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94화 (393/468)

394화. 맞춤형 심법 (3)

“멀티 마나하트. 약속대로 받아내야지.”

그러하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특히, ‘즉각’ 지켜져야 한다.

세상 모든 약속이라는 것에는 참으로 얄궂은 측면이 있다. 천천히 해주겠다고. 여유 좀 두자고. 시기를 좀 보자고.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기타 등등, 등등. 이라는 식으로 약속의 이행이 미루어지면?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약속이 깨진다.

‘사람 마음은 갈대밭에서 펄럭거리는 랜덤 박스 같은 거거든.’

언제 바뀔지 모른다. 특히나 상황이 다급할 때와, 그게 해결된 이후가 확확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 변경백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이고 사람인 이상 예외는 없으리라. 그러니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바로 약속 이행의 시동을 걸어야 한다.

그러한 일념으로 라키엘은 호다닥 걸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통장 주인보다 더 빠르게 월급 스틸을 감행하는 카드사와 같은 신속한 스피드로 변경백의 개인 연무장을 침공!

“……엇?”

마침 변경백은 모랫바닥에 엎어져 있던 참이었다. 패대기쳐진 개구리 같은 자세. 머리칼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지도 못한 행색. 딱 봐도 뻔했다. 방금 처음으로 용천혈 써클의 맞춤형 마나 운용법에 성공한 자의 모습이었다.

“이런 아침부터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겠나. 뻔하지 않겠어?”

“설마.”

“으음.”

“제 성과를 벌써 알아차리신 겁니까?”

“때마침 근처를 지나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라고. 퍼펑, 하고 말이지. 덕분에 눈치챌 수 있었지. 그대가 마침내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저승의 문턱도 넘을 뻔했지요.”

“위험했나?”

“조금은 그랬습니다.”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특유의 미중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찌 조절할 틈도 없이 온몸이 위로 솟구치더군요.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당황스러웠지요. 똑같은 과정을 겪은 가솔들의 경우를 떠올리며 나름 대비를 했는데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만큼 말입니다.”

“그리고 철푸덕?”

“송구합니다.”

“괜찮아. 처음엔 다들 그러더라고. 이후의 적응이 중요한 거지.”

“예. 가솔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정진해야겠습니다.”

변경백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심법을 쓸 때마다 그 출력을 감당하질 못하여 개구리처럼 형편없이 나동그라지는 가주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리라. 지금보다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기쁘군요.”

“그래? 혹시 심장의 변화는 느껴지고?”

“예, 전하.”

변경백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 두드렸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도 오랜만입니다. 항상 가슴에 벽돌이 얹힌 느낌을 받아 왔는데, 방금 발바닥의 써클이 발동된 이후로 답답한 기운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겠지. 심장의 부담이 확 줄었을 테니까.”

“예.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여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약속?”

“역시. 그때 했던 약속의 이행을 원하시는 것이로군요.”

“그대의 대답은?”

“당연히 지켜져야 할 약속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어서 기쁘군.”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

변경백이 훈훈하게 웃었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물었다.

“당시에 전하와 맺었던 약속대로 데미안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를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여, 더 원하는 것이 있으신지도 여쭙고 싶습니다.”

“음? 더 원하는 거?”

“예, 전하.”

“없는데.”

“예?”

변경백의 눈이 끔벅끔벅.

라키엘이 고개를 갸웃갸웃.

“나는 그대 가문 사람들의 심장 질환을 고쳐주고. 그걸 성공하면 그대는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해주고. 그게 우리의 약속이었잖아?”

“그랬습니다, 전하.”

“그랬지. 해서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러 온 거고.”

“또한 그렇습니다, 전하.”

“그렇지. 그런데 거기서 내가 더 원할 게 있겠어?”

“더…… 원하는 것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

라키엘은 의아한 눈초리로 변경백을 보았다.

서로 맺었던 약속이다.

하니 약속만 지켜지면 될 일이다. 거기서 뭘 더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겐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한데…… 변경백은 조금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으음? 내가 뭘 빠뜨렸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지켜줘야 할 뭔가를 안 했나 싶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없었다. 할 건 다 했다. 지킬 것도 다 지켰다. 그러니 뭔가를 빠뜨린 것은 아닐 테고.

‘그럼 뭐지?’

그는 몰랐다.

더 요구할 것이 없다는 자신의 대답.

그게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자신의 태도.

그러한 대꾸와 반응이 변경백의 2심방 2심실에 감동의 투심 패스트볼로 꽂혔다는 사실을 말이다.

“…….”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묘한 눈길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랜만에 느끼는 종류의 감동에 직격타를 맞은 상태였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단다. 약속만 딱 이행되는 것. 자신이 가문의 사람들을 지켜주었으니, 애초에 약속했던대로 멀티 마나하트만 받는 것. 그 이상의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 것. 그게 당연한 게 아니냐며 반문을 하고 있다.

무려 황태자가.

황제를 제외한 최고의 황족이.

이쪽 가문의 100명이 넘는 직계 혈족의 심장을 고쳐주고, 생명을 건져주었음에도, 처음 맺었던 약속 이상의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변경백에게는 너무나 뜻밖의 반응이었다.

‘내가 지켜온 이 나라에도…… 이런 황족이 존재했단 말인가.’

황족.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들.

변경백에게 황족이란 군림하는 자들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호화로운 황도에서, 척박한 변경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혈통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존경심?

사무치는 충성심?

그런 감정 따위, 애초에 품어본 적이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족이 싫었다. 딱히 좋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가문의 선대에게 씻지 못할 치욕을 안겼으니까. 오직 빼앗아가기만 하는 자들이었으니까. 미웠다. 아스라한 가문의 핏줄을 지닌 이들이라면 모두가 응당 품었을 감정만큼. 딱 그만큼.

그럼에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가문의 시조이자 가장 존경스러운 조상, 하비엘 아스라한이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 프론테라와 마젠타노의 후손에게 가장 믿음직한 친우가 되어줄 것.

평생을 충성과 미덕 속에 살았던 남자. 모든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기사. 찬란한 별자리와도 같았던 조상이 남긴 한마디의 유훈은 가문의 나침반이었고, 외길이었으며, 유일한 사명이었다.

그래서였다.

변경백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그러한 뜻을 자신의 대에서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황족에 대한 반감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가문 전체의 뜻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고. 스스로를 단속하고, 자제시키는 매일을 보내야 하였다. 그것이 그의 평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전하.”

당신은 어찌하여 다르십니까. 다른 황족이라면, 3대 황제와 같은 핏줄이라면 응당 요구할 더 많은 것을 어째서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물음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정녕코, 그것이면 족하신 것이십니까?”

“당연하지. 자꾸 왜?”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금 그대 혹시, 나 간보는 거야?”

“예?”

“쓰읍. 이참에 뭔가 팍팍 퍼주듯이 바치면서 점수 따려고?”

“예에? 아니, 그건…….”

“아 그럼 별궁 한의원에 투자 좀 해주시든가.”

“……예?”

“이 경우엔 투자보다는 후원이 명목상 더 그럴듯하겠네. 안 그래도 별궁 한의원이 공익적인 일을 좀 많이 하거든. 맞잖아? 백성들을 신분의 구별 없이 무료로 진료하고 있으니까. 사실 그래서 항상 운영이 제법 빠듯하긴 해.”

“…….”

“어때? 투자금 좀 내면 한의원 로비에 현수막도 따악 걸릴 거고. 이야. 그거 폼 좀 나겠네.”

“…….”

“농담이야. 표정 싹 굳기는. 나 정말로 더 바라는 거 없어. 그저 그대가 데미안에게 멀티 마나하트 하나만 전수해 주면 돼.”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당신이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이 없던 평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당신을 존경스러운 황족으로 모시게 될 것 같습니다. 하여 또한, 처음입니다, 이런 감정은. 황족을 존경하는 것이 보람으로 느껴지는 이런 기분 또한, 실로 처음이옵니다.

변방을 지키며.

국경을 수호하며.

평생을 바치고 땀 흘리며.

그 어느 순간에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였던 변경백이었다. 그에게 국경을 지키는 일은 그저 일일 뿐이었다. 선대의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일. 가문의 시조가 신신당부하였던 일.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해야 할 일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영광 또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지 해야 하는 일, 그 외의 이유가 없는 일에서 영광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일 테니까.

물론 그런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껴본 적도 딱히 없었다. 그냥 다들 할 일을 하면서 그렇게 사는구나 싶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살다가 가는 삶.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그렇듯 그의 인생은 회색이었고, 잿빛이었으며, 무채색의 기계적 충만함으로 채워진 나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게 된 것 같다.

조금은…… 달라지게 된 것 같다.

‘내가 지키는 국경 속에 이런 황족이…….’

있었다.

존경을 바칠 만한 사람.

존경을 넘어 충성을 바칠 존재.

더 나아가 그 충성이 부끄럽지 않을 대상.

이런 분이 속한 국경을 지키는 일은 이제 조금은, 뿌듯하지 않을까. 그 일에서 보람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감히, 삶의 의미가 충만하노라 여길 수 있지 않을까.

“하면 오늘부터 바로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그래주면 고맙고.”

“예, 전하. 아울러-”

“아울러?”

반문하는 황태자 전하.

그동안 무의미하게 낭비된다 여기었던 나의 충성과 헌신을 기쁘게 바칠 만한 분. 변경백은 한결 훈훈해진 눈빛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새로이 품게 된 충성심을 묘한 방향으로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부터 제가 카이엔 경에게 멀티 마나하트를 전수하기 위해 다소 혹독해질지도 모르겠사오니, 미리 전하께 충분한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혹독? 양해?”

“예, 전하.”

변경백은 문득, 자신을 포함한 가솔들이 황태자의 지옥 훈련에 발바닥 폭격을 당했던 나날을 떠올렸다. 그래. 존경은 존경이고. 훈련은 훈련이고. 하니 이제는 발바닥에 굳은살처럼 켜켜이 쌓인 고통의 빚을 황태자의 호위에게 조금은 갚아도(?) 되지 않을까.

데미안 카이엔 경은 황태자의 호위니까. 그가 강해질수록 존경스러운 황태자가 안전해질 터이니까. 따지고 보면 이 또한 황태자를 위한 길이자 보답인 것이다.

……파직!

데미안을 향한 변경백의 눈빛에 묘한 충성심으로 포장된 복수의 스파크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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