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불신자의 치료법 (1)
방사능 본드래곤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 준비의 실질적인 핵심인 ‘흙먼지 나는 공사’는 모두 시장에게 일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은 이 도시와 구리 광산의 상세한 구조를 모른다. 공사의 전문가도 아니다. 20대 시절엔 알바 삼아 인력소를 몇 번 들락거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다. 마젠타노 황족의 몸에 흐르는 천재적인 영지 설계사의 핏줄? 아쉽게도 공사는 핏줄이 해주지 않는다. 공부와 노련한 경험이 해주는 거지.
“그래서 힘든 일은 전부 브레다 시장에게 떠넘기신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흠흠.”
“……어이? 데미안?”
“예, 전하.”
“왜 요약이 그렇게 되냐.”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요.”
“어째서?”
“엄연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뭐, 따지고 보면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하지.”
“그렇습니까.”
“그렇지.”
“어째서요?”
“생각해 봐. 도시가 통째로 날아가느냐, 광산 하나로 퉁을 치느냐의 문제거든. 지금 이 사태는.”
라키엘은 데미안과 나란히 걸으며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차폐갑옷을 벗은 덕분일까. 혹은 샤워의 권능(?)을 맛본 결과일까. 온몸이 개운하고 날아가듯이 가벼웠다.
“게다가 시장은 내가 제시한 본드래곤 격멸법 외의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지. 그러니까 내 작전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러니 본드래곤의 침입 지점인 성문에서부터 광산 출입구까지 예상 이동 경로의 시가지 부분 철거 및 대로 확장, 시민들이 머물 방공호 준비, 광산 내부의 갱도 확장, 막장에 설치할 폭발 함정과 미끼의 탈출로 공사까지, 그 모든 과정에 최선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준비에 임해 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만 열심히 하면 된다, 라는 말씀인 거로군요.”
“딩동댕. 바로 그거지. 이야. 우리 데미안 많이 컸다. 내가 다 뿌듯하다.”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 진짠데?”
“…….”
“검투장에서 검만 휘두르던 녀석의 추리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어? 뿌듯하겠어, 아니겠어? 응?”
“딱히…….”
“어두운 지하 세계에서 인간의 문물을 접하지도 못하고서 철창 속의 피 튀기는 나날만 보내던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라고 학계에 제보해 볼까?”
“…….”
“미안.”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다른 건? 그것도 괜찮아?”
“혈당 말씀이십니까?”
“어.”
“괜찮습니다.”
사실이었다. 아까 혈당을 동원하며 연거푸 마나로 분출하는 바람에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전하의 응급처치가 적절했습니다. 우리 전하 많이 크셨어요. 제가 다 뿌듯합니다.”
“……뭐?”
“진짜입니다.”
“…….”
“제 보호를 받으며 별궁에서 환자들 푹푹 찔러대던 분의 실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했답니다. 그런데 제가, 하. 뿌듯하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예?”
“어이.”
“따사로운 별궁에서 황족 수저에 묻은 꿀만 챱챱 빨아대던 분의 현장대응 능력이 이렇게나 발전할 수가 있어요, 라고 학계에 제보하면 될까요?”
“…….”
“죄송합니다.”
“응. 너 사형.”
“그래도 감사합니다.”
“죽여줘서 감사해? 변태야?”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전하의 말씀이 맞았던 거 같아서 말입니다.”
데미안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 어름을 오른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멀티 마나하트 말입니다. 마침내 만들어냈습니다. 덕분에 혈당을 마나로 변환하며 버티는 횟수를 늘릴 수 있었고 말입니다.”
“어 그러냐.”
“예. 별궁에서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늘어나는 마나하트의 숫자만큼, 혈당을 마나로 변환할 수 있는 횟수가 늘어날 거라던 말씀 말입니다.”
“그럼 지금은 두 번?”
“예. 마나하트가 둘로 나뉘었습니다.”
“쓰읍. 턱도 없이 모자란데.”
“…….”
“아 최소한 100개는 돼야 하는 거 아닌가?”
“…….”
“어휴. 딸랑 두 개가 뭐냐, 두 개가.”
“…….”
“열심히 좀 하자, 응?”
“……예.”
그렇듯 서로를 향해 열심히 쏟아붓는 비난과 디스의 공방전! 그 끝에 라키엘과 데미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입니까?”
“으음. 시장네 행정관이 알려준 대로라면?”
라키엘은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기도소’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보였다.
“이곳 하르미온에서는 기도소가 병원의 역할을 한다더라고.”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
“예, 전하. 하르미온에는 의사가 없다고 하더군요. 대신 신관들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고 했습니다.”
“뭐. 대신관이 곧 국왕인 신정일치의 나라니까. 들어가자.”
“예.”
기도소 건물 내부는 적당히 어두웠다. 최소한의 크기로 절제한 창문과 적당히 드리워진 커튼 때문인지, 드문드문 켜 놓은 촛불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그 어둑하고도 드넓은 공간.
벽면을 따라 줄지어 놓인 침상이 보였다. 30명 남짓한 환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탄탄하고 건장한 체격. 이 도시의 기병대원들이었다.
‘아까 돌격 때 낙마하지 않았던 이들이구나.’
시장과 기병대의 돌격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방사능 본드래곤이 내뿜는 열기에 놀란 전투마들이 겁을 먹고 날뛰었더랬다. 덕분에 시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병대원들이 낙마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일부 기병들은 운 좋게도 낙마하지 않았다. 그대로 돌격했다. 즉, 방사능 드래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더 오래 머물렀다. 운 좋게도. 아니. 그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반대겠지.’
결과적으로 낙마하지 않았던 ‘운 좋은’ 기병대원들이 더 많은 피폭을 당했다. 그리고 기도실에 누워 있게 됐다. ‘운 나쁘게’ 낙마했던 시장이나 동료들이 가벼운 피폭만을 당하여 별다른 후유증을 겪지 않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단 진맥부터 시작하자.”
“예, 전하.”
데미안 녀석이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침상 사이사이를 누비며 기병대원들의 누운 자세를 바르게 잡아주고, 손목 소매를 미리 걷어놓았다. 이쪽의 진맥을 편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라키엘은 가장 가까운 침상으로 다가섰다.
‘진맥.’
기병대원의 손목을 잡았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 주세요.]
얼마나 피폭된 걸까.
약간은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시선을 내렸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스코브 노드그린]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7세]
[신장 : 184.2cm]
[체중 : 81.1kg]
[혈액형 : Rh+ B]
[종합소견 : 매우 높은 수준으로 단련된 신체입니다. 다만, 최근 짧은 기간 사이에 1.7Sv(시버트) 가량의 방사선에 피폭되었습니다. 그에 따른 두통과 오심, 소화기능 장애, 어지럼증, 급격한 피로감, 남성 불임, 시력 및 청각을 비롯한 전반적인 감각 저하,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 하락 등의 증상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현재 1개월 내 치사율 5%. 향후 적절한 치료와 휴식 없이 방치를 당할 경우, 치사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난리 났네.’
종합검진표를 보는 순간 라키엘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예상보다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려 1.7시버트라니. 예전에 방사능 본드래곤의 흔적을 장기간 추적했던 변경백의 병사들도 1시버트 이상의 피폭량을 보이는 이는 없었는데.
‘그만큼 저 본드래곤의 방사능 수준이 엄청나다는 뜻이겠지.’
아주 잠깐 근처에 머물렀을 뿐인 기병대원들이다. 그런데 이 정도 피폭량이라면, 제대로 된 차폐 장비 없이 몇 분만 근처에 머물러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준의 방사선이라는 뜻이다. 새삼 국경지대의 마을과 소규모 요새들이 어떻게 학살을 당한 건지 이해가 되었다.
그때였다.
“혹시…… 신관님이십니까?”
오장육부의 상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도중이었다. 진맥을 받던 기병대원이 실눈을 뜨더니 물음을 건네어 왔다. 많이 아픈 걸까. 안색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라키엘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신관은 아니야.”
“그럼…….”
“의사야. 한의사.”
“한의사…….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지? 나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봤어.”
“그럼…….”
“일단 치료부터. 마음 놓고 편히.”
이 사람을 위해 무얼 해 주어야 할까. 생각보다 심각한 피폭 상황에 조금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한의사라고 한들 방사선 피폭 앞에서 답이 있나. 내가 배웠던 한의학 지식에 방사선 피폭에 대한 대책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을 짜내어서라도.
‘생각해 보면 복잡하지 않아. 방사선 입자 때문에 세포의 구조가 파괴되고, 자가 치유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인 거야. 그러면 오히려 해볼 만해. 자가치유력을 끌어올리는 건 원래부터 한의학의 전문 분야니까.’
체질개선.
원기회복.
자양강장.
활력증진.
그러한 일련의 보양을 통하여 병마를 미리 막는 것. 건강한 신체를 가꾸어 주는 것. 그것이 한의학의 핵심이 아니던가.
‘이뇨작용을 끌어올려서 체내의 독소 배출을 원활하게 돕고,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주는 거야. 거기에 세포 재생과 간의 해독 작용에 도움이 되는 약재를 조합하면 돼.’
사실상 현대 의학에서도 방사선 피폭 증상은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 그저 통증을 덜어주고 죽음을 미루는 대증적 치료가 전부다.
‘그러니까 쫄지 말자. 할 수 있어.’
라키엘은 잠시 찾아왔던 막막한 심정을 털어내며 각오를 머금었다.
한데 그때였다.
“거기. 우리의 선량한 신도 곁에 다가오신 이는 누구이십니까?”
달칵.
건조한 물음과 함께 기도소 안쪽 회랑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체구가 작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차림의 남자였다.
남자가 사박사박, 미끄러지듯 이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작았다. 겨우 160센티쯤 될까. 그러나 후드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체구와 반대로 묵직하고,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우리 선량한 신도들의 기도를 방해하는 이는 누구이십니까?”
“아, 저는…….”
“불신자. 맞습니까?”
“네?”
“본 적이 없는 얼굴입니다. 위대한 신의 가르침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입니다. 한데 그 불경한 낯빛과 눈빛으로 이곳에 들어와, 신도들의 기도와 치유를 방해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뇨.”
라키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치료를 위한 진맥을 하던 참입니다.”
“진맥? 설마, 진찰을?”
“네.”
“감히!”
후드의 남자가 버럭 일갈했다.
“더러운 불신자 주제에! 신성한 장소에 함부로 발길을 들인 것도 모자라 신도의 몸을 더듬고 살피며 부정하게 더럽히는 짓거리를 공공연하게 저지르다니, 신의 노여움이 두렵지도 않은 것입니까!”
“…….”
“당장 썩 무릎을 꿇고 물러나십시오! 부정한 손길을 사죄하며 회개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이 신관장, 슈마이케가 직접 정화의 채찍질로 그대의 눈가에 피눈물을 찍어냄으로써 강제로라도 회개의 기도를 구걸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고래고래 신경질적인 고함을 내지르는 신관장.
라키엘은 어이가 터져나가는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x끼, 뭐지.
선 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