런 것까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다만?”

“어깨가 다 나으셨으니, 이제는 그동안 중단하고 있던 황제 폐하와의 협상을 재개하게 되시겠지요?”

“아, 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럼 협상 테이블에서 폐하와 마주하실 때 제 안부를 대신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아델린은 잠깐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황태자의 입술이 잘도 나풀나풀 뜻밖의 요구를 날려댔다.

“제가 매우 중대한 사태를 맞이하여 아스라한 변경백령을 방문하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고 말입니다. 원칙대로라면 출발 전에 폐하의 윤허를 받음이 마땅하나, 사태가 하도 위급하여 어쩔 수 없이! 피치 못하게! 선조치 후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충분히 강조해 주시면 더욱 좋을 듯하고 말이지요.”

“…….”

“그럼, 부탁합니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태자. 그러고 보니 그의 뒤편에 꾸려져 있는 짐이 보였다. 장거리 여행을 위한 짐인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하. 특근대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문을 열며 들어오는 데미안도, 그 뒤편의 복도에 언뜻 보이는 특근대원들도 모두 여정을 떠나기 위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설마? 지금 출발하시려고요?”

“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지금 안 떠나면 폐하께 덜미를 잡힐 거 같아서 말이지요.”

더욱 당연하다는 듯이 지어 보이는 미소 앞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 입을 열어 버린다면? 자신도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그럼, 부탁합니다?”

그 인사가 끝이었다.

황태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미적대다간 붙잡힐 사람처럼 서둘렀다. 그렇듯 순식간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서 별궁을 떠나갔다.

아델린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스스로도 모를 의미의 헛웃음이 흘러나와 버리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훌쩍 가 버리면 난 또 어떡하라고.”

아쉬워서일까. 설마 벌써 그리워서일까. 그럴 때마다 눈을 감고 그려야 하는 걸까, 아까 본 당신의 미소를.

모르겠다, 정말로.

밤이 가고 아침이 밝았다.

왕녀 아델린은 라키엘에게 받은 부탁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녀는 오전에 황제와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라키엘의 전언을 황제에게 전하였고, 황제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어 고맙소, 앙부아즈의 왕녀여.”

어쩐 일인지 황제는 놀라지도, 진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럼 그렇지, 라는 듯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황제가 요원들의 보고를 통하여 라키엘의 계획을 대강 알고 있었음을. 황태자의 아스라한 변경백령행마저 파악하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일찌감치 군단 규모의 황태자 호위대를 황도에서 출발시킨 상태였음을.

또한, 30분의 거리 차이로 황태자를 추격(?)하는 호위군단의 규모와 위세가, 아스라한 변경백령 변두리에 잠적해 있던 어느 무리를 멘붕에 빠뜨렸음도. 그 무리의 정체가, 리더인 아난샤의 비참한 최후를 전해 듣고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흑마법사 집단이라는 사실 또한.

그녀는 꿈에서조차 짐작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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