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희생이라는 이름의 오해 (2)
“어오 샹. 이래서 갑옷까지 잽싸게 다 갈아입든가, 아니면 갑옷 디자인을 처음부터 통일했어야 했던 건데!”
라키엘은 진심으로 자신의 오늘의 운세를 원망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결국엔 자신이 이렇듯 본드래곤 앞에까지 나서게 되어서? 이렇듯 미끼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어서?
그것 또한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이렇게 나설 생각이 미립자만큼도 없었다. 아니, 더 사실 그는 지금 ‘열심히 도주하던’ 중이었다.
‘애초에 이쪽 골목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
문득, 3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시장이 감시탑 아래로 뛰어 내려간 직후였다. 자신도 시장을 따라 샤샤샥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투구를 바꾸어서 쓴 시장의 모습. 그 모습에 반응하는 본드래곤이 보였다.
비장한 몸짓으로 도망가는 시장과, 그 미끼를 덥석 물려고 따라가는 본드래곤의 모습까지 전부 확인했다.
그 후에야 밖으로 나왔다. 시장이 도망쳤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뛰었다.
그 와중에 나름의 잔머리도 야물딱지게 굴렸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을 골목만 골라서 움직였다. 물론 목표는 성문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가지의 뒷골목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곳곳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길이 더 헷갈렸다. 그러다가 이쪽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한데 그 직후였던가.
저 멀리서 들리던 방사능 본드래곤의 괴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당황스러웠다.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포효성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급기야 담 너머에서 들려왔다.
쌔한 예감이 풀충전 되었다. 그 순간, 뭔가가 담벼락으로 날아와서 충돌했다. 덕분에 담벼락이 우수수 무너졌다.
그리고 따란.
이렇듯 본드래곤 앞에 적나라한(?) 모습을 선보이게 되었다.
‘어오, 내 팔자가 이렇지!’
뭘 해도 안 된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한국에서도 주구장창 배배 꼬이기만 했던 인생이었다.
간신히 한의사가 되어서 인생 좀 풀리나 했는데 또 코로나 크리티컬을 맞으며 꼬였다. 여기로 와서도 그랬다. 황족이 되었나 싶었는데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을 지경.
오늘도 역시나 마찬가지이리라.
‘그래. 처음부터 이럴 운명이었던 거야. 내가 무사히 도시 밖으로 탈출? 무사고 300일쯤 달성하면서 황도로 귀국? 그게 바로 개뿔에 초장 발라먹는 소리지, 아주.’
생각할수록 억울함에 또르르 흘러나오는 한 떨기 눈물!
하지만 다행히(?) 차폐용 투구를 눌러쓰고 있기에 촉촉해진 눈가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한껏 쫄아 버린 표정 또한 내보여지지 않았다. 덕분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한 열렬한 오해의 도가니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특히, 시장이 그랬다.
“화…… 황태자…… 당신?”
시장 브레다의 말끝이 저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런 위협 앞에, 황태자가 정말로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신은…… 그저 타국의 황족일 뿐인데…… 어째서…….”
이렇듯 모든 것을 짊어질 듯이 나선 것인가. 서슴없이 다가올 수도 있을 죽음 앞에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인가.
그저 타국의 도시를 위해. 이런 도시의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은, 아니, 그대는 그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접어두고서 크나큰 희생을 감수할 생각이란 말인가.
‘정녕코…….’
이런 자는 보지 못했다.
존재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제국 마젠타노의 국경 도시를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할 상황이 된다면, 돌아올 수 없을 함정으로의 미끼 역할을 자처해야 할 상황이라면…… 과연 저렇듯 당당하고 의연하게 나설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시장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 어떤 거대한 용기를 품는다 한들 이렇게는 못 한다고.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는 거라고. 그런데…… 이 사람은 이걸 기꺼이 해내고 있노라고.
하여…… 존경스럽다고.
“물러나시지요, 시장님. 이미 미끼가 저로 바뀐 것 같으니.”
“……!”
어떻게 당신은 목소리의 끝자락마저 떨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시장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다. 라키엘도 울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감동은 1그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오, 떨린다. 떨려!’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기분은 오늘내일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살면서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었을까.
아, 딱 한 번 있던 것 같다. 전역하기 전날 밤. 수없이 뒤척였던 그날 밤이 너무나 무서웠다.
가족이라곤 아무도 없는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까. 나는 뭘 해야 할까. 막막해서 두려웠다. 막연해서 더 무서웠다.
그런데 지금이 딱 그때만큼 무서웠다.
이쪽을 알아봐 버린 본드래곤. 불타고 남은 새하얀 나뭇가지처럼 생긴 뼈대. 숨 막히는 열기로 일렁거리는 놈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웃는 것만 같아서. 한데 그 웃음이 날 향한 것이리란 생각에. 소름이 주욱 돋았다.
‘젠장. 젠장!’
더는 못 버티겠다.
그나마 전신을 뒤덮은 차폐갑옷이 이쪽의 두려움을 밖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몸을 돌렸다. 전력으로 뛰었다.
그게 신호가 된 것일까.
- 쓰카하아아아악!
돌연하게 마주친 이쪽의 모습에 멈칫하며 웃는 듯하던 본드래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땅을 박차고 돌진해 왔다.
바로 앞에 있는 시장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오직 이쪽만을 노리고서.
쿠콰콰콱-!
“어오, 미친!”
골목 반대편으로 달렸다. 뒤에서 실시간으로 박살 나는 울타리 파편이 마구잡이로 날아왔다.
파편이 갑옷 등판을 뚱뚜당땅 때리는 맑고 고운 소리를 들으며 골목 모퉁이의 집 문을 열었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본드래곤도 뒤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물론 노크 따위는 생략한 채였다.
콰드드득!
놈의 거대한 머리와 상체가 현관과 거실을 박살 냈다. 물론 그때쯤엔 이쪽은 거실 건너편 뒷문으로 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하!”
나란히 달리며 데미안이 외쳤다.
“제가! 뒤를 막아서 놈을 저지하겠습니다!”
“안 돼!”
뒷마당 울타리를 단숨에 뛰어넘으며 빼액 외쳤다.
“혈당! 지금 쓰지 마!”
지금은 아니다.
아껴두어야 한다.
왜냐고.
지금 써보았자 저 괴물 같은 놈을 따돌릴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놈이 타격이야 입겠지만, 그건 일시적인 것뿐일 테니까.
“어차피 여긴 놈에겐 개활지나 똑같아. 그런 식으론 아무리 잠깐씩 놈을 저지해도 결국엔 따라잡혀! 설령 그 틈에 숨는다 해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야!”
“어째서입니까?”
“놈이 날 찾으려고 시가지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질 테니까!”
그러면 이 도시는 멸망한다. 화재와 방사선 샤워를 온몸으로 맞게 될 것이다. 비록 시민들이 대피소에 피신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놈의 마수가 거기까지도 닿을 테니까.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겠지.
지금까지 국경에서 봤던 수많은 참사처럼.
그토록 끔찍했던 무수한 죽음처럼.
“…….”
그건 싫다.
눈을 감아도 망막에 들러붙은 듯, 눈꺼풀에 매달려 버린 듯 그 모습들이 떠오르는 요즘이었다. 사실은 거의 매일 식은땀에 절어서 깨어나는 요즘이었다.
온몸이 불타면서도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죽은 어머니. 그 품속에서 숨이 끊긴 아기.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대로 굳은 몸짓들. 표정. 흔적만 남은 손가락. 한때는 가족에게 입 맞추었을, 불타 사라져 버린 입술.
그런데 이 도시도 그렇게 된다니. 그건 싫었다. 본드래곤 때문에 무섭고 다리가 떨리는 것과는 별개로, 곧 다가올 파국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눈 감고 모른 체한다면…….
‘어오 샹. 이놈의 한국인 근성!’
결국, 나도 도로에 물건 쏟아진 걸 못 지나치고 다 같이 주워주고 나서야 갈 길 가는 한국인인 걸까. 국뽕이냐고. 그렇게 욕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사실인 걸 어떡하나. 혼자만 숨는다는 선택지는 이제 더는 못 택하겠는걸.
‘차라리 시장이 계속 미끼가 되어주는 거면 딱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마음 편하게 이쪽 일행만 데리고서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미끼 역할, 이쪽이 거부하려 해도 환불(?) 불가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아껴! 너 아직 멀티마나 하트, 두 개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아꼈다가 나중에 써!”
“나중이라니, 언제 말입니까.”
“광산 안에서!”
“설마…….”
“설마고 자시고, 얼른 이리로!”
투구 안에서 경악의 눈을 부릅뜨고 있을 데미안 녀석을 이끌었다. 어느 담벼락 아래에 쌓인 상자 더미가 보였다.
밟으며 뛰어 올라갔다. 박찼다. 어느 집 2층 발코니 창을 부수며 뛰어들어갔다.
- 쓰하아아악!
쿠콰과곽!
거의 간발의 차이로 놈의 머리통과 상반신이 발코니를 부수며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놈의 앞발은 이쪽에 닿지 못했다.
놈의 체중을 버티지 못한 2층 바닥이 허물어지며 놈의 몸도 함께 아래로 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무너지는 2층 바닥을 절묘하게 밟으며 복도를 뛰었다. 복도 끝방의 창문 밖, 난간을 밟고서 힘껏 도약했다.
투확!
용천혈의 써클을 폭발시켰다. 데미안도 나란히 도약했다. 창문 밖 골목 건너편 이층집의 지붕 위로 내려섰다. 그리고 달렸다.
지붕을 따라 달리고, 뛰어서 건너며, 평지에서와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
- 쓰카하아악!
자신의 몸 위로 쏟아진 집의 잔해를 털어내며 포효하는 본드래곤의 괴성. 놈이 앞을 가로막는 집들을 뭉개며 달려오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거리가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지붕을 건너뛰며 거침없이 달리는 이쪽과 달리,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놈에게 제약이 가해진 까닭이었다.
“좋아. 이젠 저쪽으로!”
지붕 위를 달리니 한 가지의 이점이 더 생겼다. 골목을 달리던 때와 달리 시야가 트였다. 덕분에 어디로 가야 할지가 보였다.
거대한 수직의 절벽을 병풍처럼 등지고 있는 도시의 안쪽. 도시와 절벽이 맞닿아 있는 지점. 그곳에 있을 주석 광산 출입구를 향해서였다.
“달려!”
- 쓰하아악!
이쪽이 먼저일까.
그 전에 저놈이 우릴 따라잡을까.
계산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광산까지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호흡이 거칠어졌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이쪽을 향한 함성 또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와아아아-!”
예비대 병사들인가.
달리면서 얼핏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이 이쪽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서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저마다 흥분한 몸짓들. 몇몇은 차폐형 투구 속을 적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걸까.
아마 오해 때문인 거겠지.
이쪽이 의연하게 나서서 미끼가 되어준 거라고. 타국의 황태자가 자신들을 위해 아무런 이득도 없을 희생을 감수해 주는 거라고. 단단하게 오해한 까닭이겠지.
‘하. 진짜. 그렇게 대놓고 감동 받을 거면 아예 도시 통째로 우리 제국에 전향하겠다고 선언이라도 해주든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웃음이 나왔다.
사실은 웃을 틈도 없었다.
- 쓰카하아아아악!
골목길 위를 내달리며 벌렸던 거리가, 대로에 접어들며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광산 입구와의 거리도 함께 줄었다. 더. 조금만. 더. 달리면. 이제. 곧.
“으아아아아!”
라키엘이 젖 먹던 힘까지 내어가며 박차를 가했다. 데미안이 주군의 멱살을 잡아끌듯이 당기며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둘이 함께 광산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 직후, 포효하며 달려온 본드래곤도 입구를 반쯤 뭉개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콰드득!
파괴의 굉음.
그리고 돌연 찾아온 고요.
연신 포효하며 내달리던 괴수가 광산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내 혼돈의 도가니였던 시가지가 갑작스럽게 조용해졌다. 그 순간, 모두는 실감했고 깨달았다.
정말로 타국의 황태자가 이 도시를 위해 위대한 희생을 자처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의연히 나서서, 두려움 없이 절망적 위협에 맞서고 있음을.
“흐, 흐흑…… 흑!”
형언할 수 없을 감동과 함께 저마다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한편으로는 격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저런 황태자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그곳의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고. 어쩌면, 정말로, 좋을 수도 있겠노라고.
‘그러니까…… 제발 무사해 주세요, 위대한 황태자시여.’
모두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되뇌는 소망 한 모금. 그렇듯 예비대의 병사들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황태자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였다.
그리고 멀찍한 곳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한 남자 또한, 라키엘이 광산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타까움의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리한 군의과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