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녹슨 심장 (1)
……뭐야.
설마 나 지금껏, 진찰을 받고 있던 거였어?
뒤늦은 깨달음이 용창 피아노 울리듯 아르민의 전두엽 주름 가득 끼어 있던 편견의 고리를 두들겼다. 하지만 깨지진 않았다. 한 번의 깨달음 비스므리한 걸로 깨지기엔 아르민의 편견이 더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못 믿어. 아니, 사람을 이렇게 다짜고짜 묶어다가 괴롭히는 거잖아? 예상 외로 안 아프다고 해서 내가 속을 줄 알고?’
잠깐 방심(?)할 뻔했던 아르민은 더욱 긴장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마음을 푸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죽이라고 했더니, 진짜 죽여 주겠다며 이러는 인간이잖아? 지금 안 아픈 거? 이것도 속임수일 거야. 내가 잠깐 긴장을 풀면 그걸 가지고 또 사람을 농락하려고. 지금 이런 내 모습을 즐기려는 거지.’
그 뒤엔?
더욱 철저한 고통을 가할 것이다. 풀어주는 척했다가 더 괴롭히며 상대의 정신이 무너지는 꼴을 감상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괴롭힘일 테니까.
“…….”
라키엘을 보는 아르민의 눈빛이 더욱 뾰족해졌다. 한편으로는 아까보다 수십 배는 단단한 결의가 알찬 명란젓처럼 꽉꽉 채워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소년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라키엘이 아니었다.
‘쓰읍. 이 녀석, 뭔가 혼자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한의술, 특히 침술은 이게 문제다. 모르는 사람이 처음 받을 때 느끼는 문화 충격이 생각보다 크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 가르딘 경도 그랬다. 당시엔 셀프 시침을 하는 이쪽을 보며 자해를 하는 거냐며 울고불고 난리가 날 뻔했으니까. 아마 아르민이라는 이 녀석도 지금 이쪽이 자길 괴롭히는 걸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상관없다.
이쪽은 확인할 것만 제대로 보면 되니까. 정신을 집중하며 네 번째 가시를 들었다. 그리고 아르민의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 그중에서도 중충혈(中衝穴)을 야물딱지게 찔렀다.
즉, 셋째 손가락 끝부분, 손톱 끄트머리와 살이 만나는 사이의 공간으로 가시를 쑤셔 넣었다.
“……!”
아르민의 눈이 확 벌어졌다. 이내 녀석의 눈빛 가득 떠오르는 원망과 체념. 마치, ‘내 이럴 줄 알았다, x새끼야’라며 눈으로 욕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역시 개의치 않았다. 소년이 눈빛으로 쌍욕 포인트를 2배 타임 이벤트로 적립하건 말건, 그는 관심도 두지 않고서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방금 찌른 중충혈의 자극에 아르민의 심장이 보이는 반응을 관찰했다.
“흐음.”
확실히 모든 게 정상이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심장과 관련된 혈을 자극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지극히 평범했다. 나무랄 데가 없었다. 마치 반듯하게 잘 말아놓은 김밥이 한 줄의 흐트러짐도 없이 접시에 담겨 있는 모습 같달까.
‘심장 박동 패턴? 기혈의 피드백? 너무나 정상이야. 심장 근육을 감싸는 기혈의 움직임도 그렇고. 그냥 100점 만점. 하다못해 심장과 수화지교(水火之交)의 균형을 이루는 콩팥의 반응마저도 나쁘지 않아. 이러면 진짜로 이 집안 사람들을 단명하게 만드는 심근증 그거, 유전이 원인이 아니라는 소리인 건데?’
아무리 봐도 그랬다. 아스라한 가문을 괴롭히는 비후성 심근증이 유전 때문인 거라면, 지금 아르민에게서도 어떤 형태로든 징후가 보여야 했다.
그런데 없다.
말끔하다.
심근증의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튼튼한 심장에 주는 상이 존재한다면 이 녀석에게 당장 우승컵을 안겨주고 싶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럼 다른 원인이 따로 있다는 건데.”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을 풀었다. 그리고 비로소 아르민과 시선을 맞추었다. 녀석은 역시나 아직껏 이쪽을 향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중이었다.
“앗 따거.”
“…….”
“이 녀석 이거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
“반박을 못 하는 걸 보니 지적을 받고도 할 말이 없나 보지?”
“……읍읍!”
“아 맞다. 재갈.”
“으읍읍!”
“미안.”
“…….”
라키엘은 아르민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자. 이젠 좀 편해졌을 거다.”
“……후, 후욱!”
“좀 살 것 같지? 고맙지?”
“저는…….”
“워워. 감사의 말은 접어두고. 오글거리니까.”
“…….”
“어이가 없어? 나도 어이가 없어. 사실은 내가 더 어처구니가 없을 거야, 지금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르민은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라키엘이 빙긋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생각보다 너무 건강해서.”
“…….”
“아 오해하진 말고. 아프길 바란 건 아니니까.”
“…….”
“자 그럼 가시 빼줄게. 힘 주지 말고. 엿차.”
푯, 표뵷!
아르민의 손가락이며 곳곳에 꽂혀 있던 가시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한데 그 과정에서도 아르민은 여전히 아프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저토록 무식하게 커다란 가시가 무려 손톱 아래에 박혀 있다가 빠져나가는 건데도.
소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 전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음? 뭐가?”
“죽여 주겠다며 제대로 괴롭힐 것처럼 구셨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를 찌른 가시는 전혀 아프지가 않고. 마치 제 건강을 살펴본 것처럼 말씀을 하시고. 그럼에도 여전히 제 포박을 풀어주지는 않으시고. 너무 헷갈려서 말입니다.”
“아 맞다. 포박.”
“저를 정말로 죽이시려는 게 아니라면, 이만 풀어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응 싫은데.”
“……예?”
“싫다고.”
“무슨…….”
“너한테 왜 이러느냐고 물었지? 간단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설마 아직도 말입니까?”
“당연하지. 마젠타노의 3대 황제와 너희 가문 사이에 있었던 일들. 아직도 말하기 싫은 건가?”
“예.”
“허어. 단호한 거 보소.”
“이미 밝혀드렸듯이, 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 불명예를 겪을 바엔 차라리 자결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싫고 수치스러워? 그 일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대략 200년쯤은 지난 일일 텐데?”
“하지만 가문의 가장 중요했던 아스라한 심법의 원본을 폐기당한 일이,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해서 희석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하. 그랬구나.”
“예?”
“그랬던 거구나아. 후후.”
“……헉.”
“말해 버렸네?”
라키엘은 빙그레 웃었고, 아르민은 경악감에 쩌적 굳어 버렸다. 하지만 아르민에겐 실수에 따른 자기혐오에 빠져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도 전에 라키엘이 손을 뻗어와 소년의 양쪽 어깨를 굳게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이봐. 잘 들어. 수치? 아니야. 이건 권리야.”
“……예?”
“피해를 입은 거잖아.”
“예에?”
“너희 가문이 말이야. 우리 마젠타노의 3대 황제에게. 방금 네가 말했잖아. 가문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심법의 원본을 폐기당했다고. 그게 피해를 입은 거지. 안 그래?”
“그건…….”
“너희가 피해자인 거라고.”
“…….”
“그래서 난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어. 왜? 어째서? 피해자인 쪽이, 자기가 피해를 입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수치이고 불명예가 되는 거지?”
“그야 물론…….”
“쪽팔려서?”
“…….”
“알아. 무력함을 느꼈겠지. 배신감도 느꼈을 거야. 왜 아니겠어. 그러니 너희 가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일을 떠올리는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을 거고.”
“그건…….”
“당연히 그랬을 거야. 이해해. 그렇지만 말이다. 피해를 입은 쪽이 그걸 쉬쉬해야 한다는 거. 좀 서글프잖아. 그래서 미안해. 3대 황제의 후손인 내가 사과할게. 지금 너한테. 정식으로.”
“네?”
아르민은 아까 말실수를 했던 때보다 더 놀랐다. 사과라니. 황족인 황태자가? 변경백의 손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심지어 정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방식으로 자신을 농락하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농담을 하는 눈이 아니야.’
장난을 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마냥 순수하게 사과를 하는 눈빛도 좀 아닌 것 같았다.
뭔가 촉이 왔다.
심지어 불길한 촉이.
그러한 아르민의 쌔한 느낌은 불운하게도 너무나 잘 들어맞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아르민? 내가 황태자의 명예를 걸고서 제안할게. 넌 가문의 비화를 스스로 말할 바엔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했지? 너한테 진심으로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가 그런 네 결의를 도와주겠어.”
꽈악.
아르민의 어깨를 쥔 라키엘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났다. 반대로 그의 입가에는 너무나 화사하고 인자한 미소가 한껏 피어났다.
“내 제안은 이거야. 지금 네가 가문의 비화를 말해주지 않으면, 나는 당장 밖으로 나가서 네가 가문의 비화를 나한테 말해줬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겠어.”
“……예?”
아르민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태자에겐 개소리를 매우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재능이 과도하게 많이 있었다.
“내 제안이 이해가 안 돼? 나한테 가문의 비화를 말해줘. 안 그러면 네가 비화를 말했다고 변경백 가문 전체에 소문을 내고 다닐 거야.”
“그게 무슨…….”
“만약 내가 그런 소문을 내고 다니면 가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보게 될까? 아마 자결 안 하고는 못 배길 텐데?”
“하, 하지만 황태자 전하?”
“응?”
“그런 협박은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우리 집안의 사람들이 확인을 위해 황태자 전하에게 가문의 비화가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전하는 대답이 막히실 테고 거짓말이 탄로가 날 테니까 말입니다.”
“응 아닌데.”
“예?”
“네가 아까 말해줬잖아? 3대 황제에게 가문의 가장 중요한 심법을 강제로 폐기당했던 일이라고.”
“…….”
“그 정도만 말해주면 될 거야. 그 후엔, 어휴. 더 자세한 이야기까지 제 입으로 말하려니 차마 그건 좀 그렇군요. 워낙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라서, 후우…… 하고 한숨 좀 뱉어주면 만사 오케이.”
“…….”
“그 정도만 해주면 너희 가문 사람들도 더 꼬치꼬치 캐묻진 않을걸? 오히려 내가 그 정도까지만 말해준 걸 고맙게 여기겠지. 안 그래?”
“…….”
“그리고 너는 자결 확정.”
“저, 저는!”
“응. 말해봐.”
“저는…….”
“막상 진짜로 죽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무섭지? 죽기 싫지?”
……끄덕.
아르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실 아까는 홧김에 차라리 자결하겠다 어쩌겠다 말을 하긴 했더랬다. 당시엔 흥분을 하기도 했고, 황태자의 압박에 반발심이 들기도 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흥분이 가라앉고 보니? 당연히 죽는 게 싫었다. 솔직히 아깝고 무서웠다. 앞으로 창창하게 살아갈 인생인데. 잘하면 자신도 변경백이 되어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을 텐데. 당연히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사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다행이다. 협박이 통해서.’
아까 아르민의 심장을 보았을 때. 한편으로는 녀석의 심장을 둘러싼 써클을 함께 감지한 그였다. 당연했다. 경혈 스캐닝은 마나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대상의 내부를 관찰하는 스킬이니까. 마나 그 자체인 써클이 감지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데 아르민에게 써클이 있다는 점 자체가 문제였다.
‘말로는 3대 황제에게 아스라한 심법을 폐기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써클은 어떻게 지니고 있는 걸까.’
써클은 오직 아스라한 심법으로만 생성할 수 있다. 그건 심법을 보유한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민이라는 이 녀석의 가슴에 자리한 써클이 조금 특이했다. 아니, 이 경우엔 기이하다는 말이 더 적당하겠다.
‘뭔가 내가 지닌 써클과 제법 달랐어.’
소년의 심장을 둘러싼 특이하고 기이한 형태의 써클. 어쩌면 저것이 심근증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확인을 해봐야 한다.
‘당연히 확인의 시작은 이들 가문의 아스라한 심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하여 그걸 듣고자 조금 무리수를 던져가며 협박을 했고, 다행히 그 수법이 통했다. 역시나 상대가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녀석이라, 이쪽의 블러핑이 먹힌 것이었다.
“그럼 좀 천천히 들어볼까.”
라키엘이 다리를 꼬며 앉아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아르민이 곤혹스러운 듯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저기, 그러면 우선 저를 묶인 것부터 좀 풀어주시면…….”
“응 싫어. 다 듣고 나서 풀어줄 거야.”
“…….”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로소 완전히 체념한 아르민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스라한 심법으로 쫄깃한 명성을 떨쳤던 아스라한 가문이, 흥철 없는 흥철팀 신세가 된 처지가 가슴 아파서, 심근증이 생길 지경으로 빠졌던 이야기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