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내달리다 쓰러져도 (2)
뚝!
레버가 부러져 버렸다.
“……롸?”
이거, 실화인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불합리하게만 느껴졌다. 보통 이런 긴박한 순간에 극적으로 함정 발동에 성공하고, 뭐 그렇게 그림 같은 전개로 위기를 넘기고 하는 게 보통의 액션 아닌가. 아니. 그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그러던 거였던가.
‘역시 현실이란!’
하드코어한 시궁창이다.
그러한 진리(?)를 체감하던 순간이었다.
- 쓰카하아악!
“……!”
모퉁이 너머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후욱 모습을 드러내며 튀어나왔다. 본드래곤이었다. 오늘의 원활한 유인을 위해 넓혀 놓은 갱도임에도 놈에겐 좁은 것인지, 모퉁이 일부의 벽면이 통째로 박살이 나기까지 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미적거리면 죽는다고.
‘젠장!’
재빨리 몸을 낮추며 먼 곳의 벽을 향해 레버를 던졌다. 자욱한 흙먼지 때문인지, 덕분에 이쪽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했던 건지, 놈의 시선이 레버가 날아가 부딪친 쪽으로 움직였다. 그 틈에 바퀴벌레처럼 샤샤샥 움직였다.
기억 속 두 번째 기관 장치를 향해서였다.
그동안 오장육부들도 난리가 나 있었다.
딩동!
[예상 밖의 함정 불발 사태에 오장육부가 멸망의 예감으로 쑴펑쑴펑 빠져듭니다!]
[심장 : 이 상황…… 실화?]
[허파 : 허허허…… 파하핳……ㅋㅋㅋ]
[대장 : 아니 이럴 때는 극적으로 함정 발동에 성공하면서 적에게 한 방 먹이고 해야 정상적인 전개 아닙니까?]
[간장 : 어이, 그런 건 나약한 클리셰 덩어리다.]
[위장 : 아 클리셰 무시하려고 사람 갈아 넣는 게 말이 되냐고ㅋㅋㅋ]
[콩팥 : 그나저나 레버 상태 왜 저럼?]
[비장 : 저 레버 문과가 만들었대!]
[방광 : 미쳤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화이팅과 생존을 기원하며 3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7,100]
“…….”
눈물은 함부로 흘리지 말자. 그래 봤자 특수경 안쪽에 습기만 차서 시야가 더 나빠질 뿐이니까.
“전하.”
자욱한 흙먼지 속을 포복하듯 기어가는 와중이었다. 눈치 빠르게 옆으로 다가온 데미안이 속닥여 왔다.
“제가 놈을 유인하겠습니다.”
“응 무리야.”
“지금은 가능할 겁니다.”
“흙먼지 때문에 실루엣만 보일 거니까?”
“예. 바로 그겁니다. 지금이라면 저놈은 전하와 저를 구분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도 안 돼.”
“어째서입니까.”
“무섭거든.”
“예?”
“네가 유인을 하려면 나 혼자 남아야 하잖아.”
“설마.”
“혼자 남는 거 무서워. 가지 마.”
“…….”
“왜?”
“너무 솔직하신 거 같아서요.”
“인간적으로 무서운 게 당연한 거 아냐?”
라키엘은 바퀴벌레 포복을 힘껏 이어가며 데미안 쪽을 돌아보았다. 무섭다. 지금도 무섭다. 그런데 데미안과 떨어져서 혼자 남으면? 그게 더 무섭다. 빠져나갈 길도 보이지 않는 갱도. 그 속에서 방사선을 뿜어내는 괴수가 이쪽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
솔직히 정신병 걸릴 것 같았다. 조금만 긴장이 풀려도 멘탈이 나갈 것 같았다. 그 또한 당연했다. 살면서 이런 일을 겪을 거라는 생각을 누가 해 볼까. 아니, 겪고 싶은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러니까…….
“잡담 타임은 여기까지. 뛰어.”
어느새 흙먼지가 제법 걷혀 있었다. 그동안 본드래곤은 전혀 날뛰지 않았다. 놈도 자신이 일으킨 흙먼지가 이쪽의 도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곧 이쪽의 모습이 포착될 거다.
그리고…….
- 싸크하아아악!
역시나 놈이 포효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순간, 데미안과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바퀴벌레 포복으로 기어오며 벌려둔 거리, 약 15미터. 그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자 필사적으로 땅을 박찼다.
“저쪽 갱도!”
기억 속 지형을 되짚으며 외쳤다.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갔다. 과연 갈림길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깔린 레일과 철수레가 보였다. 채굴한 주석을 실어나르는 용도의 수레. 하지만 오늘은 저 수레가 우리의 람보르x니가 되어줄 것이다.
“승객 여러분! 안전벨트 매셨습니까!”
“제동기나 푸십시오 전하!”
끼릭!
데미안의 재촉을 들으며 브레이크 레버를 밀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레버가 부러지지 않았다. 제동기가 풀리며 철수레가 스르륵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철수레 뒤쪽을 힘껏 밀며 달렸다.
“더! 빨리!”
“그아아아악!”
가속이 붙었다. 뒤에서는 데미안이 괴성을 지르고, 더 뒤쪽에서는 그런 데미안을 채찍질하듯 본드래곤도 괴성을 내질렀다.
“지금! 타! 얼른!”
뒤로 손을 뻗었다. 데미안 녀석이 훌쩍 뛰었다. 녀석의 두 발이 수레 뒤편에 매달리듯 두둥실 떴다. 녀석을 향해 마주 손을 뻗어왔다. 맞잡았다. 당겼다.
콰당탕!
“끄엑!”
간신히 철수레 안쪽으로 추락하듯 떨어진 녀석……에게 깔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조종간! 얼른 잡으십시오!”
“……보통 그런 대사는 사람 깔아뭉갠 놈이 말하는 게 아니지 않냐!”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에엑!”
데미안의 손길이 뻗어왔다. 녀석에게 멱살을 붙잡힌 채 반강제로 끌어 올려져 일어났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을 참아내며 철수레 조종간을 잡았다. 자동차 핸들처럼 거창한 조종 기구는 아니었다.
그저…….
‘왼쪽!’
철컥!
조종간 레버를 왼쪽으로 밀었다. 철수레 아래쪽에서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그 직후, 철수레가 레일 갈림길을 맞이했다.
콰트컹!
“……우큽!”
시속 100km/h로 과속방지턱을 넘어가는 듯한 굉장한(?) 승차감과 함께, 철수레가 갈림길 왼쪽 경로의 레일을 타고서 질주했다.
“전하! 갈림길 순서! 잘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당연하지!”
어느새 또 다가온 갈림길.
이번에는 오른쪽!
콰컥!
“……갸읍!”
이번에는 아예 철수레 밖으로 튕겨 나갈 뻔했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역시나. 본드래곤이 레일을 통째로 짓밟고 뭉개며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거리가 많이 벌어지지도 않는 채였다.
“데미안, 쿠읍!”
레버를 오른쪽으로 밀며 말했다.
“이거! 계속 브레이크 풀어놓은 채로 달리다간! 갈림길에서 수레가 뒤집힐 수도 있거든! 그러니까!”
“속도를 제어하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조금씩 당길 거니까 본드래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지를 알려달라는 거겠지요?”
“빙고!”
역시 이럴 땐 손발 척척이 최고다. 라키엘은 국밥 같은 든든함을 느끼며 브레이크를 살짝씩 당겼다.
카가가가가각!
쇳소리와 함께 쇠바퀴에서 불똥이 튀었다. 무한대로 빨라질 것만 같던 철수레의 가속이 살짝 줄었다. 그만큼 갈림길의 방지턱(?)을 그나마 안정적으로 넘을 수 있게 되었…….
“가까워집니다! 20미터!”
“……망할!”
다시 브레이크를 풀었다.
갱도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는 철수레에 다시금 섬뜩한 가속이 붙었다. 안전장치고 뭐고 없이 시속 300km/h로 질주하는 리어카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괴수에게 붙잡혀 돈가스 다짐육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내 기억아, 날 배신하지 마라.
라키엘은 필사적으로 기억 속 갱도의 지형을 되짚었다. 그리고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러시안 룰렛의 방아쇠를 당기는 심정으로 레버를 밀었다. 좌, 또는 우. 50%의 확률. 틀리면 엉뚱한 길로 내몰리며 철수레와 함께 통째로 쾅. 식은땀이 차폐갑옷 안쪽을 적셨다.
그렇게 몇 번의 갈림길을 덜컹거리며 지났을까.
……후욱!
사방이 막힌 갱도가 끝이 났다. 한순간에 주위가 확 트였다. 철수레가 광산 내부의 수직 공동을 따라 만들어진 절벽을 내달리게 되었다.
‘나이스!’
다행히 극악의 좌우 게임을 모두 맞추었다. 이제 남은 갈림길은 없다. 그저 수직공동의 둘레를 따라 거대한 원을 그리며 내달릴 수레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될 뿐.
“꽉 잡아라, 데미안!”
라키엘은 조종 레버에서 손을 떼고는 철수레 안쪽으로 몸을 납작 낮추었다. 그 직후, 철수레가 수직 공동의 내벽 둘레에 부설된 레일을 따라 거대한 원을 그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원심력과 함께였다.
콰콰콰콰콰콰-!
“그아으으읍!”
온몸의 피가 한쪽으로 확 쏠리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멀미와 함께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본드래곤에게 따라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브레이크는 공동을 다 내려갈 때쯤에나 당기자. 그때까지만 참자. 그렇게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 쓰하카하아악!
돌연, 바로 위쪽에서 본드래곤의 포효가 들려왔다. 어째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아야 했다. 공동을 따라 부설된 레일의 경로고 뭐고 다 무시하고선, 수직 공동의 아래쪽을 향해 도약을 해 버린 본드래곤의 모습을. 그리하여 이쪽을 온몸으로 덮쳐오며 드리우는 놈의 그림자를.
……!
굉음이 울린 걸까. 폭발이라도 일어난 걸까. 아니면, 놈의 앞발이 철수레 뒤쪽을 스치듯이 후려친 걸까. 덕분에 철수레가 질주하던 속도 그대로 탈선해 버린 걸까.
“전하!”
이쪽을 끌어당기는 외침. 데미안 녀석이 보였다. 통째로 날려가며 뒤집히는 철수레 안쪽.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위아래의 풍경. 그 사이로 손을 뻗어오는 데미안. 녀석이 이쪽을 붙잡았다.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온몸으로 무언가를 막아내려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추락의 충격은 삽시간에 다가왔다.
“……!”
쇠가 갈리는 소리. 무언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 쇳소리. 불꽃. 수백 개의 망치가 차폐갑옷을 두드리는 듯한 감각. 어지러움. 이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것 같고. 내가 살던 세상은 저세상이 아닌 것 같고. 그 와중에 숨은 잘 쉬어지지가 않고.
“……커억! 쿨럭! 컥!”
턱 막힌 호흡이 간신히 뚫리며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지러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최소한 세 겹으로 겹쳐져 보였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찌그러진 깡통이었다.
아니. 철수레였다.
그토록 튼튼하던 철수레가 탱크와 온몸으로 하이파이브라도 한 것처럼,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찌그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데미안은?
내 팔다리는?
다들 온전할까.
다행히 팔다리는 잘 붙어 있었다. 내 것도. 곁에 쓰러진 데미안의 것도.
“어, 어이.”
데미안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기절한 걸까. 무리도 아니었다. 이쪽을 감싸며 충격 대부분을 감당했을 테니까.
“야. 일어나. 얼른.”
탕. 타앙.
녀석의 흉갑을 쳤다. 녀석이 눈을 뜨기를 바라며. 일어나 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주길 간절히 염원하며.
그러나 듣기 싫은 소식이 먼저 귓가에 닿아 왔다.
- 쓰하아아악…….
“…….”
소름 끼치는 낮은 포효성. 바로 앞에서 울렸다. 잘 들리지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보였다. 뒤틀린 나뭇가지 같은 실루엣. 자욱한 흙먼지와 망가진 레일 사이로 다가오는 본드래곤. 텅 빈 공허한 안구. 놈이 바로 앞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따라잡혔다.
끝장이다.
“젠장.”
웃음이 나왔다. 당장 일어나서 데미안을 업고서라도 도망치고 싶은데, 그럴 힘이 나오지가 않았다. 일어나기는커녕 어지러워서 구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신세라.
‘그럼 나는…….’
어떻게 죽게 되는 걸까.
저 앞발로 밟으려나.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지?
마치 꼭…….
- 쓰하아악? 하아악……?
산책 중에 넘어진 주인에게 괜찮으냐는 눈빛을 보내는 강아지처럼. 정말로. 꼭.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