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선동은 이렇게 (1)
“감히!”
짜악-!
라키엘의 채찍이 부신관장의 안면을 풀스윙으로 후려쳤다. 그 순간, 부신관장은 자신의 볼따구와 입술, 잇몸이 친절하게 인수분해 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거헉!”
쓰러졌다. 아니, 쓰러졌는지도 제대로 자각할 수 없었다. 얼굴이 없어진 걸까. 아니면 하늘이 사라진 걸까. 어지러웠다. 땅을 짚었는데 뜬금없게도 발바닥이 이마를 노크했다.
콰앙!
“겍!”
착각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부츠 바닥이 이마를 짓눌러 왔다. 부신관장은 버둥거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황태자의 발을 치우기엔 힘이 모자랐다.
라키엘이 작정하고서 체중으로 짓누르는 까닭이었다.
“…….”
솔직히 반쯤 죽여놓고 싶다.
라키엘은 부신관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정말로 그러지는 말자고. 지금은 그러면 안 되는 순간이라고.
‘이성을 잃지는 말자.’
세상사가 그렇다. 화를 내더라도 이성까지 잃으면 십중팔구 손해를 본다. 일을 저지르는 와중에도 손익은 철저하게 계산해야 한다. 언제나 상황을 지켜보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지를 건 지르면서, 얻을 건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각을 잘 봐야 해.’
라키엘은 주변의 분위기를 재빠르게 체크했다. 이쪽이 부신관장을 후려치고 짓밟은 덕분(?)일까. 광장의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딱 굳어 버린 채였다. 신관들을 성토하며 돌팔매질을 하려던 사람들도. 화형대에 매달린 여인들을 풀어주려던 시민들도. 그들에게 풀려나고 있던 여인들마저도.
‘일단 눈길 끌기는 성공했고.’
라키엘은 버둥거리는 부신관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광장 전체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인 이 순간이 기회다. 그걸 놓치지 말자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봐. 당신, 신관이잖아.”
“그긋! 그으읍!”
“신관이라면 신의 말씀을 전파하며 누구보다도 사람을 아끼고 존중해야 하는, 뭐 그런 책임이 있지 않나?”
“무슨…… 궤변을!”
“궤변이 아니고.”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한 손으로는 곁에 주저앉아 있는 노파를 가리켰다.
“이분이 불신자인가?”
“그건…….”
“오히려 불신자들의 제국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느라 군에 몸담고서 헌신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신가?”
“그게 무슨?”
“내 말이 맞잖아.”
“…….”
“그런데 어째서, 이런 훌륭한 분이 신관인 댁에게 방금 같은 취급을 당해야 했던 거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불신자의 황태자여!”
“댁의 신관으로서의 자격에 의문이 생긴다고.”
“……뭐, 뭣?”
부신관장이 딱 굳었다. 그래. 황당하겠지. 신관의 자격에 의심이 간다는 말을 듣는 것 자체도 황당한데, 그런 말을 불신자인 이쪽에게서 들어 버렸으니까. 심지어 무수한 신도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라키엘은 입을 멈추지 않았다.
“불신자인 내 눈으로 봐도 댁의 행동에서 불합리함이 보여서 말이야. 내 말이 틀렸나? 맞잖아.”
“대체 어디가 맞다는…… 으그아악!”
터져 나오려는 반문은 발에 지그시 힘을 주어 귓바퀴를 짓누르는 것으로 끊었다. 그리고 이쪽의 할 말만 일방적으로 던졌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들의 교리상 불신자에게서 신체적 치료를 받는 것을 금하고 있다더군. 하지만 평소에 그걸 제대로 지키지는 않았다고 했어. 모두가. 일상적으로.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물음은 이쪽을 지켜보던 시민들을 향해 건넸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누구 하나 선뜻 나서며 대답을 하진 못했다. 다들 얼떨떨한 침묵의 눈길을 보내었을 뿐.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신자가 건넨 이런 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은 충분했으니까.
“그래. 맞아. 방금 누구도 내 말에 부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실제로는 다들 불신자의 치료를 잘만 받았지. 그리고 병이 나은 후에는 댁 같은 신관을 찾아가서 사죄와 회개의 기도와 기부금을 바친다고 했어. 몰래? 아니. 대놓고. 아예 그런 형식의 기부금이 기도소의 운영 자금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심지어 평소에 그 깐깐하게 교리만 따진다던 신관장이라는 분도 이번만큼은 기도소에서 기병대원들이 치료를 받는 걸 허락해 줬을 정도였거든?”
물론 진짜로 허락한 건 아니었지만.
사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사소한 진실(?)은 패스하고.
“불신자 주제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그그으읍!”
“내 말, 끝까지 들어.”
체중을 다시금 실어주며 부신관장의 말을 잘랐다. 그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댁은 달랐어. 이상하게도 유독 이번 일에만 교리를 빡빡하게 외쳐대며, 어떠한 타협이나 융통성도 내보이지 않았지. 덕분에 내가 오늘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거야. 그래서 묻겠어. 혹시 댁은 말이야, 성막 바깥에서 도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저 괴수와 내통하고 있는 건가?”
“……뭐?”
“아무리 봐도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라서 말이지.”
“그,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헛소리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라키엘은 태연하게 되받아치며 시민들을 살펴보았다. 방금 이쪽의 발언 때문일까. 시민들이 온통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딱 좋았다.
그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생각해봐. 기병대원들은 괴수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웠고, 몇몇 대원들이 크게 다쳐서 사경을 헤매게 됐지. 그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그만큼 이 도시의 전력이 약해질 거야. 그리고 약해진 만큼…… 성막이 사라지는 날에 이 도시가 저 괴수에게 짓밟혀 멸망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그건…….”
“한데 댁은 말이야. 무려 신관장이 기병대원들의 치료를 허락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며 훼방을 놓으려 했어. 기병대원들의 아내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설마, 기병대원들이 치료를 받는 게 그렇게 고깝고 불만이었나? 이 도시의 전력이 보존되는 게 그렇게까지 싫었나? 그러니까 이 상황을 겪은 내 입장에선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거야. 저놈 저거, 일부러 이러나? 하고 말이지. 마치 의도적으로 개판을 치려는 것처럼 말이야.”
“궤변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아니라는 증거는?”
“……뭐?”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나?”
“…….”
부신관장이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엄청나게 당황한 걸까. 밟힌 채로 짓눌린 와중에도 놈의 눈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대놓고 보였다.
라키엘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결론을 내려줄게. 동네 사람드으을!”
“……!”
“이 신관, 아니, 이 작자가! 감히 신관의 법복을 입고서! 신성한 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서! 뒤로는 적과 내통을 하며! 이 도시의 사람들을 모조리 함락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들고 있었습니다아아!”
“……허엇?”
“그럼! 이 작자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아!”
“무, 무슨 짓을? 이, 이봐!”
부신관장이 필사적으로 다급하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가 일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예 발목까지 살짝 돌려가며 부신관장의 귓바퀴를 더욱 강하게 지르밟았다. 덕분에 부신관장은 일어나기는커녕 귓바퀴가 뭉개질 듯한 통증에 사로잡혀야 했다.
“끄…… 끄아아아악!”
너무나 아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까맣게 몰랐다. 자신의 귓가 주변 기혈의 흐름이 평소부터 별로 원활하지 못했고, 덕분에 남들보다 귓가의 경혈이 뭉쳐 있는 상태였으며, 그걸 일찌감치 알아본 라키엘이 일부러 귓바퀴를 돈가스 고기 다지듯이 집요하게 공략(?) 중이라는 사실을.
“보십시오, 여러분! 이 작자, 신관인 척하던 가짜입니다! 정말로 이 작자가 신관이라면! 일개 불신자인 저 따위의 핍박 정도는 신의 이름과 은총으로 손쉽게 극복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광경이 보이십니까아아!”
“그흐윽! 그가아아악!”
“제가 단순히 발만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기는커녕 정신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이게! 신관입니까아!”
“……!”
야 이 미친 작자야!
부신관장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기가 막혀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진심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지금 그따위 저열한 선동질이 이곳 사람들에게 먹혀들겠느냐고. 내가 신관이고 네놈이 불신자인데, 과연 그따위 얕은수가 통하겠느냐고.
두고 보자고.
후회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확신했다.
한데…….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불신자들의 황태자여!”
누군가가 힘차게 외쳤다.
대체, 누가?
감히, 누가?
부신관장은 놀람과 분노의 눈길을 간신히 돌려 외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금 외친 사람을 확인한 순간,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허, 허허허…… 허…….”
같은 신관이었다.
직위가 낮은 새파랗게 젊은 신관 하나가 이쪽을 손가락질하며 오히려 열성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저! 신관 필릭스가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와 다른 동료 신관들은 모두 가슴 깊은 곳에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우리가 소중한 신도의 아내와 가족을 이토록 핍박하고 몰아붙여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저 또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신관장님의 강압과 권위적 태도 때문에 차마 그러한 의문을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가 나서자 둘이, 셋이, 뒤이어 나머지 모든 신관들이 앞다투어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열성적으로 부신관장에 대한 비난에 열을 올렸다.
“불신자들의 황태자여,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불신자의 치료를 암암리에 허용해 왔고, 그러한 포용력이 우리의 신도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옳습니다! 대신 그 과정에서 생겨날 신의 노여움을 대신 감당하는 것이 신관의 합당한 의무이자 신도들을 위한 헌신이라 믿어왔습니다! 아마 그렇기에! 평소에 깐깐했던 신관장님도 불신자의 치료를 예외적으로 허락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신관장님만큼은 유달리 이번 사태를 맞이함에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이는 필시! 불신자들의 황태자의 말대로 부신관장이 괴수의 악독한 세력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는 바일 것입니다!”
“허허…… 허?”
부신관장은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깨닫고 말았다.
망했다고.
끝장이라고.
‘설마 이것들이…… 오늘의 화형식을 포함한 모든 일들을 내 독단적인 결정으로 몰아붙이고…… 그 책임을 내게 전부 떠넘기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유도한 이가 바로…….
“황태자! 감히! 세 치 혓바닥으로 이런 알량한 선동을……!”
“선동이든 뭐든 해야지, 지금 상황에선.”
“……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항의하려던 부신관장은 흠칫했다. 어느새 머리를 짓밟고 있던 발을 치우고는 몸을 낮춘 황태자. 그가 이쪽을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속닥이듯 툭, 건네어 왔다.
“생각해 봐. 성막이 걷히기까지 며칠도 남지 않았는데, 댁 같은 신관들 때문에 이 도시의 결속력이 개판이 나면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까 수습을 해야지. 욕받이 하나쯤 골로 보내는 일이 있더라도. 나머지는 살아야지. 안 그래?”
“……!”
“댁은 실수한 거야. 나름 신관장을 향한 충성을 보이고, 교단에 점수를 얻으려고 오늘 일을 꾸민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지켜야 할 선은 넘지 말아야 했던 거야. 불신자에게 치료받은 기병대원의 타락을 정화하겠답시고 가족인 아내를 산 채로 태워? 아들에게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노인의 얼굴을 채찍으로 후려쳐? 그거, 좀 미친 짓이라는 생각 안 들었어?”
“그, 그건…….”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우리 교단이! 당신을 그냥 둘 줄 아는 건가!”
“어. 그냥 둘 거야.”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젊은 신관들 입장에선 이 사태가 댁을 제끼고 직위를 올릴 기회라고 느끼고 있을걸? 사실 나도 알아. 저들도 댁과 한통속이었겠지. 댁의 권위적 태도 때문에 차마 의문을 표하지 못했다고? 그건 나도 안 믿어. 하지만 말이야. 저들도 상황을 파악한 거지.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인지를. 그러니까 지금은 댁을 제끼면서, 동시에 민심도 두둑하게 얻을 기회인 거지, 저들에겐. 손해 볼 일이 없는 거야. 안 그래?”
“그게…… 무슨…….”
“다행이야. 사실은 댁이 할머님을 후려치던 순간에 즉흥적으로 떠올린 큰 그림이었는데, 이렇게 실제로도 잘 그려져서. 이 동네 젊은 신관들이 눈치가 좋네. 줄타기랑 정치질도 제법 하는 거 같고. 덕분에 이렇게 타이밍 맞춰서 호응도 잘 해주고. 참 잘 키웠어.”
“…….”
“덕분에 댁만 교단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되겠지. 다행스럽게도 댁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곳 시민들이 교단에게 해코지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거고. 참 잘된 일이야. 그럼.”
툭툭.
할 말을 마친 라키엘이 부신관장의 어깨를 툭툭 짚어 주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자, 잠깐만……!”
부신관장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아직 할 말이 있다고. 억울하다고. 그러니까 내 말 좀…….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셨으면, 이만 기도소 지하실로 가셔야겠습니다.”
“……!”
젊은 신관들과 시민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순식간에 부신관장을 에워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