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발바닥을 찰싹찰싹 (2)
“……하나악-!”
아스라한 가문은 평화로웠다.
비록 원본 아스라한 심법을 잃은 아스라한 가문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대체로 평온하였다. 선대의 가주가 워낙 변방 정리를 잘 해둔 덕분이었다.
날뛰던 몬스터 무리는 토벌되어 잠잠해졌고, 공백지를 넘나들던 도적 등은 모조리 내쫓겼다. 국경을 마주한 왕국들과의 관계도 대체로 험악한 정도는 아니었다. 전형적으로 성공적인, 힘을 통한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스라한 가문의 식솔들은 대체로 평온하지 못하였다.
“두우울-!”
평온하던 아스라한 가문의 연무장에서 발바닥 피멍 뾱 터지는 비명이 날아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멘트에 박혀 단단히 고정된 자갈. 그 위에서 찰진 앞구르기 직후에 점프를 하곤 맨발바닥으로 착지를 감행한 까닭이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어린아이와 애엄마.
심지어 50세를 넘긴 가주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철푸억!
“……흽!”
착지를 할 때마다 가솔들의 안면근육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꿈틀거렸다. 그러나 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요령을 부릴 여유 또한 모조리 박탈당하였다.
“거기! 다섯 번째 줄! 갈색 머리!”
황태자의 찰진 외침이 고막을 후려쳤다. 지적을 받은 갈색머리의 청년이 온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뭘 잘했다고 여길 쳐다봐! 똑바로 안 뛰어!”
“……!”
청년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사실 나름 요령을 부려서 덜 높이 뛰던 청년이었다. 자갈 위로 착지를 할 때도 살짝 발가락부터 먼저 디뎠다. 아무래도 그러면 발바닥의 통증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귀신같이 알아보다니.
‘대체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함께 자갈밭 고문(?)을 당하는 가솔들의 머릿수만 해도 수십 단위에 달했다. 그중에 딱 하나. 티 안 나게 요령을 피우던 자신을 족집게처럼 짚어낸 황태자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괴물이란 말인가.
“뭘 멈칫대고 있나! 나랑 1대 1로 개인과외 받고 싶나!”
“아, 아닙니다! 세엣-!”
라키엘이 경혈 스캐닝으로 범위 내의 모든 인원들을 모조리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청년은 기겁하며 제대로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청년이 착지할 때마다 발바닥의 경혈을 지나는 마나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이 라키엘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래. 역시 저거지.’
라키엘은 흐뭇한 눈초리로 식솔들의 2단계 훈련을 관찰했다. 과연 생각했던 대로 훈련의 효과가 있었다.
‘앞선 1단계는 평범한 자갈밭 달리기를 통해 발바닥 전체의 근막을 풀어주는 준비운동이었지.’
그리고 이번 2단계는? 본격적인 혈맥 단련이었다. 바로, 인체에서 유일하게 발바닥에 자리한 경혈, 용천혈(湧泉穴)이었다.
발바닥 중심부의 가장 우묵한 곳에 자리한 용천혈은 매우 중요하다. 인체의 대맥 중 하나인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의 첫째가 되는 제1의 정혈(井穴)이다. 신체의 가장 아래에 위치하여 땅과 직접 맞닿는 유일한 경혈로서, 땅의 기운을 끌어오는 역할 또한 겸한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타이어, 식물로는 뿌리와 똑같은 거지.’
커다란 자동차도 알고 보면 지면과 닿는 부분은 타이어밖에 없다. 아름드리 거목도 오직 뿌리만이 땅에 속하여 있을 뿐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키가 150센티인 사람도, 2미터가 넘는 사람도 서 있을 때에 지면과 닿는 경혈은 용천혈이 유일하다. 심장과 가장 먼 거리에서, 인체의 뿌리이자 닻 역할을 하는 경혈이 바로 용천혈이었다.
또한, 라키엘이 아스라한 가문의 사람들에게 써클을 장착해주려는 부위가 바로 용천혈이기도 했다.
“슬슬 느려지지! 설렁설렁 뛰지 마! 그럴 거면 차라리 반란을 일으켜!”
팔랑팔랑!
극한의 용천혈 단련!
그 목표를 위해 라키엘은 변경백이 서명한 신체포기 각서를 흔들며 연무장을 누볐다. 물론 가솔 중의 누구 하나도 감히 라키엘의 훈련에 반발하지 못하였다.
단순히 라키엘이 황태자라서?
그런 이유도 있긴 했지만, 더욱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대열의 제일 앞에서 가장 열심히 훈련에 임하는 가주, 변경백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일흔다서엇-!”
변경백은 온몸으로 구슬땀을 흘리는 것도 모자라 아예 상의까지 벗어던진 채였다. 덕분에 앞구르기를 하며 등짝 가득 새겨진 자갈 자국 멍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발바닥 또한 마찬가지였다. 변경백은 누구보다도 높이 뛰었고, 어떤 이보다도 정직하게 발바닥 전체로 착지했다.
철크퍽!
변경백이 착지할 때마다 자갈이 부서질 듯이 발바닥을 때렸다. 그럼에도 그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물론 그라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황태자의 치료(?)법에 대한 강한 의문이 계속하여 맴돌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치료법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려면, 우선 이 치료를 끝까지 성실하게 받아봐야 한다. 그래야 어떤 방향으로든 선명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가 말이다.
“일흔여서엇!”
콰드득!
가문의 대표인 변경백이 이토록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에 임하니, 다른 가솔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가슴속에 불만과 의문이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감히 표출하지 못하였다. 덕분에 모두의 등짝과 발바닥에는 각종 무늬의 피멍이 아름답게 새겨졌다.
라키엘 또한 그들을 마냥 몰아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아, 여기 편히 앉아보시고.”
“저기, 전하?”
“으음?”
“이런 물음을 표하기에는 매우 송구하지만, 전하께서 지금 제 정수리에 얹으시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응 쑥뜸이야.”
“……예?”
“그냥 정수리 딱 대라고.”
“…….”
훈련이 끝난 후.
역시나 1번 타자(?)로 회복실에 입장한 변경백의 정수리에 쑥뜸이 알차게 촵 올려졌다. 변경백은 정수리에 가해지는 뜻밖의 열감에 놀라며 다시금 의문을 표하였다.
“뜨, 뜨흣? 그런데, 전하?”
“으음?”
“저는 전하의 지도에 따라 발바닥을 혹독하게 단련하였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 쑥뜸…… 이라는 치료약을 발바닥이 아닌 정수리에 올리는 것이십니까?”
“이래야 발바닥이 더 효과적으로 회복될 테니까?”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그대가 단련한 곳은 신체의 가장 아래에 있는 용천. 그 과정에서 열심히 밭을 갈았으니, 이제는 하늘과 맞닿은 백회(百會)를 통해 보완이 되는 기운을 받아들여야겠지. 그것이 균형과 조화라는 것이고.”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알겠다.
치료를 하는 황태자의 모습이 뜻밖에도 매우 능숙하다는 사실이었다.
“…….”
마치 수만 번의 검을 똑같은 경로로 휘두른 검사 같았다. 정수리에 쑥뜸을 올리는 손길도. 어깻죽지와 등에 괴상한 가시를 꽂아 넣는 동작들도. 하나같이 모두. 무수한 경험을 통해 숙련된 달인의 손맛이 느껴졌다.
특히 황태자가 발바닥과 그 주변을 주물러 줄 때가 더욱 그러하였다.
“어, 어엇? 전하?”
“왜 그래?”
“아니, 그게…….”
변경백은 깜짝 놀란 심정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말했다.
“지금 제 발은 무척 더럽습니다, 전하.”
“어. 나도 알아.”
“예?”
“발이 더러운 게 어때서?”
“…….”
“지금 그대는 나한테 환자잖아.”
“그렇기는 한데…….”
“환자는 더러운 거 없어.”
“…….”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엉망진창, 피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발바닥을 닦아주고 부드럽게 마사지하는 황태자의 모습이란.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란. 감히 대꾸할 말을 잃어버린 변경백은 차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치료를 받았다.
그런 사정은 나머지 식솔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으어엇! 전하아?”
“에헤이 쓰읍. 움직이지 마.”
“그, 그렇지만 제 발바닥은 좀…….”
“무좀은 없지?”
“예?”
“없으면 됐어. 1분 마사지니까 잠깐만 참아.”
“…….”
훈련을 받던 동안에는 무럭무럭 자라났던 황태자에 대한 원망과 의문이, 1분 발바닥 마사지를 받으면서 극적으로 누그러졌다.
하지만 백회혈에 뜸을 받을 때는 또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하?”
“아 또 왜.”
“저기, 벌써 며칠째 하루도 빠짐없이 제 정수리에 뜸을 올리시니까 말입니다. 이틀 전쯤부터 제 정수리에…….”
“정수리에?”
“땜빵이 생긴 거 같아요.”
“…….”
“이거, 괜찮은 걸까요?”
“응 괜찮아. 방법이 있어.”
어느 식솔의 진지한 고민을 접수한 라키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나머지는 풍성하잖아? 가려.”
“…….”
“아니면 치료 거부하고 남들보다 일찍 죽든가.”
“……!”
적당히 자잘한 민원(?)은 대강대강 달래(?)주면서 훈련과 치료를 강행하는 라키엘!
그렇게 보름의 시간이 더 지나갔다.
혹독한 훈련과 적절한 치료.
그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흡! 흐읍! 훕!”
쿵! 쿠쿵! 쿠웅!
이제 어느 누구도 2단계 훈련에서 괴로워하지 않았다. 앞구르기는 더없이 재빨라졌고, 서전트 점프는 한없이 높아졌으며, 착지 또한 자갈을 부스러뜨릴 듯이 파워풀해졌다.
‘됐어.’
이만하면 충분히 단련이 되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에 족하다.
“하여, 오늘부터는 모두가 3단계의 훈련에 임하게 될 것이다.”
라키엘의 엄숙한 목소리가 모두의 고막을 두드렸다. 덕분에 변경백을 포함한 식솔들은 내심 긴장하였다.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갈 때에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가. 한데 오늘부터 3단계라니.
‘으읏, 마음의 준비가……!’
다들 쿵더덕쿵덕 덩더기쿵덕거리는 심장을 남몰래 부여잡던 무렵이었다. 라키엘이 씨익 웃으며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톡.
그것은 쌀알이었다.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서 안구에 마나라도 불어넣어야 멀리서 겨우 보일 법한, 전형적이고도 평범한 쌀알 하나.
“…….”
저것과 3단계 훈련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모두가 의문을 느끼던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그동안 단련한 발바닥의 경혈로 이 쌀알을 들어올려야 할 것이야.”
라키엘이 말했다.
식솔들의 귓구멍이 움찔했다.
“다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도 생각하겠지. 그저 쌀알을 지그시 밟았던 발을 들어 올리면, 발바닥에 쌀알이 붙어서 딸려 올라올 거라고도 여기겠지.”
“…….”
물론 그러했다.
라키엘의 입가에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물론 아니다. 고작 그런 걸 위해서 그대들이 혹독한 단련을 거쳐야 했을까? 절대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변경백이 대표로 나서며 물었다.
라키엘이 대답했다.
“쌀알 위로 10센티 띄운 발로 흡입력을 발휘하라는 뜻이야.”
“예?”
“오직 경혈의 흡입력으로 쌀알을 들어 올리라는 거지.”
“예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게…….”
“쯧. 시범이라도 보여줘야겠네.”
“…….”
그게 가능은 한 겁니까.
변경백과 가솔들은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들이 아무리 혹독한 발바닥 단련을 했다지만, 그런 일이 될 거라는 일말의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라키엘이 직접 시범을 보이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야. 이렇게.”
직접 신발을 벗은 라키엘이 맨발을 들어 올렸다. 아까 던진 쌀알 위 10센티. 발바닥을 적당한 간격으로 띄워 두고서 콧잔등을 한 번 찡그렸다.
“흡!”
……찰싹!
바닥에 놓였던 쌀알이 거짓말처럼 들어올려지더니 라키엘의 발바닥에 찰지게 달라붙었다.
모두를 향한 라키엘의 빵긋한 미소는 덤이었다.
“어때? 참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