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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20화 (419/468)

420화. 내달리다 쓰러져도 (1)

“안 돼! 리한 군의과아안!”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침. 광산 입구 안쪽으로 라키엘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그 뒤를 쫓아간 본드래곤의 모습마저 광산 너머로 사라진 순간, 먼발치의 성벽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쟈빌론은 다급한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켜본 본드래곤, 저 괴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존재였다.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강자임을 자부하는 자신조차 저걸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별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는데도, 근방에 며칠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도 거의 죽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우루스 공과 꾸꾸 공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저 벌판에 널브러진 차가운 주검이 되어 썩어가고 있었겠지.’

……꽈악.

쟈빌론은 무의식중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은 죽어가고 있었다. 기침이 나오다 못해 속이 뒤집히고, 힘이 빠져 쓰러진 채로 정신없이 무언가를 토했다. 다 토하고 보니 시커멓게 죽은 피가 앞섶이며 손바닥을 잔뜩 적시고 있었더랬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던가.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막막했고, 억울했다. 길지도 않은 인생이었지만, 원했던 그 무엇 하나 이루어내지 못하고서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들판에서 쓸쓸히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까닭 모를 서러움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대로 끝장나고 싶지 않았다.

한데 그때였던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울음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커다란 그림자가 쿵쿵, 자신을 향해 다가왔더랬다. 엄청난 덩치의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그 어깨에 앉아 있던 아피로스 여왕벌 애벌레와 환상종 두 마리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헛것을 본 건가 싶었다. 당연했다. 미노타우로스와 애벌레와 환상종이 무리를 이룬 조합이라니.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시각이 미쳐서 환영을 보여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엄연한 실제였고, 진짜였다. 자신을 가뿐하고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던 미노타우로스의 손길이 그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팔뚝을 타고서 꼬물꼬물 다가오던 아피로스 애벌레와 환상종들이 그러했다.

녀석들이 자신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어보고, 볼을 꾹꾹 눌러보고, 입술을 붸에에 당겨보며, 눈꺼풀을 야물딱지게 쪼물딱거려 임시(?) 쌍꺼풀을 만들어주던 모습이 그러했다.

덕분에 당시의 자신은 짓씹듯이 투덜거렸던가.

다 꺼지라고.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그랬더니 녀석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두 환상종이 뜻 모를, 의미심장해 보이는 미소를 씨익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을 잡고 강제로 벌렸다. 입 앞으로 아피로스 애벌레가 꼬물거리며 다가왔다.

하여 자신이 또 외쳤던가.

웁웁, 우웁, 웁, 이라고.

그 외침에 돌아온 아피로스 애벌레의 대답은 ‘퉤!’였다.

“…….”

쟈빌론은 잠깐 되새겨보던 상념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당시는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아피로스 애벌레가 뱉은 침이 입안으로 들어오던 감각은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그런데 맛있었다. 이런 말을 하자면 조금 부끄럽고 민망하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맛있고 향긋했다.

마치 온몸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날 이후로 몇 날 며칠 동안 미노타우로스와 환상종들에게 간호를 받았다. 아피로스 애벌레는 아침 점심 저녁마다 침을 뱉어 주었다. 그 모습으로 보아 한두 번 뱉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덕분에 놀랍게도 자신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절망적으로 망가지던 몸이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그걸 느끼자마자 마나하트를 총동원하며 무한한 마나의 순환을 일으켰다.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발휘할 수 있는 권능에 가까운 마나의 기예. 그 덕분에 회복이 비약적으로 촉진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나마 평소의 절반 정도의 힘으로 움직일 정도까지 컨디션이 올라오게 되었다.

하여 자신하고 있었는데…….

오늘, 도시를 감싸던 희뿌연 막이 걷히는 걸 보며 리한 군의관을 성공적으로 납치하리라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쯧!”

쟈빌론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꼬슴 공, 뽀복 공, 그대들은 기어코 내가 저 위험 속으로 몸을 던져 리한 군의관을 빼내 오길 바라는 거요?”

“꼬슴! 꼬!”

“뽀복! 뽀!”

어깨에 올라타 있던 두 환상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쟈빌론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처음 환상종을 보았던 때는 사경을 헤매던 터라 그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들이 리한 군의관, 아니, 황태자 라키엘이 부리는 환상종이라는 사실을. 우루스라 불리는 미노타우로스도, 꾸꾸라는 이름의 아피로스 애벌레도 모두 리한 군의관의 추종자들임을.

그동안 제법 오래 리한 군의관의 주변을 배회하며, 먼발치에서 꾸준한 관찰을 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나를 구한 것에는 아마도, 내가 리한 군의관에게 필히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그쪽의 조언 덕도 있었겠지. 맞나?”

쟈빌론이 한결 짙어진 쓴웃음으로 어깨 건너편, 몇 발짝 더 떨어진 곳을 향해 물었다. 그곳에 몸을 낮게 웅크리고서 광산 입구를 관찰하는 사내가 있었다. 평범한 복장과 인상, 눈매마저 서글서글하여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듯한 느낌의 사내였다.

사내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 사실만큼은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3호 요원의 자격을 걸고 보증하지요. 이번 일에 있어 당신이 결정적인 공적을 세운다면, 황실과 폐하께서 당신의 사면에 대해 진중한 고려를 시작할 것임 또한 말입니다.”

“사면이라. 개소리.”

3호 요원의 대답을 들은 쟈빌론이 사납게 웃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3호 요원의 목을 칠 듯이 살벌한 눈빛을 번득이며 쏘아붙였다.

“어차피 첩자질이나 하듯 리한 군의관 근처를 뱅뱅 맴돌다가 나처럼 사경을 헤맸던 주제에.”

“…….”

“꾸꾸 공의 치료가 없었으면 댁도 이미 시체 나부랭이가 됐을 텐데. 그런데 그 와중에 황가로부터 그런 거창한 보증을 받았을 리가 없잖나.”

“있습니다. 이미 비상연락을 보냈습니다.”

“하. 그런다고 내가 기뻐할까.”

“사면을 받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나더러 마젠타노의 개가 되라고?”

“…….”

“웃기는 소리. 계속 허튼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꺼져 버려. 사지를 찢어 버리기 전에.”

“하지만…….”

“닥쳐라. 그쪽의 부탁 따위를 받지 않아도 리한 군의관은 구하러 달려갈 생각이었으니까.”

쟈빌론은 성벽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여기서 떠들기나 할 때가 아니다. 움직여야 할 때다. 자칫 더 늑장을 부리다간 리한 군의관을 영영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선은, 저놈이 걸친 저 갑옷.’

쟈빌론의 시선이 시가지의 골목 한쪽을 날카롭게 찌르듯 짚었다. 그곳에 여전히 기절한 채 쓰러진 그레노 경이 있었다.

그레노 경이 걸친 투박한 디자인의 갑옷. 그걸 보니 짐작이 되었다. 오늘, 본드래곤과 가장 가까이에서 움직인 이들이 다들 저런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확실하다. 저 갑옷에 본드래곤의 불가사의한 파괴적 힘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는 것이리라.

‘저것부터 좀 빌려 볼까.’

……타앗!

강압적으로, 무상으로, 영원히 빌리기.

인류가 그걸 ‘강탈’이라 부르기로 정한 행위를 실행하기 위하여, 쟈빌론이 성벽에서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투칵-!

“후욱!”

거칠게 착지하며 라키엘이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차폐갑옷은 이게 문제다. 너무 무거워서, 어딘가로 도약했다가 착지할 때마다 전신이 아래로 짜부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키가 1~2센티쯤은 줄어들었을지도.

‘……라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투확!

그는 땅을 박찼다.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그 직후,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후욱 몰아쳤다.

쿠화아아아악-!

마치 뒤통수 옆 30센티 지점으로 KTX 열차가 풀악셀을 밟으며 콰콰콰 지나가는 듯한 기분! 아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 감각은 엄연한 실제였고, 실화였으며, 팩트였다. 본드래곤의 엄청난 앞발이 바로 뒤를 스치듯 공간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와아아악!’

비틀, 뒤에서부터 몰아닥친 풍압 때문에 일순간 균형을 잃었다. 앞으로 떠밀리듯 고꾸라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완전히 넘어지기 직전에 뻗어온 손길이 겨드랑이 아래를 단단히 받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데미안 녀석이 외쳤다.

녀석 덕분에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다. 한편으로는 묘한 억울함을 느끼며 빼액 마주 외쳤다.

“정신은! 잘 차리고 있거든!”

하지만 사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앞이…… 잘 안 보여!’

광산 내부는 너무 어두웠다. 갱도 곳곳에 희미한 빛을 발하는 마력석을 박아 두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차폐갑옷 특유의 투구와 특수경 때문이었다.

‘차라리 맨눈이었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머리 전체를 뒤덮는 투구, 거기에 안구의 피폭을 막기 위한 특수경까지 쓰고 있다 보니, 시야가 너무나 제한되고 있었다. 심지어 날뛰며 추격해 오는 본드래곤 때문에 갱도 전체에 흙먼지가 휘날리기까지 했다.

이건 그야말로 정전이 터진 서울 고속터미널역 지하도 안에서 썬글라스를 3겹으로 쓴 채 연막탄 속을 내달리며 약속장소(?)인 3번 출구를 찾아 헤매는 듯한 기분!

‘……이 말이 되는 거냐고!’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 아니, 해야 한다. 못하면 죽을 거니까. 라키엘은 생애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눈을 부릅뜬 채 내달렸다.

물론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희망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저기…… 저쪽 모퉁이만 돌면 중간 함정이 있었지, 아마!’

라키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의 작전을 준비하던 30일의 기간. 그동안 시장에게 준비 진행에 대한 브리핑을 거의 매일 들었더랬다. 몇 번은 직접 광산 갱도로 내려와 살펴보기도 했다.

덕분에 막장까지 달려가는 경로와, 곳곳에 설치된 자잘한 함정과 장치들의 위치를 모두 기억해낼 수 있었다.

‘미끼가 그냥 도망만 쳐서는 저놈한테 반드시 잡힐 거니까!’

그렇기에 미끼의 도주를 돕고, 반대로 본드래곤의 추격을 방해할 함정과 기관 장치들을 제법 설치했더랬다. 그중의 제일 첫 번째 함정이 저쪽 모퉁이 너머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쪽!’

타닷!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몸을 날렸다. 뒤에서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굉음. 본드래곤이 바로 뒤에까지 따라온 걸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모퉁이 너머를 향해 바닥을 박찼다. 손을 뻗었다. 기억 속의 벽면. 그곳의 레버가 잡혔다.

‘이거나 받아라!’

덜컥?

그런데 레버가 내려가지 않았다. 뭔가에 걸린 듯. 혹은 뜻밖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어?’

왜 이러지?

당황스러웠다. 체중을 실어서 다시 눌렀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있긴 했다. 확실히.

뚝!

레버가 부러져 버렸다.

“……롸?”

이거, 실화인가.

믿기지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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