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멀리서 보면 신비의 기사 (2)
제발 이것이 꿈은 아니었으면.
하르미온의 국경지방 중심도시, 테니온의 어느 병사는 성벽 위에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아니, 요즘 들어서 계속 그랬다.
연일 날아들던 흉흉한 소문. 정체불명의 존재가 벌인다는 대학살과 파괴. 덕분에 전에 없던 긴장감에 휩싸여 무기를 끌어안고 자야 했던 최근.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 일이 터졌던가.
학살과 파괴를 일삼는다던 존재가 기어코 이 도시로 오고야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드높고 튼튼한 성벽이 있으니까. 마젠타노 제국의 정예와도 어깨를 견줄 무적의 기병대도 있으니까.
믿었다.
단단한 믿음.
그러나 곧 깨져 버린 믿음.
무참히 박살 난 믿음 속에 기병대가 나뒹굴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석궁을 쥔 손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비로소 피부로 다가오던 공포심과 부담감. 저걸? 저런 괴물을? 내가? 이따위 석궁으로?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
성벽? 이것보다 더 높아도 모자랄 것 같고.
석궁? 천 발을 쏘아도 소용이 없을 듯하고.
그럼 결론은?
오늘 죽음.
아마도.
“……라고 생각했는데.”
병사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평원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웅장한 전투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 검회색 뼈다귀로 이루어진 기이한 괴수가 날뛰고 있었다. 더없이 흉포하고 흉흉한 난동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까처럼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괴수를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신비의 기사 덕분이었다.
투확! 콰학!
괴수가 연이어 달려드는 와중에도 기사(?)는 침착하고도 재빠르게 대응했다. 갑옷이 무척이나 묵직해 보이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바람과도 같았다. 때로는 섬전처럼 쏘아지듯 미끄러지며 움직였다. 매번 괴수를 농락하듯 절묘한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그 앞에서 쩔쩔매듯 포효하는 괴수.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신비의 기사.
아니.
우리의 도시를 지켜주기 위하여 홀연히 나타난 영웅, 그 자체!
“우와아아아아!”
보고 있자니 절로 가슴이 뛰었다. 무의식중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이 주위 병사들의 가슴으로 옮아갔다. 더욱 날뛰는 심장. 치솟는 용기. 들끓는 감정이 용맹한 전염병처럼 성벽 위로 번져갔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위대한 영웅이 나타났노라고. 저 영웅과 함께라면 어떤 괴수도 두렵지 않다고.
그러한 기분은 괴수를 더욱 가까이에서 경험한 기병대원들과 기병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자는 누군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의 편인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그렇지. 하니 우리가 이렇게 있을 계제가 아니다.”
기병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낙마하던 과정에서 부러진 갈빗대가 시큰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송곳이 폐부를 휘젓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아픔 따위에 정신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천금 같은 원군이 나타나 기적적인 활약을 벌이는 순간이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테니온의 아들들이여! 대열을 갖추라!”
악티누스에게 접근하자마자 끔찍한 열기를 경험하고, 덕분에 줄줄이 낙마를 했던 기병대원들이 다친 몸을 추스르며 말 등에 올랐다.
기병대장이 외쳤다.
“전원! 기동 사격 준비!”
“준비!”
철컥! 처크컥!
기병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그들의 손에는 기병용 돌격창 대신 석궁이 들리게 되었다. 가슴이 벅찼다. 혈관이 저릿했다. 홀로 싸우는 정체 모를 영웅을 향한 치솟는 감격. 떨리는 목청.
“진격!”
“이랴! 하!”
대열을 수습한 하르미온의 기병대가 박차를 가하며 흙먼지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혜성처럼 나타나 도시를 구원하기 위한 외로운 분투를 벌이고 있는 의문의 영웅. 오직 그의 장엄한(?) 전투를 돕기 위해서였다.
♣
콰아아앙-!
장엄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동시에 솟구치는 열기의 폭풍. 덕분에 먹먹해지는 애꿎은 고막. 라키엘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크읏!”
어지럽다. 당연하다. 무지막지한 고속 이동을 연달아 감행하고 있으니까. 급격한 가속과 감속을 연타석으로 체험하고 있으니까.
‘미치겠네, 진짜.’
확 멈췄다가. 확 움직였다가. 그때마다 숨이 턱 막히고 피가 확 쏠리는 중력가속도에 시달렸다가. 그런데 쉬지를 못하고 연달아 계속, 또 계속.
- ……!
흉수가 또 달려들었다.
“느읍!”
라키엘은 다시금 치를 떨며 용천혈의 써클을 개방했다. 가슴의 두 갈래 써클이 호응하며 마나를 증폭시켰다. 증폭된 마나가 용천혈로 분출되었다. 다시금 엄습해 오는 초가속의 멀미 해일. 위장이 한쪽으로 확 쏠리는 감각. 이윽고 맞이하는 급정거의 헛구역질까지.
“……그흡!”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위장 속의 위액이 확 올라올 것 같았다. 못 참으면? 매우 곤란하다. 지금 입고 있는 차폐 갑옷은 말 그대로 거의 밀폐 상태니까. 토사물이 갑옷 안에 와르르……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문제는, 흉성을 한껏 드러내고 있는 흉수가 그런 이쪽의 사정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
아아. 이토록 배려 없는 세상이라니.
흉수의 거대한 아가리가 벌어졌다. 분명 뭔가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뭔가 할 말이 많은 걸까. 이윽고 어김없이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는 끔찍한 그림자. 맹목적인 맹공. 아니, 폭격.
콰콰콱-!
흉수가 가로로 휘두른 꼬리가 지면을 그대로 갈아엎듯 돌진해 왔다. 주먹보다 커다란 돌멩이 수십 조각의 폭격과 함께였다.
“……큿!”
이건 못 피한다. 꼬리는 몰라도 수십 갈래의 짱돌 폭격을 다 피해낼 자신은 없다. 한데 저런 크기의 짱돌에 직격당하면? 갑옷이 있어도 타격을 받는다. 아니, 이 경우는 타격이 문제가 아니다.
갑옷에 흠집이 나면 안 된다. 운이 나쁘면 자칫 갑옷 표면에 씌워놓은 마법 재료와 납 도금이 벗겨질 수 있다. 그러면 방사선 차폐 능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본격 방사능 샤워 당첨인 셈이다.
‘선 방어 후 회피.’
라키엘은 재빨리 만년설을 치켜들었다. 그 직후, 십수 개의 커다란 돌멩이가 포탄에 가까운 기세로 날아왔다. 냉기 실드를 연달아 후려쳤다.
콰터터터터텅-!
“……!”
팔뚝, 무사한 걸까.
그러나 팔뚝의 안위를 살필 겨를은 없었다. 돌멩이 폭격에 이은 꼬리 강타가 날아오는 까닭이었다. 용천혈 부스터(?)를 황급히 발동하였다. 간신히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일순간 투구 바로 앞을 스치는 거대한 꼬리의 기세.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나는.
이래도 될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딩동!
[WARNING!]
[당신은 지속적으로 방사선 외부 피폭을 당하고 있습니다.]
[현재 착용 중인 장비의 도움으로 치명적인 수준의 피폭을 모면하고는 있으나, 누적되는 피폭량이 적지 않아 다소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이 실시간으로 감소합니다.]
[경고 : 예상 기대수명 20일 감소!]
[예상 기대수명 : 2,502 일]
‘헉…….’
라키엘은 진심으로 기겁했다. 차폐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약간의 방사선이 계속해서 뚫고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더웠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용천혈의 부스터(?)를 사용하여 연달아 공격을 피해내고는 있지만, 격렬해진 움직임만큼 체온이 올랐다. 그 체온이 빠져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차폐 갑옷에 바른 최강의 단열재, 엘렌시아 수액 때문이었다.
수액 코팅이 흉수의 핵분열 열기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만큼, 안쪽의 체온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덕분에 갑옷 안쪽의 온도는 급상승. 졸지에 맛깔나는 수육으로 연성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누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
점점 엄습해 오는 현기증. 결코 장난이라고 말할 수 없을 멀미. 숨이 콱 막히는 열사병의 감각까지. 위기감이 뒷골을 움켜쥐어왔다.
그때였다.
콰콱-!
지면이 뭔가에 뭉개지는 소리. 꼬리 휘두르기를 마친 흉수가 회전의 기세를 그대로 살려 지면을 박차는 모습이 보였다. 직립 높이 10미터. 꼬리까지 체장 20미터 이상으로 보이는 거대한 뼈대가 이쪽을 향해 전신을 날려왔다.
순간 가려지는 태양.
드리워지는 그림자.
‘미친.’
피해야 하는데.
용천혈 부스터를 발동해야 하는데.
열기와 현기증으로 턱 막히는 호흡과 함께 마나의 순환도 가로막혔다. 써클의 회전이 멈칫거렸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이쪽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드는 흉수를 그저 망연히 올려다볼 뿐.
‘이건 좀.’
아닌데.
뭔가 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전하!”
곁에서 날아오는 다급한 외침. 뒤이어 옆구리에 엄습하는 맹렬한 충격!
커텅!
“……구왋!”
갑작스럽게 옆구리를 후려치는 충격에 나가떨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이단옆차기(?)를 시전하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의 곧게 뻗은 다리. 훤히 보이는 신발 바닥. 아하. 녀석이 내 옆구리를 걷어찬 거구나.
콰당탕!
“커억!”
어찌나 강하게 걷어찬 건지, 거의 몇 미터는 날려가서 바닥을 굴러야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했다. 이 녀석,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쪽을 발차기로 후려쳐서 구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 같은데.
‘크레모에서도 이러지 않았나?’
하지만 데미안 녀석을 향해 투덜거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쿠쾅-!
데굴데굴 구른 이쪽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흉수의 거대한 뼈대가 온몸으로 지면을 짓눌렀다. 맹렬한 충격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났다. 이쪽을 걷어찼던 데미안의 모습? 당연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데미안!”
녀석, 설마 깔린 걸까.
그러면 안 되는데.
다급한 마음을 담아 외쳤다. 다행히 대답은 곧 돌아왔다.
“쉿, 전하. 조용히.”
터턱!
흙먼지 속을 뚫고 달려온 손길이 이쪽을 낚아챘다. 순간 몸이 공중으로 훅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데미안 녀석이 이쪽을 어깨에 들쳐업고서 내달리고 있었다.
“안 죽었냐?”
“예, 다행히.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어. 불행히. 토할 거 같다.”
“제 어깨에는 하지 마시죠.”
“하고 싶어도 못 해. 투구라도 벗으면 모를까.”
물론 못 벗는다.
그랬다간 흉수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얼굴 가죽이 익어 버릴 테니까.
“해서 말이지. 나한테 계획이 있는데.”
“어떤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하의 위장에 행복함을 가져다주는 작전이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이 달려가고 있는 뒤편. 자욱하게 피어났던 흙먼지 너머로 거대한 실루엣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놈의 형체가 이쪽으로 돌아서는 모습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손에 쥔 만년설과 품속의 만년필이 격렬하게 공명했다. 부우웅, 부웅, 당장에라도 카운터에 주문한 커피 찾으러 가야 할 것처럼 격렬하게.
덕분에 조금은 알겠다.
아까부터 두 아티팩트가 보이던 공명 반응. 그리고 오직 이쪽만을 쥐 잡으려는 듯이 집요하게 공격하는 흉수의 모습까지도.
어쩌면.
아마도.
확실히.
“저놈, 아무래도 만년설과 만년필에 꽂혀 있는 거 같다.”
“전하의…… 무구에 말입니까?”
“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이걸로 놈을 농락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농락이라. 어떻게 말입니까?”
“놈의 집착을 역이용하는 패스 플레이.”
“예?”
“티키타카, 들어본 적 있냐?”
“…….”
없다.
그런데 대강 뭔지 알 것 같다.
데미안은 묘한 확신을 느끼며 물었다.
“또 야비한 수법을 동원할 생각이신 거로군요?”
“어? 기왕이면 기발한 수법이라고 해주지 않을래?”
반문하는 라키엘의 입가에 더없이 야비, 아니, 야시꾸리한 미소가 야물딱지게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