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균형을 되찾을 방법 (2)
“……그랬던 것이지.”
“그러하였던 것입니까.”
“그렇지.”
“그렇군요.”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변경백은 입을 꾹 다물었다. 변방의 대가주는 조금 전까지의 일들을 되짚었다. 아까 ‘신체포기 각서’인지 뭔지 하는 서류를 내밀었던 황태자. 그 후로 황태자가 해준 이야기를 말이다.
‘설마하니 황태자씩이나 되는 분께서 아르민 같은 아이를 그렇게 들볶으셨을 줄이야.’
황태자는 자신이 어제부터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특히, 이쪽의 손자인 아르민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이다.
“…….”
그저 예의상 황태자에게 붙여준 아이였다. 잡다한 시중이나 들라고. 겸사겸사 황태자의 곁에서 보고 듣는 정보를 모아 이쪽에게 전하라고.
한데 그 아이가…….
‘가문의 모든 것을 황태자에게 술술 밝혔을 줄이야.’
기도 차지 않았다.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소년에 불과한 아이를 거침없이 들볶은 황태자의 방식을 떠올리면 살짝 소름이 돋기는 했다. 악랄? 그건 아닌 것 같고. 굳이 표현하자면 ‘더럽고 치사’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변경백은 마냥 황태자를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황태자가 아르민을 통해 알아낸 것은, 단순한 가문의 수치스러운 비사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면, 전하께서는 정말로 본 가문의 개량된 아스라한 심법이 심장의 이상을 불러온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으음. 확실히.”
“확신까지…….”
“확인을 거쳤으니까.”
턱.
의구심을 표하는 변경백.
그를 향해 라키엘은 자신의 가슴을 조용히 짚어 보였다.
“그대에겐 조금 고깝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도 아스라한 심법의 보유자니까. 아르민 그 녀석의 검을 받아내면서 느낄 수 있었지. 녀석의 마나 흐름. 써클의 움직임. 어떤 방식의 조화와 균형으로 힘을 만들어내는지까지.”
물론 거짓말이다. 사실은 경혈 스캐닝으로 봤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밝히면 또 이야기가 복잡해질 테니까 적당한 거짓말로 스킵. 라키엘은 인생 편하게 설렁설렁 넘기자는 마인드로 설명했다.
“덕분에 알게 됐어. 그대의 가문이 사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아스라한 심법은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거칠어. 아마도 하나의 써클로 한계를 돌파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그 대가로 신체와 심장에 가해지는 가혹한 부담을 떠안게 됐고.”
“부담이라시면…….”
“써클을 돌릴 때마다 심장이 엄청난 압력에 짓눌리더군.”
“사실입니다.”
“자각하고 있었나?”
“아스라한 가문의 핏줄로 태어나 검을 쥐는 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극복하는 통증이기도 합니다.”
“극복이라. 정말로?”
“열 살이 되기 전에 그 통증을 극복해야 검을 쥘 자격을 얻으니까 말입니다.”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건가? 합격률은?”
“통과하는 비율을 물으시는 것이라면…… 거의 백이면 백 모두가 통과를 합니다.”
“합격률이 높으시네.”
“딱히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통증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변경백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키엘은 알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 그렇군. 당사자들은 별로 큰 압박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로군. 그러니 가문의 사람들이 백이면 백 죄다 단명 크리티컬을 맞이한 거고.”
“크리……티컬이라니요?”
“아아. 미안. 당사자의 감각과는 별개로, 심장은 여전히 계속해서 엄청난 압박을 견뎌야 했을 거라는 뜻이지. 평생. 개량된 심법을 사용할 때마다.”
“…….”
“즉, 그대 가문의 심장 질환은 저주나 혈통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이야.”
“…….”
변경백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부리부리한 눈길을 이쪽으로 보낼 뿐. 라키엘은 변경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럼, 본 가문의 심법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그는 매우 강력한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의 생활 습관이 어떤 식으로 문제가 되는지를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유형의 환자들을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많이, 자주 접했던가.
‘아아. 고향의 향기.’
그놈의 식후땡 담배 한 모금을 끝끝내 못 버려서 기관지가 슬슬 망가질 기미를 보이고 있던 어르신.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목이며 허리, 고관절까지 다 틀어지는 게 뻔히 보이던 프로그래머. 야식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던 고도비만 환자까지.
다들 말을 진짜 진짜 진짜로 안 듣곤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잘못된 습관 때문에 본격적으로 아파본 적이 아직은 없다는 점이었다.
‘내 경험상 그런 분들이 말을 제일 안 들어. 차라리 어디가 확 아파져서 오는 분들은 그래도 당장 아프니까 절박해지는 거라도 있는데. 아직 안 아픈 예비 환자들은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정말로 그랬다.
환자들을 진맥하다 보면 ‘어?’ 싶은 뜻밖의 증상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다. 맥이 이상하다거나, 호흡이 꺼림칙해서 물어보면 건강에 안 좋은 습관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언을 하면?
십중팔구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기는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아오면서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들 했다. 딱히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노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들 그런 거지. 큰 문제도 없는데 왜 습관을 바꿔야 하느냐고. 사람 마음이 그런 거거든.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불편함이 귀찮고 싫은 거. 쓸데없는 수고를 들이는 기분이 드는 거.’
그런 기분은 정말로 아픈 곳이 생겨야 싹 가신다.
눈앞의 변경백도 비슷할 것이다.
심법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 차라리 정체 모를 저주나 혈통 때문에 단명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겠지. 개량된 아스라한 심법은 이들의 자부심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라키엘은 그러한 변경백의 심리를 짐작하며 말했다.
“그대도 아직은 심장의 고통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겠지. 하지만 그대의 심장은 이미 수십 년의 압박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비대해졌어. 정확히는 심장의 근육이 말이야.”
“근육이 늘면 좋은 것 아닙니까?”
“응 아니야.”
“…….”
“근육이 늘어난다고 해서 심장의 겉면이 커지는 게 아니거든. 사람의 가슴속 공간은 생각보다 한정적이라서. 갈빗대라는 정해진 면적의 철창 안에서 부풀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허파와 동거를 하는 기관의 필연적인 숙명이랄까.”
“그럼…….”
“심장 겉면의 크기는 한정적이야. 그래서 심장 근육이 비대해지면 겉면이 커지는 게 아니라, 내부를 향해 커지지. 즉, 심장 안쪽의 공간이 계속해서 좁아지는 거야. 그러다가 그게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펑. 문제가 터지는 거고.”
“…….”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사실대로 알려주자면 그대의 가문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문제를 겪었을 거야. 지금도 겪고 있을 거고. 앞으로도 겪겠지.”
“하면…….”
변경백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황태자를 향해 무례하게 분노를 표출할까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솔직한 목소리를 느끼기도 하였다.
바로, 오랜 시간 남몰래 품어온 의문이었다.
“…….”
사실은 그도 어릴 때부터 궁금했다. 왜 우리 가문의 사람들은 대대로 오래 살지를 못한 걸까. 어째서 60세가 되기도 전에 다들 똑같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죽어야 했던 걸까.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일가의 어른들이 똑같은 마지막을 맞이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의심이 갔다. 출처도 모를 저주? 솔직히 그건 미신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면 혈통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엔 가문의 시조인 하비엘 아스라한은 단명하지 않았노라 하였다.
그래서였다.
변경백이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심법을 남몰래 의심했던 것은. 어쩌면 심법이 심장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그럼에도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가주였다. 심법은 가문의 영광이자 자부심이나 다름없었고, 가주인 그에게는 심법을 떠받들고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증명할 마땅한 수단이 없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저 세월을 보냈다. 쉰 살을 넘기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단명의 숙명 또한 가문의 영광이라고. 애써 다가오는 죽음을 미화하며 현실을 외면하였을 뿐이었다. 그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한데 어쩌면,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전하.”
변경백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실은 어제부터 남몰래 고민했던 바를 솔직하게 밝혔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 전하께서 저에게 제안을 하셨지요. 가문의 사람들을 치료할 기회를 달라고 말입니다. 그 대가로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를 가져가시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랬지.”
“제안을 들은 뒤부터 밤새 고민을 거듭하였습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쩌면 저는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비난을 듣게 될 터이지요. 가문의 기예를 함부로 유출한 죄를 짊어지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가문의 사람들을 살리고, 대신 나를 원망하라고.”
“그럴 생각입니다.”
결심을 굳힌 변경백이 비장한 눈초리를 들었다. 남몰래 오랜 시간 의심했던 심법에 대한 진실을 풀어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잡아야 한다. 설령 대대손손 비난을 듣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하여 감히 전하께 여쭙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치료를 할 계획이냐고?”
“예. 꼭 듣고 싶습니다.”
“맞아. 그건 들어야지.”
치료 과정을 안내받는 것은 당연한 환자의 권리다. 또한, 그것을 환자에게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의료인인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다.
라키엘은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며 말하였다.
“우선, 아까 말했듯이 심장은 크기가 정해져 있어. 그걸 함부로 바꿀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부의 근육을 잘라내거나 하지도 못해. 그런 수술 실력은 나한테 없으니까.”
“그렇다면…….”
“ICD 삽입술? 못해. 그럴 기술 없어. 한약 처방? 그건 예방이나 보존에는 뛰어나지만, 이런 질환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못하고.”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변경백은 그저 입을 꾹 닫고서 경청해야 했다. 라키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남은 방법은 하나야. 내부가 좁아진 심장이 혼자서 신체의 혈류를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면, 보조 심장을 신체에 달아줘서 부담을 줄이는 거지.”
“예?”
보조 심장이라니요?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변경백은 뽀송뽀송하게 피어나는 무수한 의구심을 느꼈다.
라키엘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보조 심장. 처음 들어봐?”
“예. 물론…….”
“들어봐. 예로부터 발바닥은 제2의 심장이라고 했잖아?”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방금 들었으니까 괜찮아. 어쨌건, 제2의 심장인 발바닥을 극한으로 단련하는 거야.”
“…….”
“단련된 발바닥에 마나써클을 하나씩 장착하는 거고.”
“…….”
x발 지금 내 귓구멍이 무슨 개소리를 접수한 거지.
황태자의 말을 듣는 순간, 비장한 각오를 붙들고 있던 변경백은 비참한 심정으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시전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