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발바닥을 찰싹찰싹 (3)
“설마 전하께서 그걸 한 번에 성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 동감이야.”
어느새 밤이 깊었다.
데미안과 함께 걷던 라키엘은 어둠에 휩싸인 연무장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아까, 아침의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사실은 나도 한 큐에 될 줄은 몰랐지.”
정말로 그랬다.
발바닥으로 10센티 떨어진 곳의 쌀알을 흡입해서 찰싹 붙이기. 서커스에서도 나오기 힘들 진기명기이자, 생전 고인의 개쩌는 영상을 보시겠다며 장례식장에서 틀어줘도 기립박수를 받을 만한 업적(?)이었다.
한데 그걸 한 번에 해냈다.
스스로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솔직히 몇 분은 계속 시도해야 할 거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뭐 3초도 안 지나서 찰싹, 붙여 버리니까 다들 표정이 참.”
“볼만했지요.”
“어. 그랬지.”
정말로 그랬다.
변경백은 물론이고, 상황을 지켜본 가솔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두 배는 커진 듯했다. 한편으로는 이쪽을 향한 의구심의 시선이 와르르 쏟아지기도 했다. 황태자 당신이 어떻게? 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그간 밤마다 남몰래 했던 단련이 헛되지는 않으셨군요.”
“당연히 헛되지 말아야지.”
콧김이 절로 푸슝.
그동안의 고되었던 비밀 훈련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솔직히 나도 하긴 싫었거든. 밤마다 꿀잠 줄여가면서 자갈밭에서 조깅하고, 앞구르기에 점프까지 해가면서 발바닥을 셀프 학대하는 걸 누가 좋아할까.”
하기 싫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변경백을 포함한 수많은 가솔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떠밀면서 자신만 쏙 빠져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저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확신이 드시는 겁니까?”
“이론적 확신?”
“예. 전하께서 전에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충분히 단련이 된 혈맥에는 써클의 장착이 가능할 것이다, 라는 가설 말이지요.”
“아. 물론.”
매우 확실해졌다. 가능하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자신이 직접 밤마다 남몰래 구르며 변경백 가문의 사람들과 똑같이 혈맥을 단련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그래도 사실은 조금 불안했어.”
“어떤 점이 말입니까?”
“혹시나 내가 틀린 거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 새로운 이론이었다. 한데 그걸 변경백과 가솔들에게 밀어붙였다.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과 별개로, 막연한 불안감이 매 순간 치밀었다. 하여 스스로를 선행 실험의 재료로 삼았다. 증명과 확인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밤마다 구슬땀을 흘렸고. 발바닥은 만신창이가 됐고. 그럼에도 덕분에 결론은 뭐.”
“바닥에 떨어진 잡동사니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어지신 겁니까.”
“응. 부럽지?”
“아뇨.”
“뭐? 왜?”
“발바닥에 붙인 물건을 떼려면 결국 손을 써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어, 그건…….”
라키엘의 말문이 일순간 막혔다. 데미안 특유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일순간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그토록 쓸데없는 일을 굳이 하여 주셔서. 오직 저의 치료를 위해, 그렇듯 밤마다 주저 없이 구슬땀을 흘려 주셔서. 그럼에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주군이셔서. 그걸 당연한 듯이 여기는 분이셔서. 저는 언제나 당신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하며, 존경하는 마음뿐입니다.
……라는 마음을 담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데 중얼거림이 살짝 컸던 걸까.
“……응?”
라키엘의 귀가 일순간 쫑긋거렸다. 이내 그가 살짝 찡그려진 눈길로 데미안을 째릿 쳐다보았다.
“방금 뭐랬냐?”
“예?”
“방금 감사하고 어쩌고 하는 엄청 이상한 소리 안 했냐?”
“안 했습니다.”
“아닌데. 들었는데.”
“잘못 들으신 겁니다.”
“그럼 뭐라고 말한 건데?”
“참 간사하다고 했습니다.”
“뭐? 간사? 설마 내가?”
“예.”
“어째서?”
“변경백 가문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니까 절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허 참. 이 인간 보게. 그래서 내가 간사?”
“예.”
“너 지금, 황족 능멸죄를 저지르는 거라는 자각은 있는 거지?”
“혹시 사형시키려는 겁니까?”
“내 말 한마디면 충분히 가능할걸?”
“예. 두렵군요.”
“두려운 줄 알면 좀 자제하시지 그랬어요.”
“아뇨. 제가 사형당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럼?”
“제가 죽으면. 흠. 그게 깨어날 텐데 말입니다.”
“…….”
“그럼 세상이 그냥 아주.”
“…….”
“참고로 협박은 아닙니다. 흠흠.”
“그게 더 협박 같다 야.”
“그렇게 들렸습니까?”
“어. 충분히.”
“황족 능멸죄에 협박죄까지. 제 목에 걸릴 죄명이 점점 화려해지는군요.”
“더 추가하고 싶으면 계속해보시든가.”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안 하겠다고는 죽어도 안 하지 아주.”
“죄송합니다.”
“자꾸 말로만.”
“진심입니다.”
그리고 정말입니다.
당신을 향한 제 감사한 마음도. 죄송한 마음도. 전부 그렇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굳이 솔직한 마음을 밝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느꼈다. 때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때가 있으니까. 지금이 그런 때인 듯하니까. 황태자도 이쪽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을 이미 느낀 것 같으니까.
그러니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기로 한다. 그것으로 다만 좋겠다. 데미안은 홀가분하게 웃었고, 라키엘은 피식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야. 늦었다. 피곤해. 얼른 들어가자.”
“예, 전하.”
어느새 밤이 더 깊었다.
한낮의 단체 훈련, 그리고 오후와 저녁까지 이어진 훈련 후의 치료. 분주했던 일정을 마친 두 남자는 숙소를 향한 퇴근길(?)을 서둘렀다.
♣
다시 아침이 밝았다.
3단계 훈련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전날 라키엘의 쌀알 흡입 묘기(?)를 직관한 변경백 가문 식솔들의 표정이 제법 달라져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해낸 황태자. 그걸 보니 자신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슬며시 샘솟은 덕분이었다.
‘황태자는 우리처럼 개고생을 하지도 않았는데 저걸 성공했잖아?’
‘우리는 무려 자갈밭을 굴렀다고!’
‘점프도 하고! 발바닥에 피멍도 들고!’
‘심지어 쑥뜸 때문에 정수리 땜빵도 생기고!’
한데 그런 혹독한 고생을 하지 않은 황태자의 발바닥이 더 단련이 되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억울했다. 자신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의 가슴속에 활활 타올랐다.
물론 가솔들은 몰랐다.
사실은 라키엘이 자신들보다 더욱 혹독하게, 매일, 남몰래 훈련을 했다는 진실을.
“다들 집중해! 용천혈을 느껴!”
콕!
라키엘은 식솔들 사이를 오가며 쌀알 흡입 훈련을 지도했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용천혈의 감을 찾지 못해서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들 자갈밭을 구른 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춉!
“서, 성공했다!”
“가주님이 해내셨어!”
3단계 훈련이 시작되고 닷새째.
어느 자그마한 쌀알 한 톨이 변경백의 발바닥에 수줍게 춉 달라붙은 것을 신호탄으로 삼아, 용천혈을 제대로 쓰는 자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한결 쉬웠다.
쌀알 다음엔 완두콩.
완두콩 다음은 동전.
동전 다음은…….
“차근차근 가자는 의미로 각자 자기 자신의 체중을 들어 올리는 걸로 하지.”
“…….”
그건 차근차근이 아니잖아요!
라키엘의 훈련 계획을 들은 가솔들은 속으로 빼액 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겐 아무런 발언권도, 훈련을 거부할 권력도 없었다.
“싫으면 반란 일으키라니까?”
“…….”
“불만 없지? 그럼 새로운 훈련 목표를 잘 듣도록. 방금 말했듯이 각자 본인의 체중을 용천혈의 흡입력으로 들어 올리며 버티는 거다. 저곳에서 말이다.”
라키엘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복도 천장이었다.
“맨발로 복도 천장에 찰싹, 달라붙은 채 매달려서 10분 버티기.”
“…….”
“당연한 거지만 손이나 다른 부위는 절대로 천장에 닿거나 해선 안 돼. 오직 발바닥 용천혈의 흡입력으로만. 오케이?”
“…….”
“자, 알아들었으면 다들 실시.”
……까라면 까야지, 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변경백과 식솔들이었다. 그들은 새삼스럽지도 않게 쑴펑쑴펑 솟구치는 회의감을 만끽하며 천장에 매달렸다.
그리고 무수히 실패했다.
“으엇?”
“아앗!”
쿵! 쿠당!
누군가는 10초쯤 버티다가, 또 다른 누군가는 1분쯤 버티나 싶다가 똑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발바닥이 달라지고 있다고. 확실하게 단련이 되고 있노라고.
전보다 질겨지고 강인해진 것은 물론이었다. 요즘은 흡입력을 발휘하는 매 순간 신기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바로, 용천혈이 있는 자리에서 마나의 회전이 일어나곤 한다는 느낌이었다.
한데 그 느낌이 사뭇 익숙했다.
‘이거, 마나써클이 회전할 때와 느낌이 비슷해.’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정말로 써클과 유사했다.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 가슴속에 슬며시 피어났다. 어쩌면, 새로운 써클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희망이었다.
‘할 수 있어! 황태자 전하가 이끌어 주고 계시니까!’
‘더블 써클, 트리플 써클…… 나도 가질 수 있어!’
황태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가 이끌어 주는 대로 따라가면.
어쩌면, 정말로, 마침내, 해낼 수 있으리라. 오랜 세월 가문의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모든 조상들이 염원했던, 그러나 불합리한 제한에 가로막혀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숙원을 내가 이루어낼 수도 있으리라!
희망이 모두를 이끌었다.
포기를 마음에서 지웠다.
시도하고, 도전하고, 또 시도했다. 희망의 빛줄기가 성과를 이끌었다. 모두의 기록이 놀라울 정도로 쑥쑥 갱신되었다.
1분, 2분, 3분, 5분, 7분.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복도 한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라키엘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처음으로 마의 10분을 통과한 첫 3단계 통과자가 나왔다. 한데 통과자의 모습이 조금 의외였다. 예상했던 변경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앳된 소년. 낯익은 얼굴. 바로…….
“아르민?”
전에 자신에게 제법 시달렸던 소년. 그 변경백의 손자 녀석이 주변의 환호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 녀석이 첫 통과자가 될 줄은 몰랐는데. 라키엘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역시나.
맑은 소리가 울렸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자다 깨서 들어도 반갑고, 뺨 맞을 때 감상해도 반가운 맑고 고운 소리가 온 세상, 아니, 귓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벌써 보너스 수명 알림이 뜨다니.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좋은데?’
3단계 통과와 동시에 완치라.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라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알림음에 뒤이은 메시지가 눈앞을 야물딱지게 채웠다. 그런데 그 내용은, 예상했던 바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지옥왕 : 하비엘 아스라한이 당신의 치료법과 성과에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