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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02화 (401/468)

402화. 멀리서 보면 신비의 기사 (1)

누구도 없다.

이 한 몸 기대어 기꺼이 울 수 있는 이가 없다. 사실은 누구나 그렇다. 그렇게 들었다. 까마득한 옛날. 마지막 남은 기억의 편린조차도 빛바래어 버린 시간의 절벽 너머. 아득한 추억 속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같다.

하여 그립다.

누구도 없기에 그립다.

없기에 더더욱 찾는다.

애타게 찾고, 헤매고, 갈구하며, 때로는 구걸한다. 그것이 비록 구차하다 하여도. 그럼으로써 끝내 평안해질 수만 있다면. 한 줄기 위안 속에 눈꺼풀 감아볼 수만 있노라면. 언제고 기꺼이 그리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애타게 찾고, 헤매고, 갈구하며, 때로는 구걸한다.

- …….

흑마법사에 의해 태어난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는 텅 빈 두개골을 들었다. 공허한 구멍뿐인 눈길을 평원 너머로 던졌다. 야트막한 숲의 가장자리. 그곳을 보자 있지도 않은 심장이 뛰었다. 가슴이 쿵쿵. 벅차오르는 감각이 자꾸만 들었다.

잠깐만.

저기에?

왜?

친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 …….

악티누스는 잠시 작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연일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외로웠다. 그 누구도 자신을 받아줄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다가갔을 뿐인데.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자그마한 위로와 보호를 바랐을 뿐인데.

모두가 쓰러졌다.

버둥거리고.

도망치고.

절규하며.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세상의 모든 이들은 나를 거부하기만 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덜 자란 새끼 드래곤일 뿐인데. 부모를 잃고 홀로 남아 기댈 곳을 찾아 헤매는 존재일 뿐인데. 그런데 어째서. 왜. 세상 모두는 나를 거부하듯 버둥거리고. 도망치고. 절규하며. 마침내 텅 비어 초점 사라진 시선만 던지는 걸까.

답을 찾고 싶었다.

아늑한 요람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찾은 것 같다. 일단은 그렇게 느껴진다. 익숙한 기운. 저곳에서 나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공명하는 두 갈래의 마나. 확실하다. 드래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드래곤이 남긴 마나다.

- ……끼이잉?

모처럼 친숙한 마나의 기운을 확신한 순간이었다. 악티누스는 본능적으로 낑낑거렸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처럼.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젖을 물려고 애를 쓰는 고양이처럼. 버둥거리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땅을 박찼다.

투확-!

순식간에 피어나는 흙먼지.

몸길이 20미터의 거구가 경이로운 속도로 평원을 가르기 시작하였다. 돌진하다가 낙마하여 패닉 상태에 빠진 기병대를 내버려 두고서. 평원 너머. 야트막한 숲의 초입. 그곳에서 친숙한 드래곤의 마나를 풍기는 은발의 남자를 향하여.

맹목적으로.

너무나 반가운 마음으로.

휘이잉-!

불길한 바람이 불었다. 라키엘의 은색 앞머리칼을 한 차례 흐트러뜨렸다. 그 순간, 라키엘은 자신의 두 눈두덩이를 손등으로 북북 긁어보고 싶은 맹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실화?’

지금껏 평원에서 잘 서 있던 흉수, 기괴한 형상의 새끼 본드래곤이 이쪽을 돌아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놈이 이쪽을 향해 쿵쿵쿵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이틀 만에 집에 온 주인이 꺼낸, ‘산책 나가자’라는 말을 들은 비글 같은 몸짓이었다.

대체 왜?

뭐가 저렇게.

반갑다는 걸까.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부웅! 부웅! 붕우웅우웅웅우웅!

마치 의문에 대한 답을 톡 던져주듯, 품속의 두 물체가 맹렬한 진동을 가슴팍에 전달했다. 언제나 소지하고 다니던 두 아티팩트, 만년설과 만년필이었다.

‘이게 왜?’

어째서 저 기괴한 모습의 흉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공명하듯 진동하기 시작한 걸까. 게다가 어째서 흉수는 두 아티팩트가 공명하자마자 이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걸까. 또한, 어찌하여, 흉수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두 아티팩트의 공명이 거세어지는 것일까.

‘설마 만년설과 만년필의 기운에 반응하는 건가, 저놈?’

아니길 바랐다.

솔직히 아니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세상사 ㅈ같은 예감은 언제나 지랄맞게 잘 들어맞는 법이라고.

“전원! 전투 준비!”

갑자기 돌진해 오는 흉수.

놈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변경백이 검을 뽑았다. 데미안과 세르지오, 프란델 경 등도 마찬가지였다.

“전하를 보호하시오!”

“전하, 제 뒤에!”

모두가 분주해졌다. 변경백과 데미안이 대열의 선두에 섰다. 그 뒤의 공간을 다른 이들이 채웠다. 그리고 이쪽을 제일 뒤편에 위치하게 했다. 모두가 검과 몸으로 이쪽을 지켜내기 위한 대열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흉수는 맹목적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졌다. 더욱 가까워졌다. 가까워질수록 경악스러울 정도의 속도로. 기세로. 오직 이쪽만을 또렷하게 쳐다보며. 마치, 한 놈만 팬다고 눈으로 외치듯이.

‘미친.’

저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대열의 모두와 함께 회피를 시도할까? 아니. 그러기엔 늦은 것 같다. 피하기엔 흉수의 돌진 속도가 상식 밖으로 빨랐다. 어설픈 회피 시도는 대열의 흐트러짐만 불러오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다들! 막으시오!”

호위군단장 카티니 경이 우렁차게 외치며 이쪽을 감쌌다.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가 치켜든 방패 너머로 보였다. 불과 10미터도 남지 않은 흉수와의 거리. 시작된 격렬한 충돌.

그래. 이게 볼링공을 맞이하는 볼링핀의 시점인 건가. 아마도 이런 거겠지. 볼링핀의 기분이라는 건.

콰아앙-!

흉수가 돌연 몸을 돌리며 기다란 꼬리를 가로로 휘둘렀다. 거대한 사슬 같은 꼬리가 지면을 따라 일행 전체를 휩쓸었다.

돌격의 기세가 그대로 실린 꼬리 치기.

그걸 처음으로 맞이한 볼링핀, 아니, 사람은 데미안과 변경백이었다. 짧은 순간의 사이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데미안이 꼬리를 향해 검을 마주 내리쳤다. 변경백이 기합과 함께 올려베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둘 다 튕겨나갔다. 거의 7, 8미터가 넘는 거리를 훨훨. 마치 힘 조절을 잘못해서 삑사리를 낸 알까기 바둑알처럼. 머나먼 풀밭으로 쿠당탕.

대열의 나머지 인원들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저, 전흐아악……!”

가장 앞에 있던 데미안과 변경백을 손쉽게 치워낸 흉수가 앞발을 연달아 휘둘렀다. 단순한 앞발의 힘만 실린 공격이 아니었다. 놈이 휘두르는 앞발의 경로를 따라 끔찍한 열기가 일행을 엄습했다. 차폐 갑옷 외부가 금방 핫팩 100개를 붙여 버린 것처럼 달아올랐다.

“전……하를 지켜야!”

“후, 후욱! 훅……!”

끔찍한 열기 속에서 모두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추격대의 대열 사이로 흉수가 앞발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후웅, 거슬리는 커튼 걷어치우듯 6인의 소수정예 추격대원들을 양쪽으로 밀어 버렸다.

덕분에 모두가 콰당탕.

무력하게 넘어졌다.

“감히!”

마지막 남은 보루, 카티니 경이 방패를 치켜들고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려 호위군단의 군단장인 그마저도 흉수가 귀찮다는 듯 휘두른 머리통에 맞아 저만치 날려가 버리고 말았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격 오픈.

이쪽과 흉수 사이를 가로막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하…… 하하…… 하…….”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사바나를 걷다가 졸지에 티라노사우르스와 마주치면 이런 기분인 거겠지. 바지는? 안 적셨나? 다행이다. 아직은 뽀송뽀송하다. 그것만으로도 나,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는 거 아닐까.

‘미친……!’

라키엘은 이를 까득 갈았다.

겨우 서너 걸음 앞에 우뚝 서서, 10미터의 눈높이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흉수. 기괴한 형상의 뼈대. 이쪽을 향한 공허한 눈빛과, 사방에서 날뛰듯 이글거리는 열기. 그리고 찜통 속에 던져진 듯 실시간으로 붉게 달아오르는 차폐 갑옷까지.

‘어떡하지?’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패닉에 빠지면 끝이다. 라키엘은 스스로를 단속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한 가지 다행인 점과, 한 가지 엿 같은 점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인 점 하나. 이놈은 다른 일행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아직은 살의를 드러내지도 않는 것 같고.’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방금 데미안을 한 방에 나가떨어지게 만든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데미안이 당뇨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쓸 수는 없는 상태라지만, 그럼에도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위력을 낼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크게 다친 이도 아직은 없다. 흉수, 저놈이 일행에게 관심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그래서 엿 같은 점 하나. 이놈의 모든 관심이…… 오직 나한테만 쏠려 있다는 것.’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대로 넋 놓고 있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

……츠즈즈즈즈즈!

재빨리 품속의 만년설을 꺼냈다. 냉기 실드를 전개했다. 차폐 갑옷의 겉면에 바른 엘렌시아 수액 덕분에 열기가 갑옷 속으로 침투하지는 않았지만, 곧 시작될 놈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이쪽이 꺼내든 만년설의 모습이 거슬린 걸까. 혹은 자극이 된 걸까.

- ……!

흉수가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음파가 아닌 그 무엇. 소리는 없으되, 온몸을 쩌렁쩌렁 뒤흔들듯 울리는 진동.

그리고 발작적으로 달려드는 몸짓.

“……!”

흉수의 커다란 입이 보였다. 놈의 벌어진 입이 위에서부터 이쪽을 덮쳐왔다. 한입에 집어삼키려는 것일까.

그걸 느끼자마자 라키엘은 용천혈의 두 갈래 써클을 개방했다.

투확-!

써클이 개방되며 마나가 증폭되었다. 분출되었다. 지면을 밀어냈다. 주위의 풍경이 점과 면에서 선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쐐애액-! 터컥!

급가속의 메슥거리는 감각과 함께, 순식간에 5미터가량을 이동했다. 흉수의 다물리는 거대한 아가리가 아슬아슬하게 차폐 갑옷을 스쳤다.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실감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 ……!

계속해서 외치며 달려드는 흉수.

아예 온몸을 내던져 왔다.

‘와 진짜.’

식은땀이 와락 솟아났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어 회피에만 집중하였다.

콰학! 쐐액! 카가가각-! 투컥!

가슴의 두 갈래.

용천혈의 두 갈래.

도합 네 갈래의 써클이 쉴 틈 없이 연계되며 마나를 증폭하고, 전달했다. 단거리 고속 이동을 거듭 반복했다. 전후좌우, 미끄러지듯, 공간을 돌파하고, 허를 찌르고, 달려드는 열기의 빈틈을 파고들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는 일행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물론 흉수 또한 끈질겼다.

이쪽이 용천혈 부스터(?)로 고속 이동을 할 때마다 경이로운 반사속도를 선보였다. 아슬아슬한 추격을 거듭했다. 거의 10센티. 때로는 그 이내. 매번 간발의 차이로 놈의 아가리와 손아귀에 물리거나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동안 라키엘은 속으로 수없이 외치고, 또 외쳤다.

‘미친! 다들 빨리 일어나! 날 도와! 쫌!’

투투확!

내심 간절한 SOS를 내지르며 연속 고속 이동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라키엘!

그 모습에 데미안과 변경백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 일행들이 주먹을 쥐고서 자신의 사명을 되새겼다.

그리고 제법 떨어진 평원과 도시에서는…….

‘저 신비의 기사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간신히 낙마의 충격을 털어내던 기병대장이 경악의 눈길을 부릅떴다. 그 곁의 기병대원들, 아울러 더 건너편의 도시 성벽 위에서 상황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수비병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혜성처럼 나타나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악몽 같은 괴수와 처절하고도 웅장한 전투를 벌이는, 신비한 갑옷의 기사! 그의 웅혼한 영웅적 전투(?)에 모두가 감격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사자인 라키엘만 쏙 빼고.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이 인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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