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호기심 해결 버튼을 눌러주세요 (2)
‘호기심 해결 버튼, 발견.’
라키엘은 보람찬 미소를 입꼬리에 쑴펑쑴펑 장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안내하겠답시고 복도를 앞서서 걸어가는 아스라한 가문의 소년, 아르민의 알밤 같은 뒤통수를 보자니 절로 흡족해진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궁금한 걸 물어볼 딱 적당한 놈이 나타났잖아?’
마젠타노 제국의 3대 황제.
그리고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일이 있었기에 변경백이 아까처럼 학을 떼는 반응을 보였던 걸까.
의문투성이였다.
한편으로는 의혹 또한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이면 제국에서도 가장 유수의 가문 중의 하나인데. 그런 가문이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심법인 아스라한 심법의 일부를 강제로 ’포기당한‘ 사건이란 말이지.’
굉장히 큰 사건이다. 그 정도라면 분명히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한데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소설 마검황은 물론이었다. 황가의 역사서? 마찬가지였다.
‘실은 틈이 나는 대로 역사서를 조금씩 들여다봤는데도 그랬어.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과 3대 황제 사이의 트러블? 알력? 비슷한 내용조차 못 봤거든.’
라키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이 이곳 낯선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무기는 정보의 우위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소설 마검황을 읽었던 기억. 덕분에 알게 된 수많은 정보들. 그것들이 실제로도 그가 여기서 살아남고 적응하는 데에 굉장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소설 내용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소설은 이곳의 일부만을 보여주는 수단이었을 뿐. 소설의 정보만 믿고 있다가는 언젠가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하여 틈이 날 때마다 황가의 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덕분에 마젠타노 황가의 역사 대부분을 줄줄 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3대 황제와 아스라한 가문 사이의 사건은…… 모르겠다. 본 적이 없으니까. 그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하면 변경백이 말한 그 사건이 거짓일까? 아니. 정황상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진 비화라고 봐야겠지.’
기록으로 남겨봐야 황가의 손해일 거라서. 감추고 싶은 치부일 것이어서. 아마도 그래서 어떠한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으리라. 오늘날엔 황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잊어버린 일이 되었으리라.
그럼에도 변경백 가문의 핏줄들은 대를 이어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즉, 사건의 내막을 알려면 변경백 가문 사람의 입을 통해야 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그걸 읊어줄 녀석으로 딱이네. 딱이야.’
라키엘은 흐뭇한 입꼬리를 애써 관리하며 아르민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숙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변경백저 좌측의 별관 하나가 통째로 이쪽에게 주어진 숙소였다.
“이곳에서 사용하실 침실은 이쪽이십니다, 전하.”
제공받은 침실도 더없이 크고 정갈했다. 최소한 면적만으로는 별궁의 침실 못지않은 듯했다. 하지만 라키엘의 관심사는 변경백 가문의 인테리어 센스(?)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봐?”
“예, 전하.”
“아까 네가 나한테 인사하면서 그랬지? 내가 원하는 것이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널 불러서 해결하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응. 그럼 하나 묻자.”
“하문하소서.”
“마젠타노의 3대 황제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이며 너희 가문에게 아스라한 심법 일부를 포기시킨 거냐?”
“…….”
이쪽의 질문이 뜻밖의 비수가 된 걸까.
아르민이 불시에 명치를 쿡 찔린 사람처럼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은근슬쩍 냉랭하던 표정이 싹 굳어 버렸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궁금해서 그래.”
“…….”
“궁금하면 물어보라며.”
“…….”
“대답.”
“저기, 전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답은?”
“정말로 송구하오나, 대답하기가 조금…… 곤란합니다.”
아르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 녀석의 확 달아오른 귓바퀴는 또렷하게 보였다.
라키엘은 고개만 살짝 갸웃거렸다.
“곤란하다니, 어째서?”
“그건…… 함부로 입에 담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예, 전하.”
“어째서?”
“…….”
“나는 좀 알아야겠는데. 그래야 모두가 해피해질 거라서.”
사실이다.
3대 황제와의 사건을 자세히 알아야 변경백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설득이 잘 먹혀야 협상을 하고, 이들의 심장을 고쳐주고, 멀티 마나하트를 데미안에게 장착(?)시켜주고, 1형 당뇨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윈윈. 일거양득. 누이 좋고 매부 좋고. 1+1 과자 샀다가 사은품까지 당첨되고. 악플러를 악랄하게 참교육 해줬더니 악마가 찾아오려다가 백스텝으로 천국의 계단에 올라가고. 기타등등. 등등. 어쨌건.
라키엘은 이번 기회에 3대 황제와의 사건을 꼭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물었다.
“그리고 너. 이름이 아르민이랬지?”
“네……예, 전하.”
“아르민? 지금 너, 황태자의 명령을 계속해서 거역하고 있는 거란다?”
“…….”
“자아. 고개 들고. 대답?”
녀석은 여전히 푹 고개를 숙인 채였다. 대답? 없었다. 고민이 깊은 걸까. 그걸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이윽고 돌아온 녀석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어?”
“그 일을 제 입으로 말하는 수치를 겪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전하.”
“뭐어?”
“제가 처음인 것도 아닙니다. 새삼스러운 일 또한 아닙니다. 그 사건을 입에 담는 수치와 불명예를 겪지 않기 위해서 명예로운 자결을 선택한 이가, 가문의 역사에 아무도 없었으리라 여기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
그 일이 변경백 가문에게는 상상 이상의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건가 보다. 녀석의 태도를 보니 조금 안타까워졌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그거 하나 말하기 싫다고 자결까지 입에 담다니. 변경백 가문의 가정교육은 어째서 이토록 극단적이란 말인가.
라키엘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서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럼 죽자.”
“……네?”
흠칫하는 아르민.
이쪽의 반응 또한 녀석에겐 뜻밖이었던 걸까.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물었다.
“선택해. 네가 죽을래, 내가 죽여줄까? 아무래도 자살보다는 타살이 조금 홀가분하겠지?”
“네? 그게 무슨…….”
“데미안, 이 녀석 붙잡아.”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데미안이 움직였다. 흑발 호위의 손길은 거침도, 자비도 없었다. 데미안의 엄청난 완력에 붙들린 아르민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저, 전하! 이게 무슨!”
“무슨은 무슨. 죽여 달라며. 묶어.”
데미안에게 눈짓했다. 아르민의 사지가 북북 찢긴 침대보로 꽁꽁 포박되기까지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하? 전하!”
“시끄럽고. 입도 좀 막자.”
또 데미안이 움직였다. 즉석 재갈이 아르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웁웁! 웁!”
“아. 이제 좀 낫네.”
“우웁! 웁웁!”
“룰루루. 어떻게 죽여줄까.”
“웁! 우웁!”
“자아, 꼬슴아?”
“꼬!”
아르민의 다급해지는 끙끙거림을 들으며 라키엘은 꼬슴이를 불렀다. 이윽고 꼬슴이표 가시가 라키엘의 손에 들렸다.
그걸 본 아르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차라리 죽여달라며.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런 표정이야.”
“……읍읍! 으븝!”
“움직이지 마라. 더 아파진다.”
톳!
하얀 가시가 인정사정도, 망설임도 없이 내리꽂혔다.
“읩!”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시 고문(?)을 체험하는 아르민. 첫 가시가 꽂힌 자리는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극천혈(極泉穴)이었다.
한데 극천혈을 찔린 아르민의 반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의입읍! 입! 읍읍! 끼읍!”
사실 당연하다.
극천혈의 위치는 겨드랑이니까.
‘으음, 미안.’
그렇지 않아도 생소한 침술. 강제로 침대에 묶여 있는 상황. 이게 치료인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찔린 인생 첫 시침이 겨드랑이라니. 생각해 보니 기겁할 만도 했다.
하지만 라키엘의 침술은 멈추지 않았다.
토돗! 톳!
녀석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팔꿈치 안쪽의 소해혈(少海穴)과 새끼손가락 손톱 뿌리의 소충혈(少衝穴)을 연달아 찔렀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 군데 혈맥에 꽂힌 가시를 잡고서 시계방향으로 살살 돌려주었다.
“으읩! 긥! 급! 윱!”
녀석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결연한 의지가 깃든 눈빛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고문을 견뎌내는 투사(?)의 눈동자다. 보자니 절로 쓴웃음이 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손을 멈추진 않았다.
톡톡!
이번엔 꽂힌 가시를 딱밤으로 톡톡 때렸다. 그러자 아르민의 허리가 활처럼 휘며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시전했다.
“그으읍! 으읍!”
아르민의 눈에 눈물이 배어났다. 청회색 머리칼의 미소년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억울하였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저 할아버지인 가주님께 황태자를 잘 모시라는 명을 받았을 뿐인데. 그래서 숙소로 안내를 한 게 전부인데.
한데 어째서 이런 고문을 받아야 하는 걸까. 왜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무섭고, 억울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자신에게 다짜고짜 가문의 수치를 말해보라고 하던 황태자의 안하무인 같던 태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황태자…… 당신은……!’
최악이야!
당장 그렇게 외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재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원망스러운 눈빛만 표독하게 쏘아 보낼 뿐이었다.
한데 그러다가 아르민은 목격하고 말았다.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황태자의 지나치게 진지한 모습을. 심지어 이마에선 송골송골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광경을.
‘……어째서?’
설마 사람 하나 괴롭히는 데에 그만큼 심혈을 기울이는 걸까. 마치 연구를 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가시를 건드려 보고. 뭔가를 관찰하듯 집중을 하고. 그 와중에 시선은 오직 이쪽의 가슴팍만을 주시하고.
게다가…… 막상 그러고 보니 가시에 찔린 자리가 딱히…… 아프지는 않은 듯하고.
‘뭐지?’
아르민은 뒤늦게야 뜻밖의 사실을 자각했다. 아프지가 않았다. 무려 겨드랑이와 팔꿈치 안쪽, 손톱 뿌리를 이토록 커다란 가시에 푹 찔렸는데…… 그런데 아프지가 않았다. 아니,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상했다. 신기했다. 거짓말 같았다. 이쪽의 가슴팍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황태자의 혼잣말 또한 그러했다.
“이상하네. 유전적인 원인이라면 이 나이쯤이면 심실중격이나 측벽 쪽에 징후가 보여야 하는데?”
“…….”
“뭐지? 신기하네. 이럼 유전적인 요소가 원인이 아니라는 소린데.”
“…….”
“가족력이라는 게 거짓말이었나? 아닌데. 그럴 리는 없는데. 그런데 써클은 또 왜 이래.”
“읍읍?”
“어. 잠깐만. 좀 있어 봐. 관찰 더 하고.”
“…….”
“안 아프지?”
“으, 읍.”
“어 그럼 됐어.”
“…….”
뭐야.
나 지금껏, 진찰을 받고 있는 거였어?
뒤늦은 깨달음이 아르민의 편견을 강하게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