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15화 (414/468)

415화. 선동은 이렇게 (2)

“설마하니 황태자께서 그런 방식으로 광장의 분위기를 돌려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후욱.

하인의 손길에 따라 식탁 위의 촛불이 켜졌다. 작은 불빛들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무늬를 벽면에 아로새겼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말씀을.”

“그렇습니까.”

테니온 시의 시장, 브레다는 식탁 건너편의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문득, 아까 낮의 일들이 떠올랐다.

마침 아침 업무가 시작되려던 무렵이었던가. 기병대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보고를 올렸더랬다. 신관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광장에 마련한 화형대에 여인들을 묶어 올리고 있노라고.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심 짜증도 났다. 그렇잖아도 바쁜 자신이었다. 성막이 걷히는 날에 황태자의 작전을 실행하려면 준비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덕분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판국인데, 갑작스러운 소란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던 보고에 그는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충격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화형대에 매달린 여인들이 기도소에 누워 있는 기병대원들의 아내들인 것 같다고. 기병대원들이 불신자인 황태자의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에 불만을 지닌 신관들이 일을 저지르려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자신보다 한발 앞서 광장에 도착한 황태자가 부신관장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나서야 하나 싶었는데…….’

솔직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상대가 신관이기 때문이었다.

“…….”

사실 자신은 마음 깊이 신을 믿지는 않았다. 신의 믿음과 은총 아래 기도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도의 의무이자 보람이며, 기쁨이자 행복이라 여기지도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을 믿는 척만 하며 살아왔다. 이 나라는 그래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니까. 그래야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지 않을 테니 그저 그리하며 지내왔다.

그렇기에 신관을 향한 믿음도 딱히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정말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신성한 존재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정치적인 동반자이자 잠재적인 걸림돌이라 여겨왔을 뿐이었다.

이 도시의 물질을 지배하는 자가 자신이라면, 저들 신관은 시민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을 지배하는 이들이라고. 그러니 가급적 신관들과 척을 지지 말고 지내야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법이라고.

그렇게만 여기며 둥글게 지내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들이 제 수하인 기병대원의 가족을 건드렸지요. 사실은 제가 화를 내며 항의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빨랐죠.”

“예. 황태자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했다.

자신이 어떻게 나설 틈도 없이, 황태자가 움직여 버렸다. 부신관장의 채찍을 빼앗아, 그 채찍으로 부신관장의 얼굴을 후려치고, 심지어 짓밟기까지 했다!

당시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염려도 되었다.

시민들의 반응이 어떨지, 나머지 신관들이 가만히 있을지, 수습하지 못할 파국이 닥치는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성막이 걷히기 전까지 작전 준비는커녕 싸울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별별 걱정이 다 들었는데…….

“제가 품었던 걱정들이 모두 기우에 불과했지요.”

설마하니 부신관장을 적과 내통한 첩자로 몰아가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줄은 몰랐다. 뻔뻔했다. 상당히 뻔뻔했다. 그런데 그 뻔뻔함이 통했다!

“뜻밖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겁니까?”

시장은 포크를 들며 물었다.

라키엘이 고기를 썰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한 겁니다.”

“그냥……이라니요?”

“말 그대로 그냥입니다. 순간 떠오르더라구요. 당시의 상황, 주변의 분위기, 앞으로 예상되는 반응들, 뭐 그런 것들을 차례대로 고려해 보니까 저절로, 네, 뭐.”

사실이었다.

그냥 떠올랐다. 그리고 저질렀다. 결과적으로 즉흥적인 꼼수가 통했고, 부신관장은 첩자의 혐의를 쓰고서 기도소 지하에 투옥되었으며, 낮의 화형식 미수 사건 자체도 부신관장의 독단적인 폭주였던 것으로 대강 무마가 되었다.

라키엘이 말했다.

“덕분에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신관장마저도 이제는 기도소에서의 제 치료를 용인한다며 대외적으로 발언하게 됐지요. 뭐, 괜히 계속 뻗대다간 부신관장과 한통속으로 내몰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만 말입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시장 브레다는 내심 감탄했다.

신관장.

그는 자신도 좀처럼 어떻게 제어할 수 없던 상대였다.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시장인 자신과 지위가 동급이었다. 게다가 너무나 깐깐한 교리지상주의자인 탓에, 제대로 된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한데 황태자는 고작 한 달도 되지 않는 사이에 그런 신관장마저 무릎을 꿇려 버렸다.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런 역량을 지닌 자가 마젠타노의 황제가 된다면…….’

우리 하르미온의 미래가 그만큼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먼 훗날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시장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넌지시 날아온 라키엘의 질문이 시장의 등골을 재차 서늘하게 하였다.

“어쨌거나 말입니다, 시장님? 작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어? 제가 예쁘지도 않은 시장님과 굳이 마주 보며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

“설마 오늘 낮의 일을 두고서 무용담이나 나누자고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시던 건 아니겠지요?”

“아, 그건…….”

“흐음? 대답이 바로바로 안 나오시는 걸 보니까, 설마아?”

“아닙니다. 준비는 원활하게 잘 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시자면요?”

“어, 그건…….”

“항목별로 따박따박 나눠서 보고를 진행해 보실까요?”

“아니, 그건…….”

“얼버무리시진 말고요.”

“일단 개방할 성문에서부터 주석 광산 입구까지 놈을 유인할 대로의 정비는 거의 마쳤습니다.”

“흐음, 좋아요. 그럼 광산 내부의 갱도 확장은요?”

“그것도 물론…….”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뻘뻘 흘리는 시장. 그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 내가 왜 이렇듯 진땀을 흘리고 있어야 하는가. 어째서 황태자의, 아니, 이웃 나라 황족에 불과한 이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것인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입에선 대답이 계속 술술 흘러나왔다. 그래서 더 기이하고, 의아하고, 한편으로는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군주의 재목을 발견한, 그런데 그 군주의 재목이 이웃 나라의 황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에서 오는, 그러한 안타까움의 감정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휘우우우……!

이곳 국경의 삭풍은 유달리 오싹하다. 별로 추운 것 같지는 않은데, 은근히 맞는 이의 몸을 으슬으슬 떨리게 만든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크으…… 그극…….”

한때 왕위를 노렸던 앙부아즈의 야심가.

그러나 이제는 몰락해 버린 왕족.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어깨를 웅크렸다. 추웠다. 오한이 몰려왔다. 소름이 돋았다. 그럴수록 옷깃을 꽉 여몄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두툼한 외투로 몸을 감싸도. 소드마스터만이 이룰 수 있는 마나의 무한한 순환을 발동하여도. 그럼에도 까닭 모를 식은땀이 계속해서 줄줄 흘러나왔다. 동시에 속이 메슥거리고, 부자연스러운 현기증이 수시로 엄습하였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른 걸까. 설마 지독한 감기인 걸까.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자신의 강건한 육신은 한낱 감기 따위에 이렇듯 시달릴 까닭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짐작되는 바는 하나.

‘저것 때문에?’

쟈빌론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흐릿해진 시선을 던졌다. 성벽. 도시가 보였다. 무엇인지 모를 희뿌연 막으로 감싸인 도시였다.

그걸 보자 생각이 났다.

그래.

저 안에 리한 군의관이 있어. 나는 그를 미행하며 여기까지 왔지. 그러다가 리한 군의관과 일행이 어마어마한 괴수와 다투며 쫓기는 모습까지 보았고.

“…….”

저 괴수 때문인 걸까, 내 증상은.

마치 본드래곤을 1/10로 줄여놓은 듯한 기이한 외양. 가까이에 있는 수풀을 서슴없이 말라 죽게 만들어 버리는 존재.

사실은 저 괴수에게 다가가려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리한 군의관과 일행이 저 도시의 성벽 안으로 숨어들고, 희뿌연 막이 성벽을 감싸며 외부로부터의 모든 접근을 차단했던 날의 밤이었다.

본드래곤을 닮은 기이한 괴수에게 흥미가 생겨났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엿보기도 하였다. 어쩌면, 저 괴수를 길들이면 리한 군의관을 사로잡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접근했다.

그리고 포기했다.

300미터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간 순간이었던가. 돌연하고도 섬뜩한 감각이 엄습하여 왔더랬다. 살기? 아니. 살기라는 말은 사치고, 애교에 불과할 터였다. 그건 자신이 평생 겪어왔던 그 어떤 섬뜩한 예기보다도 훨씬 날카롭고, 파괴적이며, 불길한 기운이었다.

하여 황급히 물러났다.

그날부터였다.

괴수로부터 거리를 한참 벌려둔 채, 기회를 노리며 기다렸다.

‘리한 군의관…….’

기다리면 기회가 올 것이다. 도시를 감싼 희뿌연 막은 언젠가는 걷힐 테니까. 식량 때문이든, 식수 때문이든, 그 외의 물자 때문이든, 길어봤자 석 달 이상의 봉쇄는 불가능할 테니까.

저 막이 걷히는 날에 기회가 생기리라. 괴수가 도시로 쳐들어가고, 도시가 혼란에 빠지는 순간 자신에게도 리한 군의관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겨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쩌다가…… 쿨룩! 쿡!”

며칠 전부터였다. 슬슬 몸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괜히 피로하고, 속이 살짝 거북하게 느껴졌다. 급기야 오늘 아침부터는 고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힘이 빠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이 들판 구석에서 때를 기다리기만 하였는데. 리한 군의관을 미행하며 황도에서부터 이곳 국경, 더 나아가 하르미온의 영토까지 들어오던 때보다 훨씬 푹 쉬었는데. 하다못해 전투를 치르거나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어째서 이런 꼬락서니가 된 걸까.

“쿨럭! 쿨룩! 나, 나는…… 그으흑……!”

일어나야 한다.

리한 군의관을 다시 내 곁에 두어야 한다. 평생 내 두통을 치료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후에 다시 앙부아즈로 돌아가 가증스러운 국왕과 왕녀의 골통을 깨부수고 왕위를 찬탈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그런데…….

“……쿠어억!”

기침이 나오다 못해 속이 뒤집혔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토했다. 다 토하고 보니 앞섶이며 두 손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피. 검게 죽은 피였다.

“하…… 하하.”

뭐지 대체.

쟈빌론은 어처구니가 없어진 눈길로 그저 웃어 버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쓰러졌다. 풀썩. 이름도 모를 갈대와 수풀 속으로 파묻히듯이.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라도 될 것인 양 무력하게.

‘미친.’

이런 식으로 끝장이 나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아닌데.

쟈빌론은 억울한 심정을 담아서 두 눈을 부릅떴다.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한번 쓰러진 몸을 일으키는 것이 그 언젠가 리한 군의관을 사로잡으려 애를 썼던 때보다도 더욱 힘겹게 느껴졌다.

억울했다.

두려웠다.

이렇게 끝장나고 싶진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이었다.

“누우우……?”

“꾸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꼭 미노타우로스의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뒤덮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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