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짓눌리고 쓰러져도 (2)
[급격히 성장하는 아스라한 심법이, 용왕 베르키스에 의하여 죽음과 부활을 겪으며 재구성된 당신의 신체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
무슨 의미일까, 저 활자는.
내 눈앞을 가득 채운 저 의미는 무엇을 알리려 함일까. 흐릿해진 의식을 깨우려는 것일까. 감기던 눈꺼풀을 끝끝내 밀어 올리려 함일까. 모르겠다. 다만 귀찮다. 성가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한소끔 흘러나온다. 부질없이. 어쩔 수가 없게도.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는데.’
라키엘은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며 시선을 들었다. 흐릿해진 눈길. 초점 스러져 휴식에의 갈구만이 남은 눈동자. 본능의 끈덕진 유혹을 뿌리쳤다. 쓰러져 쉬고픈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눈빛을 바로잡았다.
비로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의 내용이 제대로 보였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쿼드 써클 Lv.1]
‘어?’
노곤함이 싹 가셨다. 적어도 그런 기분이었다. 쿼드 써클이라니. 내가?
‘전에는 더블 써클…… 7에서 8 사이 레벨이었는데.’
그런데 십수 단계나 훌쩍 뛰었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저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대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버티던 사이에. 저도 모르게. 선물처럼. 혹은 밤사이 고개를 내민 새싹처럼. 생각지 못했던 희망을 담듯이. 그렇게.
[아스라한 심법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더블 -> 쿼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의 두 줄기 써클과 용천혈의 두 줄기 써클 사이에서 가공/증폭하여 운용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
거짓말이 아니다.
착각 또한 아니다.
그런데 새롭게 생성된 두 갈래의 써클이 위치한 자리가 조금 뜻밖이었다.
‘용천혈? 거기에 써클이 하나씩 생긴 거라고?’
스스로를 향해 되묻던 순간이었다.
……키이이이잉!
가슴에 자리하고 있던 두 갈래의 써클이 지친 눈을 떴다. 그동안의 혹사에 시달린 짐승의 포효. 그러나 아직은 쓰러지지 않았노라 외치는 울부짖음.
그러자 저 아래쪽, 양쪽 발아래의 용천혈에서 화답 같은 번득임이 피어났다.
키아아악-!
“……!”
양쪽의 용천혈에서 각각 한 갈래씩. 두 줄기의 새로운 써클이 짐승처럼 응답했다. 심장과 발아래. 그 사이를 잇는 고밀도의 마나 네트워크가 급속도로 생성되었다.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맞잡았다. 마주 보고. 응답하여. 반응하고. 공명했다.
콰가가가가각-!
‘……흡?’
이전에는 느낀 적 없는 폭발적인 마나의 압력이 전신을 질주했다. 아찔했다. 혈맥이 터질 것 같았다. 혈관 속을 적토마 수백 마리가 내달리는 듯한 감각. 이대로는 터질 것 같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렵지는 않은. 하여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는, 그런 기분.
그러한 느낌 또한 착각이 아니었다.
[마나 증폭률 : 1,200%]
“…….”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눈앞에 떠올랐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는 사이, 뒤이은 메시지가 계속해서 인지와 인식을 유린하듯 연달은 정보를 선사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써클 슬롯 / ② 격침불가 / ③ HP 변환 / ④ 포식자의 본능]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8,000]
[현재 보유 중인 HP : 26,700]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에 따라, 당신이 보유한 써클 슬롯도 함께 영향을 받았습니다.]
[다만, 새로운 써클이 가슴에 생성된 것이 아니므로 써클 슬롯의 추가 개방은 없습니다.]
[대신 써클의 높아진 증폭 효율에 호응하여, 기존의 개방되어 있던 써클 슬롯의 용량이 대폭 증가합니다.]
[1번 슬롯의 최대 용량이 증가하였습니다 : 50 리터]
[2번 슬롯의 최대 용량이 증가하였습니다 : 50 리터]
‘나는…….’
정말로 이걸 다 얻은 것일까.
라키엘은 반쯤은 의아함에, 남은 절반은 기대감에 기대듯 고개를 들었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여전한 차폐 갑옷의 무게. 납덩이가 선사하는 중압감. 빠져나가지 못한 갑옷 속 열기. 그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금 얻은 용천혈의 두 써클을 향해 감각을 집중하였다.
키아아아악-!
탄생의 포효를 알리듯 더욱 세차게 울부짖는 용천혈의 두 써클. 그에 호응하듯 가슴의 두 갈래 써클도 함께 울부짖었다. 가슴이 뛰었다. 뛰는 만큼 미증유의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세포 하나하나가 두 번째 탄생을 알려오듯 눈을 떴다.
“……흡!”
들이마신 호흡을 가둔다. 내게 힘을 달라고 부탁하듯 붙든다. 복부가 긴장하고. 전신의 근육이 응축하고. 마침내 시험 삼듯 가볍게 땅을 박차는 두 다리.
이내 맞이하는 해방감.
투확-!
날았다. 아니, 쏘아졌다. 일순간 세상의 풍경이 면에서 선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만큼 기대 이상의 돌진이었다.
“읏!”
다소 놀라며 재빨리 균형을 잡았다. 신체가 놀랍도록 빠르게 반응했다. 스스로의 인지를 뛰어넘은 신경의 반사 속도. 스스로 밸런스를 파악하고, 근육의 미세 조정을 마치며, 관절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착지까지.
카가가각! 후우웅…….
“…….”
순간 이동에 가까운 10미터의 고속 돌진. 뒤이은 날카로운 착지까지. 자신이 일으킨 맹렬한 흙먼지를 등으로 받아내며 라키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믿기지가 않았다.
원래는 용천혈에 써클을 개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아스라한 가문의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단련까지만 해두었던 그였다.
당시로써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효율 때문이었다.
기왕 새로운 써클을 개방하려면 기존의 것들이 모여 있는 가슴에 함께. 그래야 증폭의 시너지가 더욱 크게 날 테니까.
그것이 상식이었다. 정석이었다. 지금껏 누구도 그 길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아스라한 가문 사람들의 용천혈에 써클을 장착시켜 주면서도 내심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여기기도 하였다. 어쩔 수 없이 효율이 떨어지는 편법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고. 다만 이것으로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 주면 좋겠노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효율이 떨어지는 방법이라고만 여기었는데.
‘……아니었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가슴에만 여러 개의 써클이 모이면…… 당연히 증폭률은 좋아. 증폭 속도도 빨라. 써클 사이의 간격이 가까우니까. 그런데 막상 용천혈에 써클을 장착하고 보니까, 조금 달라.’
생각지도 못한 장점이 느껴졌다.
신체의 활성도가 달라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슴과 용천혈. 두 곳에 생성된 써클 사이를 잇는 마나의 새로운 경로가 생겼어. 그것도 엄청나게 탄탄하고 곧게 뻗은. 거의 고속도로 같은…….’
그 마나의 네트워크가 주위의 모든 신경과 혈맥을 일깨우고 있었다. 근육과 관절, 세포의 소기관 하나하나가 낱낱이 깨어나며 차원이 다른 활성화를 선보였다. 덕분에 신경과 근육의 협응력, 내구도, 생리적 회복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 느껴졌다.
“……미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차폐 갑옷이 이전처럼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무거운 것은 맞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랄까. 이제는, 조금은, 내가 짐이 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전하?”
이쪽의 갑작스러운 고속 이동에 놀란 걸까. 황급히 다가온 데미안이 이쪽을 불렀다. 곧이어 변경백과 나머지 일행도 차폐 갑옷을 철컥거리며 뛰어왔다.
“설마…… 전하께서도, 두 발의 써클을 깨우치신 것입니까?”
“으음. 아마도.”
변경백의 물음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투구에 가려진 변경백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신으로 놀란 기색을 보여주었다.
“그럼 방금 선보이신 그 이동 방식도…….”
“그대도 연습하면 가능해지겠지.”
그때부터였다.
추격대의 이동 속도가 달라졌다. 이쪽의 걸음이 가벼워진 덕분이었다. 물론 그 사실에 남모를 쓴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역시. 다들 내 걸음에 맞춰서 움직여 주고 있던 거였네.’
그동안 이쪽이 너무 허우적거려서. 비틀거려서. 힘겨워하여서. 추격대의 모두가 이쪽을 걱정하고, 부축하고, 걸음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심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확인을 하게 되니 괜스레 민망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민폐가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흉수와의 거리를 더욱 효율적으로 좁혀갈 수 있게 되었음이 더더욱 중요하다.
라키엘을 비롯한 모두는 한결 쉼 없는 걸음으로 추격을 이어갔다. 그동안 수많은 풍경이 추격대를 스쳐 갔다. 불탄 흔적 가득한 평원. 누렇게 말라붙은 숲. 불운한 주검과 주검들. 서로를 껴안은 채 숨을 거둔 가족과 연인들. 끝없는 파괴와 슬픔의 흔적들.
이윽고 추격대가 국경에 도착한 것은, 추적추적 내리는 끈덕진 빗방울이 밤새도록 내린 뒤의 이른 아침이었다.
“전하. 흉수의 흔적이…… 국경 너머로 이어져 있습니다.”
투구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변경백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침중하였다. 보나 마나 그는 투구 속에서 울분에 찬 눈길로 국경 너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겠지.
“여기서 이만 발길을 돌려야 할 듯합니다.”
변경백의 의견은 합리적이었다.
국경 밖은 말 그대로 타국이다. 게다가 이쪽은 한낱 시정잡배도 아닌, 제국의 황태자와 그를 모시는 주요 인사들이 모인 일행이다. 말 그대로 불법적인 무단 월경이 미칠 파급력의 격이 다른 존재들이다.
하지만 라키엘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대로 전진한다.”
“……예?”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더는 되묻지 말도록.”
이것은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다. 국경을 초월하는 규모의 재난이다. 게다가 흉수를 끝까지 추격해야 할 두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이유 하나. 흉수를 이대로 놓아주었을 때, 과연 놈이 우리의 국경으로 다시 넘어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그땐 더 막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 어느 방면으로 넘어올지 예상하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만큼 대비하기도 곤란해질 것이고.”
“전하의 말씀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하오면, 두 번째 이유는…….”
“국경 너머의 하르미온 왕국. 흉수가 저들의 사주를 받았는지를 확인해야겠지.”
“아……!”
변경백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국경을 넘어간 흉수가, 이쪽 제국 국경지대 초토화의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야. 이대로 간다. 전진.”
다들 말없이 걸음을 떼었다.
몰살당한 국경 수비대의 시신 사이를 헤치고, 말없이 국경을 넘어갔다. 10분쯤 걸음을 재촉하였을까. 건너편, 하르미온의 소규모 국경 요새도 폐허가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하르미온에 대한 의심을 풀 수는 없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타국의 수백, 수천의 인명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 있다면, 자국의 수십 명쯤을 위장용 희생양으로 삼지를 못할까.
아니. 인간은 그렇게 온화한 존재가 아니다.
모두가 서글픈 가설을 망막에 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이어진 흉수의 흔적을 따라. 끝없이 널브러진 폐허의 길을 따라. 걸을수록 피어나는 복수심을 양분으로 삼아. 젖은 진창길과 바스러진 숯덩이를 벗 삼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지 아흐레째가 되는 날.
마침내 숲의 끄트머리를 벗어나 탁 트인 평원으로 진입한 라키엘과 추격대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둥! 둥! 둥! 둥! 둥!
가슴 깊숙이 울리는 전장의 북소리. 돌격을 알리는 중후한 뿔나팔. 굳게 닫아 걸은 성문. 하르미온의 서북부 국경지방 테니에르의 중심도시 테니온. 그토록 드높은 성벽 위에 도열한 수비병의 물결.
그리고 도시 수호의 창검을 치켜들고서 돌진하는 요격 기병대.
투두두두두!
기병대의 결사적인 돌격이 향하는 곳.
그곳에 기이한 형상이 서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딩동!
[WARNING!]
[근방에서 핵연쇄반응에 필요한 임계질량(Critical mass)을 초과한 핵분열성 물질의 코어가 감지됩니다. 경고! 경고! 방사능 피폭(radiation exposure)을 방지하기 위하여, 코어와 신속히 멀어지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곳에 서 있는 기이한 형상. 달아오른 신기루를 한 겹 걸친 듯한 섬뜩한 뒷모습.
저놈이 흉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