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녹슨 심장 (3)
벽에 똥을 칠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니. 그보단 어째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나한테 했던 그 말의 진짜 뜻은 대체 뭐였던 걸까. 그만큼 오래 살게 해준다는 걸까. 아니면 사실은 돌려까면서 멕이는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걸까.
쯔르, 쩍! 쯔르르, 쩍!
달빛 아래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에 아스라한 변경백의 손자, 아르민 아스라한은 무심결에 어깨를 움츠렸다. 두려워서? 아니. 어쩐지 새 소리마저도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버려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황태자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여서.
‘그 작자는 대체 왜 이런 오밤중에 여기로 나오라고 한 거지.’
아르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낮이었다면 가문의 사람들이 검술을 훈련하며 구슬땀을 흘렸을 연무장. 그러나 자정을 넘긴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아르민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혹시 날 또 괴롭히려는 걸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황태자 그 작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미 전적(?)이 있으니까. 아까 낮에도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고, 협박하고, 끝끝내 가문의 비화를 알아낸 악랄하고 표독하며 집요한 자가 아니던가.
그래서였다.
문득, 아르민은 낮에 들었던 황태자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의 주름을 더욱 깊고 찰지게 다렸다.
-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변형한 아스라한 심법, 그 자체가 너희 가문을 병들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으니까.
“…….”
아까, 자정에 연무장으로 나오라던 황태자의 말에 의문을 표했던 자신이었다. 왜 그런 시간에 남의 눈을 피하듯 움직여야 하는 거냐고. 굳이 그럴 일이 있는 거냐고.
그랬더니 황태자가 돌려주었던 대답이 저것이었다.
개량형 아스라한 심법.
그것이 심장병을 부르고 있을 거라고.
확인을 해봐야겠으니, 자정에 연무장에서 보자고.
“…….”
아르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금껏 150년이 넘도록 수많은 선조들이 사용하고, 가문의 명성을 드높이며, 무수한 전투와 영광의 무훈시를 써내려간 심법이었다. 그런데 뭐? 그 심법이 심장을 병들게 했을 거라고? 선대의 모든 이들을 단명의 비극으로 몰아넣었노라고?
‘헛소리야.’
듣는 순간 반발심이 들었다. 차마 상대가 상대인 만큼 욕을 할 수는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즉각적인 반박을 하였더랬다.
그런 짐작은 합당하지 않다고.
틀린 짐작일 것이라고.
어불성설이라고.
그랬더니 황태자는 그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 그러니까 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자정에 연무장으로 나오면 되잖아.
“…….”
그래서 나왔다.
30분째 기다리는 중이다.
한데 자정이 지났는데도 어쩐지 황태자는 소식이 없었다.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이쪽을 엿먹이듯 바람(?) 맞히는 걸까. 슬금슬금 불안한 기분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어. 일찍 나와 있었네?”
별안간 뒤쪽에서 낯익은데 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였다. 그쪽을 돌아본 아르민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돌아보았을 때 이미 황태자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 옆의 호위야 그렇다 쳐도, 황태자가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는데.
“오, 오셨습니까.”
“왔으니까 여기 있지.”
“…….”
“많이 기다렸어?”
“예.”
“그래. 그랬구나.”
“…….”
30분이나 지각한 주제에 미안하지도 않은 걸까, 이 사람은.
“미안. 기억 속의 자료들을 좀 검토해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네. 심근증 관련 자료들이 워낙 좀 그래서 말이지. 어쨌건 이런 곳에서 혼자 기다리느라 심심하고 추웠을 텐데.”
“아…… 괜찮습니다.”
“정말?”
“…….”
“안 괜찮은 거 다 보이는데. 왜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기색도.”
“그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대답해주실 겁니까?”
“묻는 거 봐서.”
“…….”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고, 아르민은 잠깐 버퍼링(?)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의 머뭇거림을 끝낸 아르민이 내내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저기, 전하께서는 말입니다. 우리 가문의 개량형 심법이 심장을 망가뜨린다고 하셨는데…… 그 짐작의 근거를 듣고 싶습니다.”
“듣고 싶어?”
“예.”
“그럼 검을 들어.”
“예?”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뭔가를 휙 던졌다. 얼결에 받고 보니, 연습용 철검이었다.
“무슨…….”
“최선을 다해서 날 제압해보라고.”
“저, 전하를요?”
“응.”
“제가요?”
“응.”
“……왜요?”
“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했고. 난 대답해줄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러려면 꼭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게 있어서.”
“…….”
모르겠다.
정말로 이 사람의 속은 짐작이 안 된다. 매번 헷갈린다. 어떻게 보면 정중한 것도 같은데. 달리 보면 막 굴리는 거 같고. 어찌 보면 우리 가문을 걱정해주는 것 같은데. 또 가만 보면 이용만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대련이라니.
정말로 저 말처럼 뭔가를 확인하려고 저러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구실을 잡아서 이쪽을 괴롭히려는 걸까.
그런데 그때였다.
“어이. 너,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거 아니냐?”
황태자가 냉소적인 말을 툭 던져 왔다.
아르민은 얼떨떨해졌다.
“네?”
“너 지금 말이다. 내가 널 단순히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지 아닌 건지 긴가민가한 거잖아. 맞지?”
“…….”
부정을 못하겠다.
황태자의 일침이 이어졌다.
“내가 이유도 없이 널 왜 괴롭혀? 고작 변경백 가문의 손자 정도인 애송이를? 굳이 오밤중에 이런 곳으로 불러서? 내가 그렇게 할 일 없고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냐?”
“그건…….”
“아니면, 내가 목적도 이유도 없이 괴롭혀야 할 만큼 너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으로 느껴져?”
“…….”
이건 좀 아프고 억울한데.
황태자의 말은 듣고 보면 다 맞긴 한데, 막상 듣는 입장에서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덕분에 연습용 철검을 쥔 아르민의 손아귀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 그건 아닙니다.”
“아니야? 그럼 내가 할 일 없어서 너나 괴롭히려고 황도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온 할 짓 없는 인간으로 보였단 거네?”
“예?”
“감히 황족을 그렇게 본 거야? 황족 능멸죄 같은데?”
“그, 그건…….”
“아니지?”
“아닙니다!”
“억울해?”
“…….”
“억울하면 검을 들어.”
“하, 하지만…….”
“자칫 황족을 다치게 할까 봐? 이놈 이거 또 이러네? 네가 날 다치게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인 거 같아?”
“아뇨, 그건…….”
“아냐? 그럼 내가 너 정도한테 당할 만큼 한심하고 만만하게 보였단 거네?”
“……아아악!”
결국, 라키엘의 집요하고도 교묘한 도발(?)에 아르민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간 쌓인 억울함을 참지 못한 소년이 철검을 들고서 전진 스텝을 밟았다. 그걸 곁에서 보던 데미안은 진심으로 소년을 향한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라키엘은 보람 가득한 심정으로 만년설을 들었다.
츠스스스스-!
마나가 투입되자마자 냉기의 방패를 전개하는 만년설!
그 뜻밖의 모습에 아르민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소년의 검은 명가의 후예답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냉기 실드를 단호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더욱 얄짤없이 튕겨졌다.
카아앙-!
“……!”
상상 이상의 반발력. 검신을 통해 전달되어 오는 무지막지한 냉기까지. 하마터면 아르민은 일격에 검을 놓칠 뻔하였다.
‘무, 무슨…….’
안일했다.
그저 마력이 담긴 방패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검도 없이 방패만 들기에 반격을 걱정하지도 않았는데.
‘방패 자체의 성능? 아니야. 이건 황태자의 실력이야.’
아르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검이 방패를 내리치던 순간, 황태자의 허리와 어깨, 팔뚝과 손목이 하나의 장치처럼 정교하게 연계되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방패가 묘한 각도로 틀어졌고, 검격의 힘이 분산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카앙.
어찌 대비할 틈도 없이 검을 튕겨내 버렸다. 그것도, 이쪽의 가슴이 훤히 열리는 각도를 의도적으로 만들도록 말이다.
‘……위험하다!’
아르민은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설마하니 방패를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은 몰랐다. 아니.몰랐다는 건 변명이다. 지금은 변명 따위가 통할 순간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빠르고 정확한 대처뿐!
츠즈즛!
아르민은 온몸의 힘을 풀었다. 튕겨나간 검을 억지로 끌어당기려 하지 않았다. 가슴이 열린 채로 두었다. 그 상태에서 몸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했다. 튕겨나간 힘을 역이용하여 재빠르게 물러나며 균형을 되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거냐?”
“……!”
균형을 찾았다 싶은 순간, 어느새 황태자가 가슴팍을 파고들고 있었다. 냉기의 방패를 앞세우고서. 이쪽의 명치를 향해.
퍼컹-!
“……그읍!”
방패치기에 복부를 맞는 순간, 아르민은 고귀한 황족의 얼굴에 구토를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며 식도 괄약근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러나 황태자에겐 인정도 자비도 없었다.
“너, 아직도 이 상황이 만만하게 느껴지나 본데.”
퍼엉!
“……우읍!”
“써클, 안 쓰냐? 응?”
푸컹!
“으큽……!”
묘한 갈굼과 함께 들어온 방패치기 복부 3연타!
아르민은 기절할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통증 속에 허우적거렸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는 절박한 본능에 따라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크읏!”
……키이이잉-!
소년의 가슴에서 거대한 써클이 눈을 떴다. 심장에 피워낸 단 한 줄기 힘의 고리. 오직 하나이기에 더욱 맹목적으로 절실하게 갈구하는 힘의 요구. 일반적인 아스라한 심법의 것보다 훨씬 맹렬하고 사나운 성격의 써클이었다.
동시에 소년의 움직임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타닷!
순식간에 라키엘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반격 태세가 이루어진 것도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공수일체의 움직임. 맹목적인 힘의 추구로 태어난 써클을 벗 삼아 노래하는 파괴의 선율.
츠카카카칵-!
검격이 쏟아졌다.
한 줄기의 섬광이 사라지기 전에 두 번째 줄기가 만년설을 강타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함께 터졌다. 다섯이 여섯을 부르고, 여섯이 일곱과 여덟을 증폭하고, 여덟이 백 갈래의 변화를 가르고, 찌르고, 베고, 걸고, 찍으며, 포효했다.
투쾅-!
“……허?”
만년설이 당장에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해졌다. 그러나 라키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냉랭함에 가까울 정도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한 채 소년의 가슴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혈 스캐닝을 발동한 채였다.
‘찾았다.’
라키엘의 눈이 번득였다.
맹격을 쏟아내며 격렬하게 뛰는 소년의 심장. 그 심장을 둘러싸며 날뛰는 한 줄기의 써클. 사이를 오가는 난폭한 마나의 흐름까지 모두.
덕분에 확신이 들었다.
개량형 아스라한 심법.
치명적인 비후성 심근증.
둘 사이의 명확한 연결고리를.
‘확인, 완료.’
입꼬리 가득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워내는 라키엘의 전두엽 대뇌피질 주름 사이로, 이들 가문의 비후성 심근증을 치료할 플랜이 차곡차곡 야물딱지게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