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녹슨 심장 (2)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냥 도입부 빼고 스트레이트로 쭉쭉 가자 좀.”
“아, 앗? 네.”
아르민 아스라한.
자신의 가문에 얽힌 비화를 마침내 밝히려던 소년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지는 못했다. 두 팔이 여전히 침대에 묶여 있는 까닭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아르민은 반쯤 체념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략 200년쯤 전이었을 겁니다. 당시 황위를 이은 3대 황제, 비스콘티 황제는 아스라한 심법에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합니다. 20살이 되기도 전에 트리플 써클의 경지를 이루었으니까요.”
“오오.”
스물이 되기도 전에?
트리플 써클이라면 천재 맞다.
현재의 황제도 아직 더블써클에 머물러 있을 정도니까.
“아무튼 그래서?”
“그런 덕분이었는지, 비스콘티 황제는 아스라한 심법의 유용성과 위력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그걸 익혔을 때 생겨날 수 있을 잠재적인 위험성도 함께 말이지요.”
“반란 같은 불미스러운 일 말인가.”
“네, 아마도.”
아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가문의 가장 수치스러웠던 비사를 되짚으며 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아스라한 가문은 온전한 아스라한 심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불운의 시작이었고요.”
“잠재적인 위험요소로 찍혔단 말이군.”
“네. 비스콘티 황제는 매우 위력적인 심법을 황가가 아닌 다른 세력이 공유하는 것을 위험하다 여겼지요. 그래서였을 겁니다. 어느 날 일방적인 선포를 했던 것은 말입니다.”
“설마.”
“짐작하신 건가요?”
“대강은? 아스라한 가문의 아스라한 심법 사용과 전수를 금지시킨 건가?”
“네.”
아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제 가문의 선조들은 비스콘티 황제의 그러한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지요. 듣기로는 거의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반란은 일으키지 않았군.”
“네. 그 뒤로 수많은 진통과 서글픈 조율의 과정이 있었노라 하더군요. 저도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요.”
“어쨌건 충돌을 피하고 합의점을 찾았다는 말로 들리는데.”
“네. 맞습니다.”
“그 합의점이 뭐였지?”
“그건…….”
아르민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차마 그 부분만은 선뜻 말하기 싫었던 걸까. 소년은 잠깐 망설인 끝에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써클 숫자의…… 제한이었습니다.”
“제한?”
“네, 전하.”
“설마. 하나로만 뭐 이렇게?”
“정확하십니다. 하나가 맞습니다.”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아스라한 심법 사용자가 평생 한 개의 써클만을 품고서 살아야 한다니. 싱글 써클이라면 초심자 수준인 건데. 그건 게임으로 치면 초보자 세트로 평생을 플레이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혹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입사 초봉만 받으면서 살라는 말과도 똑같다.
“허. 참. 그건 좀 징하네. 중간에 무슨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제안한 3대 황제도 그렇고. 그걸 받아들인 너희 가문도 그렇고.”
그 정도면 반란을 안 일으킨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 경우는 반란을 막으며 협상을 관철시킨 3대 황제의 정치적 수완이 엄청났다고 해야 할까.
라키엘은 물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이상한 점이 있단 말이지. 써클을 하나로 제한시키는 건 알겠다 그거야. 그런데 그게 제대로 단속이 되나?”
“됩니다.”
“오늘날까지도?”
“네, 전하.”
“어떻게?”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첫 걸음마를 하는 시기가 되면 황도로 보내지니까요.”
“어? 잠깐만. 또 설마.”
“역시나 짐작하신 겁니까?”
“대강은? 혹시 그거, 아스라한 심법을 익힌 황족이 어린아이의 몸에 뭔가를 하는 건 아니지, 설마?”
“안타깝게도 맞습니다.”
“…….”
“아마 전하께서는 모르고 계셨던 듯하군요. 사실 황가에는 그 일을 전담하는, 황족으로만 이루어진 부서도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직속의 부서라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지요.”
“허.”
솔직히 그건 몰랐다.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그 기관에 보내진 아이의 심장이나 써클에 체질 개선 비슷한 제한을 걸어 버리는 건가? 평생 하나만의 써클을 보유할 수 있도록?”
“네.”
“그럼…… 너도?”
“네, 전하.”
“…….”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민.
녀석을 보며 라키엘은 콧등을 찡그렸다.
“미안.”
“아닙니다. 전하께서 하신 일은 아니니까요.”
“뭐, 어쨌건. 그러면 또 궁금해지는 점이 있는데.”
“하문하시지요.”
“아까 내가 너희 가주, 그러니까 변경백과 마주했을 때 말이야. 그때 느낀 기세는 싱글 써클을 지닌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강력했거든.”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정말로 그러했다.
변경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딱히 기세를 끌어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평범하게 앉아만 있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최소 트리플 써클,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것이었다.
‘진맥이나 경혈 스캐닝으로 슬쩍 봤을 때도 그랬어.’
실제로 체내에 흐르는 마나의 양이 무식할 정도로 많았다. 일견 파괴적인 느낌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정도의 기세를 지니려면?
싱클 써클로는 불가능하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멀티 마나하트?
그런 부가적인 기법으로 보조는 할 수 있겠지만, 아까 느낀 변경백의 기세는 분명 아스라한 심법 특유의 것이었다. 그건 같은 심법을 보유한 자신이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따로 독자적인 방법을 개발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네. 전하께서는 역시나 짐작이 빠르시군요.”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민. 이번 대목은 가문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아닌, 그 수치를 극복해낸 과정인 듯 녀석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비스콘티 황제로부터 써클의 숫자를 제한당하고 40년 정도가 흘렀을 때였습니다. 4대 황제께서 등극한 직후의 시점이었지요. 당시에 우리 가문의 시조이신 하비엘 아스라한에 비견되는 새로운 천재가 탄생했습니다.”
“천재라. 극복법을 창안한 건가.”
“네. 하나의 써클을 유지하는 채로 위력을 올리는 기법이었습니다.”
“어떻게?”
“간단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원본 아스라한 심법을 익히셨으니 잘 아실 겁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핵심은 바로…….”
“마나의 자유로운 흡수와 증폭, 발출이지.”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거의 무협지에서 나오곤 하던 흡성대법을 부작용 없는 상태에서 대폭 업그레이드한 듯한 심법. 거기에 증폭과 발출, 다양한 응용 기능까지 첨가한 최신식 버전. 그것이 자신이 처음 아스라한 심법을 체감하며 느낀 감상이었다.
아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하십니다. 그러한 아스라한 심법은 써클의 갯수를 늘려가며 서로 공명하고, 더욱 안정적으로 증폭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요. 덕분에 트리플 써클에 오르면 발파 같은 위력적인 기술도 사용이 가능하게 되고요.”
“뭐. 그렇지. 그런데 하나의 써클로 어떻게?”
“크기를 늘렸습니다.”
“어?”
“그냥, 하나의 써클의 크기를 키웠습니다.”
“잠깐만. 그러면 죽을 텐데?”
“네. 보통은 그렇겠지요.”
“그런데 안 죽으면서 써클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을 찾은 거야?”
“네, 전하. 천재라 불리는 그분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끝끝내 극복하신 거지요. 덕분에 안정적으로 써클의 크기를 늘리는 기법을 찾아내셨고, 저 같은 후손에게까지 그 기법이 전해진 것이고요.”
“…….”
라키엘은 내심 감탄했다.
저건 미친 짓이다.
써클의 크기를 늘리는 거? 듣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저건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나써클의 크기는 심장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는데, 사람의 심장은 타고난 크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늘리고 키워? 그건…… 굳이 비유를 하자면 성장을 끝마친 20대 중반 성인이 두뇌 크기를 키워서 지능을 올린다는 거랑 똑같은 이야기인 건데.’
그냥 살짝만 키운 게 아니다. 싱글 써클을 트리플 써클 이상의 성능으로 끌어올리려면? 사람으로 비교하자면, 두뇌 크기를 코끼리의 것만큼 키워야 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허무맹랑한 소리다. 자신도 직접 당사자를 보지 않았다면 절대 안 믿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해냈단다.
심지어 혼자만 해내고 끝난 게 아니었다. 가문의 후손들을 배려하기까지 했다. 눈앞의 아르민 같은 평범한 소년까지도 무리 없이 익힐 수 있도록, 대중화가 가능한 양산 버전(?)까지 충실하게 남겨놓은 것이다.
‘후우. 미쳤네. 미쳤어.’
이 정도 업적이라면 전설의 그랜드 마스터인 하비엘에 필적하는 천재인 게 맞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그런 세기의 천재가 싱글써클의 감옥에 갇히지만 않았다면, 그걸 극복하느라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당시의 제국은 사상 두 번째 그랜드 마스터를 보유한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쯧. 3대 황제 그 양반이 빌런인 거였네.’
통탄할 노릇이고, 한편으로는 개탄스럽고도 감탄스러운 일화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롭게 짐작되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덕분에 잘 알겠다. 잘 들었고. 그래서 3대 황제는 써클의 숫자를 제한하면서, 대신 너희 가문의 나머지 기예들을 보장하는 권리를 약속한 거였군. 맞나?”
“예, 전하.”
“그래서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해 달라는 내 요구에 너희 가주가 그렇게나 정색을 한 거였구만.”
“그런 요구를 하셨던 겁니까?”
“어.”
이들 가문이 겪었던 비사를 듣고 나서 보니, 자신의 요구는 대차게 까이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가주의 유달리 냉랭했던 태도도 잘 이해가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로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서 제국의 방패가 되어주는 것이 오히려 감지덕지할 지경이랄까.
‘그러고 보면 이들 가문은 원작에서 제국이 망하는 순간까지도 배신하지 않았지. 배신은커녕 끝까지 나름의 의리를 지켰어. 가문의 위대한 시조께서 남기신 유지를 끝까지 지켜내리라, 뭐 그런 대사가 있었던 것도 같고.’
원작 마검황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새삼 참으로 대단한 가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더 중요한 짐작을 확인해보는 일이 우선이겠다.
그건 바로, 이들의 변형된 아스라한 심법과 비후성 심근증의 관계에 대한 짐작이었다.
“야. 그럼 써클 좀 돌려보자.”
“……예?”
“못 들었어? 네 써클. 지금 돌려보라고.”
라키엘은 라면 한 젓가락만 먹자는 듯이 뻔뻔하게 말했다. 아르민이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써클을…… 왜…… 왜요?”
“왜긴.”
라키엘은 안면 가득 텅스텐 합금 철판을 텅텅 깔았다. 그리고 김치찌개처럼 잘 끓여진 착한 대사에 그렇지 못한 우라늄-235 같은 미소를 알차게 뿌리며 대꾸했다.
“너 벽에 똥칠할 때까지 무병장수하게 해주려고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