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89화 (388/468)

389화. 발바닥을 찰싹찰싹 (1)

발바닥.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아래에 있는 기관. 체중을 떠받치며 보행을 돕고,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부위.

또한, 발바닥은 수많은 인류의 공통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신발로 발바닥을 보호하기에, 발바닥의 살갗이 야들야들 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짝만 간질여도 자지러지기 일쑤다. 뾰족한 것에 찔리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발바닥이야말로 인체의 혈액순환에 은근슬쩍 엄청난 기여를 하는 부위라는 사실을 말이다.

‘걸을 때마다 최소 수십 킬로그램의 체중을 떠받치거든. 뜀박질을 하면?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무게가 몇 배로 뛰는 거고.’

그 순간의 압력이 하지로 내려온 혈액을 밀어낸다. 집요한 중력의 힘을 이겨내고 말초와 정맥의 혈액을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하여 많이 걷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인간은 두 발로 직립을 하는 생물이기에,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서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혈액순환에 장애가 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지. 발바닥은 제2의 심장! 그대는 못 들어본 건가?”

“예. 한 번도.”

“…….”

“금시초문입니다.”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얼떨떨하고도 솔직한 심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발바닥에 마나써클을 장착할 거라니……. 그게 과연…….”

“과연?”

“해도 되는 일인지부터가 의문이 듭니다.”

“어째서?”

“어쨌건 마나써클이지 않겠습니까, 전하.”

“그렇지.”

“하지만 저희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써클을 지니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사실이다.

규정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어느 쪽으로 보아도 그렇다.

변경백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 아르민, 그 아이에게 들었다면 익히 아시겠지요. 3대 황제께서 본 가문에게 어떤 제약을 걸었는지를. 그 후로…… 본 가문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황도로 불려 가 어떤 신체적 금제를 부여받는지도 말입니다.”

“물론 알지.”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써클을 더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발바닥이니까.”

“예?”

“못 들었어? 발바닥이니까 가능하지.”

“…….”

변경백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자. 그럼 짚어보자고. 그대 가문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황도에 불려 가고, 써클 장착에 제약을 거는 특별한 시술을 받는다고 했지. 그런데 그 시술, 심장 주위에 받는 거라며?”

“그렇습니다.”

“그럼 발바닥은 아니니까 상관없고.”

“하, 하지만 3대 황제께서 가한 제약은…….”

“으음. ‘아스라한 가문의 모든 혈족은 심장 주위의 써클을 하나만 지니도록 한다.’ 이게 3대 황제가 반포한 칙령의 정확한 내용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되는 거지.”

“예?”

“심장 주위의 써클을 하나만 지니도록 한다, 라고 했잖아.”

“…….”

“발바닥은 언급 안 했네?”

“…….”

“그럼 되는 거네?”

“…….”

잠깐만요.

되는 건 알겠는데.

아니. 그래도 되는 거야, 진짜?

변경백은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위대한 선조, 절세의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께서 창안한 아스라한 심법. 그 영광의 결과물인 써클을…… 감히 발바닥에?

그는 가슴 한쪽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자성(?)의 외침을 실용성의 이름으로 애써 찍어눌렀다. 그렇다. 만약 황태자의 진단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심법이 가문의 사람들을 단명시키던 것이었다면?

찬밥이고 뭐고 가릴 때가 아니다. 설령 발바닥이 아니라 엉덩이에 써클을 달아준다고 해도 감지덕지가 아니겠는가.

“가능은…… 한 것입니까?”

“물론.”

변경백의 물음에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바닥에 써클을 장착하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예전에 비슷한 실험을 직접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에 다녀오기 전에, 뱀파이어 로드의 발기부전을 치료하던 때였지, 아마.’

로드의 고환에 발기용 미니 심장을 달아준다는 발상을 추진하던 무렵이었다. 수술을 준비하던 당시에 문득 새로운 호기심이 들었던가.

‘신체의 특정한 부위에 미니 심장을 이식하는 것처럼, 마나써클도 심장이 아닌 부위에 생성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지.’

순수한 호기심의 차원이었다.

하여 살짝 시도를 해보았다. 당시 시도한 부위는 손바닥이었다. 결과는 뜻밖에도 은근히 성공적이었다. 최종적인 생성에는 실패하긴 했지만, 써클이 거의 생성될 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떠올랐던 메시지.

[해당 부위의 기혈이 단련되어 있지 않아, 마나써클이 안착하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더랬다.

그 뜻은 하나다.

어디든 상관없이, 원하는 부위의 기혈이 충분히 단련이 된다면 마나써클이 생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심장 주위에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비효율적이지. 써클이 심장의 마나하트와 가까이 있어야 마나의 순환과 증폭이 빨라지니까.’

말 그대로 가까워야 효율이 좋아진다.

사람 사는 거랑 똑같다.

도보 5분 역세권.

초품아 아파트.

도로 건너 대형 마트.

이러한 입지의 아파트가 인기리에 비싸게 팔리는 것과 같은 이치!

‘제일 경제적인 거지. 그러니까 특수한 이유나 변태적인 취향이 없다면 다들 심장 주위에만 써클을 만드는 거고. 굳이 엉뚱한 곳에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스라한 가문 사람들의 상황은 다르다. ‘다른 곳’에 ‘굳이’ 써클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충분히 넘친다.

라키엘은 그때 내렸던 결론을 떠올리며 말했다.

“발바닥에 써클 생성? 가능해. 그래서 신체포기 각서를 쓰라고 한 거야. 이제부터 꽤 혹독한 단련이 필요할 거라서.”

“단련……이라시면?”

“일단 가문 식솔들의 명단을 넘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라키엘의 명은 즉각 이행되었다. 까칠했던 변경백은 의외로 신체포기 각서를 쓴 뒤부터는 이쪽의 지시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다. 기왕 믿고 따르는 거, 제대로 해보자, 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전 동안에 훈련을 위한 준비와 조 편성(?)이 완료되었다. 덕분에 오후부터 곧바로 훈련이 시작될 수 있었다.

“자, 우선 신발과 양말부터 벗는다. 실시!”

급조한 자갈로 도배된 연무장. 라키엘은 그곳 가득 도열한 가문 식솔들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훈련 1조’로 편성된 이들이 엉거주춤 명령에 따랐다.

“다 벗었으면 달려.”

모두가 뛰기 시작했다.

그 직후, 식솔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앗? 읏?”

“어읏, 읏읍!”

평소 곱게 모래가 깔렸던 연무장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울퉁불퉁한 돌멩이와 자갈 가득 험난한 오프로드의 역경뿐!

“으아읏, 바, 발바닥이!”

“엄마! 발 아파!”

“쉿, 황태자 전하께서 지켜보시잖아.”

“아이고오, 우읏, 읏!”

남녀노소 예외란 없었다. 대여섯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부터 애엄마, 쉰을 넘긴 장년의 변경백까지 모두가 맨발로 돌멩이를 즈려밟으며 뛰어야 했다.

발바닥? 당연히 아팠다. 모두는 깨달아야 했다. 아. 평소 튼튼한 구두와 부츠로 보호받던 내 발이 이렇게나 연약했구나, 라고.

그것은 검술로 일가를 이룬 변경백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건…… 생각보다 쉽지가 않군.’

변경백은 훈련 대열의 가장 앞줄에서 달리는 자신의 위치선정을 다행으로 여겼다. 제일 앞에 있기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가솔들에게 들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갈밭 조깅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에서 전기가 올라왔다. 의지와 무관하게 온몸이 배배 꼬이려 했다. 행여나 뒤에서 보면 꼴사나운 모습이지 않을까 절로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동시에 변경백은 깨달았다.

‘발이 자극을 받을 때마다 전신의 마나 흐름이 영향을 받고 있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건 정말로 단련이 되는 것이로군.’

솔직히 황태자의 의견에 따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발바닥을 단련해서 써클을 장착하자는 말이 미친놈의 헛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확인해보니 아닌 것 같다.

몸이 말해주고 있다.

황태자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뭔가가 이루어질 것도 같노라고.

“다들!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

나름의 확신을 얻은 변경백의 우렁찬 호령이 식솔들을 독려하였다.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자갈밭 조깅이 매일 이어졌다. 가문 식솔들의 발바닥이 무수히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만큼 단련이 되었다. 과연 검술의 명가로 이름난 가문의 식솔들다운 강인함과 적응력이었다.

……라지만.

“그동안 적응이 되면서 좀 편해졌지? 그런 이유로 오늘부터는 훈련이 조금 더 힘들어질 것이다.”

오늘도 역시나 밝아온 훈련의 아침.

순도 100% 존잘존예(?)들로만 구성된 아스라한 가문의 사람들을 향해, 라키엘은 새로워진 연무장을 소개했다.

“강화형 자갈밭. 일명, ‘지옥길’에 온 것을 환영한다.”

“…….”

모두의 시선이 황태자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기존의 연무장 한쪽, 그곳에 새로이 만들어진 일자형 트랙이 보였다.

길이는 약 100미터 남짓.

자갈이 깔려 있었다.

한데 자갈이 깔린 모양새가 기존의 원형 연무장과 사뭇 달랐다. 시멘트를 부어서 만들었다. 그리고 시멘트에 자갈을 아예 촘촘하게 ‘박아두었다.’

“원래 달리던 자갈밭은 그저 자갈이 깔려만 있기에 지압 효과가 약했을 것이다. 자갈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힘이 분산되었을 테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시멘트에 박혀서 튼튼하게 고정된 자갈이 여러분의 발바닥을 더욱 흔들림 없이 단련시켜 줄 것이다. 기쁘지?”

“…….”

“자아. 이렇듯 여러분만을 위한 전용 트랙을 만들기 위하여 닷새 내내 구슬땀을 흘린 특근대원들을 향해, 박수.”

“…….”

짝짝짝…….

조촐한 감사의 박수와 함께 훈련이 시작되었다. 다들 처음에는 긴장된 표정으로 새 트랙, 일명 ‘지옥길’에 첫걸음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이거,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데?’

솔직히 처음엔 겁을 먹었다.

시멘트를 부었다느니. 자갈을 박아서 고정을 했다느니. 저 위를 뛰면 이번엔 얼마나 더 아플까 싶었다.

한데 막상 살살 뛰어보니 아니었다.

‘살짝 아프긴 해. 하지만 처음 훈련을 받던 때만큼은 아니야. 난…… 강해졌어!’

닷새 동안 단련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가문의 식솔들은 소소한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끼며 지옥길 트랙 위를 사뿐사뿐 뛰었다. 라키엘의 호통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어어 그거 아닌데? 다들 스톱!”

“…….”

모두가 엉거주춤 멈추었다.

라키엘이 말했다.

“다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전하께서 알려주신 대로 조깅을 하던 중입니다.”

변경백이 대표로 대답했다.

라키엘이 콧등을 찡그렸다.

“에헤이. 아니지. 난 그냥 뛰라고 한 적 없는데?”

“예? 그럼 어떻게…….”

“자갈 위에서 앞구르기 하고.”

“…….”

“구르기 마친 직후에 전력으로 제자리 점프.”

“…….”

“물론 착지할 땐 발가락부터 딛는 요령 따윈 쓰지 말고. 발 중심으로. 배치기로 다이빙하듯이 발바닥 전체로 찰싹. 오케이?”

“…….”

“어때. 짜릿하겠지?”

“…….”

“싫어?”

“그, 그건…….”

“아 싫으면 반란 일으키시든가.”

팔랑팔랑!

라키엘이 안면 가득 티타늄 복합장갑 엠보싱을 철판처럼 내두르며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닷새 전에 변경백이 가문을 대표하여 서명한 ‘신체포기 각서’였다.

“…….”

하 진짜.

반란, 일으킬 수도 없고.

변방의 백사자라 불리는 용맹한 변경백은 자괴감 가득 울먹해지는 눈빛을 떨어뜨려야 했다.

미안, 내 예쁜 발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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