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친절한 살인마의 딜레마 (2)
“가까이 오지 마! 물러나! 안 그러면 이걸로 내 모가지를 콱 찔러 버린다!”
단호하게 외쳤다.
데미안의 허리춤에서 뽑은 단검을 셀프로 목에 갖다 댔다. 당장 갑옷 틈새로 찔러넣을 것처럼 꾹 눌렀다.
물론 연기였다. 진짜로 찌를 생각? 당연히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액션은 제대로 넣어야 한다. 그래야 놈이 속을 테니까.
‘제발, 제발 속아라. 낚여라!’
라키엘은 투구 덕분에 초조한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간절히 염원했다.
제발 본드래곤이 이쪽의 의도대로 반응을 보여주길. 그래서 이 순간을 빠져나갈 빈틈을 내어주길.
‘이거, 말도 안 되는 짓 같지만, 그래도 가능해. 아마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확신이 들었다.
이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다.
‘도망? 못 쳐. 아직 눈앞이 어질거려. 다리가 말을 제대로 들을지도 모르겠고. 정상적으로 뜀박질이라도 하려면…… 최소 5분은 회복해야 할 거야. 게다가 지금은 데미안도 정신을 못 차렸지. 그런데 도망? 말도 안 되는 소리.’
괜히 어설프게 도망치려다간 본드래곤을 자극하는 꼴밖에 안 된다.
그렇다고 반격?
‘그건 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사실상 반격할 수단이 없다.
아스라한 심법?
때려 봤자 놈이 아파할까.
써클 슬롯에 저장하고 다니는 공기와 물? 아무리 세차게 뿜어낸들 효과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만년설과 만년필도 그레노 경에게 맡겨놓고 온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반격도 불가능.
도주도 불가능.
그렇다고 계속해서 놈의 눈치만 보면서 시간을 벌면? 그래도 죽는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방사선 피폭량이 누적되는 중이다.
기대수명? 역시나 쑴펑쑴펑 깎여나가고 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폭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겠지. 수명도 더 빠르게 깎일 거고.
즉, 이 상황에서 그나마 해 볼 수 있는 건?
조금 전부터 살짝 이상하게 변한 본드래곤의 태도에 도박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나라고! 찌른다! 진짜로!”
힘껏 외쳤다.
조금 전부터 묘하게 바뀐 듯한 본드래곤의 분위기. 어쩐지 이쪽의 상태를 걱정해 주는 것만 같은 태도. 다친 곳이 없나 염려스럽게 살피는 듯한 고갯짓. 울음소리. 말도 안 되는 결론이지만, 어쩌면 놈이 이쪽을 ‘아낀다’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제발!’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칼날 끝이 갑옷 틈새를 살짝 찌르고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힘 조절에 실패하면 그대로 푹. 손도 못 쓰고 죽겠지. 원치도 않았던 다윈상 수상자가 될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어설프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아! 제바알!’
까가각!
단검과 갑옷 틈새가 불길한 소음을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 스하악……?
본드래곤이 바닥에 깔고 있던 머리통을 흠칫했다. 그러더니 재빨리 들어 올렸다. 설마 공격? 이쪽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서? 아니었다. 놈이, 한 걸음을 물러났다!
‘……통했다!’
눈치로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이 당황했다고. 이쪽의 태도에 놀랐다고. 두려워한다고. 뭘? 이쪽이 죽는 것을.
‘어째서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쪽의 셀프 인질극을 통한 협박이 통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목에 갖다 댄 단검을 유지한 채 소리쳤다.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찌른다!”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참았다.
다른 손을 뻗어 데미안의 흉갑 장식을 붙잡았다. 질질 끌며 물러났다. 본드래곤과 조금이라도 멀어질 수 있도록.
지지지직……!
이쪽보다 건장한 체구. 거기에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차폐갑옷을 입은 데미안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녀석이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끌지 못하면 죽는다. 물러나지 못하면, 본드래곤과 거리를 벌리지 못하면 죽는다. 오직 그 생각을 하며 써클을 동원했다.
온 힘을 쏟아내며 뒤로 당기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단검을 여전히 셀프로 목에 겨눈 채였다.
“후우! 후욱! 씨힉! 흐훅! 더 가까워지기만 하면! 찌른다고! 했다! 후훅! 훅!”
금방 거칠어지는 호흡.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어지러웠다.
무리도 아니었다.
‘내가 무슨…… 근육맨도 아니고!’
아스라한 심법으로 큰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나를 총동원한 결과일 뿐. 본질적으로 황태자 라키엘의 이 육체는 병약가련, 그 자체인 몸뚱이였다.
물론 전보다는 제법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까지 바뀐 건 아니었다.
한데 고속으로 달리다가 전복되는 철수레에서 튕겨 날아가고, 바닥에 추락하는 사고를 겪은 지 불과 10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뒷목 잡고 드러누워서 응급실로 실려 가야 정상적인 상태였다.
그런데 통풍도 안 되는 무식한 전신갑옷을 입고서, 100킬로그램이 넘는 덩어리를 질질 끌며, 한 손으로는 셀프 위협을 가하는 멀티플 중노동을 감행해야 한다니. 이거야말로 혹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쓰하악! 하악!
그런 이쪽이 걱정(?)이라도 된 걸까. 본드래곤이 성큼 걸음을 내밀어 왔다. 물론 놈의 시도는 이쪽의 외침에 금방 움찔하긴 했지만.
“내 말이 헛소리로 들렸냐!”
카드득!
다시금 단검으로 갑옷 틈새를 긁으며 외쳤다. 놈이 흠칫하며 굳었다. 한편으로는 이쪽의 마음도 굳었다. 솔직히 조금씩 막막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일단 셀프 협박이 통하기는 했는데…….’
언제까지 이 약빨이 먹힐까.
그리고 지금 같은 상태로 과연, 최종 함정과 탈출로가 설치된 막장까지 갈 수 있을까.
‘가야지 뭐.’
안 가면 죽는다.
그게 싫으면 갈 수밖에.
호흡을 골랐다. 본드래곤을 경계하며 데미안 녀석을 끌어당겼다. 상체를 세워 주었다.
그리고 업었다. 질질 끌며 이동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나으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우읍.”
차폐갑옷 2인분, 거기에 데미안의 체중까지. 짊어지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속으론 ‘데미안 카이엔! 감봉 12만 개월!’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걸었다.
느리지만 한 걸음씩. 차근차근. 무너지려는 무릎을 잡고, 떨구어지려는 고개를 들고……사주팔자에도 없던 문워크를 시전해야 했다!
‘어오 썅!’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본드래곤을 등 뒤로 두게 될 테니까. 놈이 갑작스럽게 움직여 버릴 때에 대처할 수가 없을 테니까.
하여 어쩔 수 없이 뒤로 걸었다. 걸음을 크게 디딜 수도 없었다.
자칫 돌부리에라도 걸려 버리면, 데미안을 업은 상태에서 그대로 넘어져 버릴 수도 있을 거란 불안감 때문이었다.
덕분에……
슥샤샥, 슥샤샥!
“낑, 낑! 끄흥!”
졸지에 동네 똥강아지 소리를 내며 문워크를 시전하면서 본드래곤과 대치를 이어가야 하는 이 서글픔(?)이란!
계속 움직였다.
오직 수직갱도 가장 깊은 아래에 있을 막장을 향하여.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그동안 본드래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쪽을 슬금슬금 따라왔다. 그 모습이 특수경 너머로 희뿌옇게 보일 때마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차폐갑옷 안쪽 가득 차오른 열기에 얼마나 헐떡였을까. 몇 번이나 의식이 반쯤 날아갔다가 간신히 돌아왔을까. 숨통이 막히는 느낌 속에서 기절하지 않으려 입술을 얼마나 피가 나도록 깨물어댔을까.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닿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던 무렵이었다.
……터억!
뒤꿈치에 뭔가가 닿았다. 돌부리? 아니었다. 뾰족하거나 울퉁불퉁하지 않았다. 기다란 직선, 깔끔한 직각이 느껴졌다.
눈길을 슬쩍 내려보니 과연 낮은 계단의 첫 층계가 보였다.
‘다 왔다.’
이틀 전, 시장과 함께 여기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 설치된 함정의 최종 점검을 위해서였다. 당시에 보았던 막장의 구조가 떠올랐다.
‘여기서부턴 넓은 복도. 이런 계단을 열 단쯤 올라가면 50미터쯤 되는 직선 통로가 있고. 그 끝에 커다란 방처럼 다듬은 막장이 있어.’
희망의 끝자락이 느껴지는 순간, 흐렸던 의식이 조금은 맑아졌다. 고갈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운도 약간은 솟아났다. 두뇌가 팽팽 돌아갔다.
마지막까지 셀프 협박극으로 본드래곤과 거리를 유지하고, 순식간에 움직이며 함정을 발동하고, 막장 구석의 탈출구로 몸을 날리는 과정을 미리 이미지로 되새겼다.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갈리리라. 그 생각에 절로 가슴이 쿵쿵 뛰는 순간이었다.
- 싸하악? 카하악?
돌연, 본드래곤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쪽과 유지하던 거리를 무시하려는 듯, 앞발을 크게 내디뎌 왔다.
“……야!”
황급히 외쳤다.
단검으로 갑옷의 목 틈새를 세차게 긁었다. 카가각, 불길한 쇳소리와 불똥이 튀었다.
“내 말이 장난으로 들리나! 어!”
사납게 외쳤다.
그런데 놈이 아까처럼 흠칫하지 않았다. 자리에 멈추기는 했는데 뭐랄까.
- 쓰하아악……?
고개를 갸웃.
이쪽을 묘한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아야 했다.
블러핑이 탄로 났다.
소름이 죽 돋았다.
‘망할.’
황급히 뒤쪽의 계단을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놈이 다시 한 걸음을.
쿠웅!
“……!”
놈이 크게 내디딘 앞발이 아예 뒤쪽을 가로막았다. 즉, 이쪽이 놈의 가슴팍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아래로 빤히 내려다보는 놈의 거대한 두개골. 텅 빈 안구. 너무나 가까워져 버린 거리. 귓가에 미친 듯이 울리는 피폭 누적 알림. 시시각각 떠오르는 핏빛 경고창.
공격이라도, 해봐야 할까.
그 순간이었다.
- 쓰하악!
본드래곤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그리고 데미안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 올렸다. 안쓰러운 마음을 담아서였다.
- 쓰카하악! 하악……!
네가 친구를 힘들게 업고서 움직이려는 것 같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는 눈앞의 인간과 화해를 하고 싶었다.
아까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술래잡기를 했던 바람에 저 인간이 크게 콰당을 했고, 그래서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쓰카학! 하아악!
아깐 내가 미안했어. 그러니까 네 친구를 내가 대신 옮겨주면 화를 풀어주지 않을래? 네가 혼자서 힘들게 업고 움직이는 것보단 내가 도와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담아서 물었다. 데미안을 입에 살짝 물고서 들어 올린 채로. 공허하게 텅 빈 안구 구멍을 라키엘에게 맞추며. 진심으로. 낮게 속삭이듯.
‘안 돼!’
라키엘은 다급해졌다.
하필이면 놈이 데미안을 물어 버리다니. 만약 이대로 놈이 턱에 힘을 주면? 데미안은 저항도 못 하고 으깨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끝이다.
마계왕이 깨어나겠지.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실업률은 치솟고, 물가도 월급만 빼고서 팍팍 솟구치고, 이 세상 자체가 잿더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건 둘째 치고! 난 여기서 죽기 싫다고!’
맥박이 쿵쿵.
심장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급한 눈길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 순간, 본드래곤의 가슴에 자리한 코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
이제껏 이 각도로는 보지 못했던 코어.
놈의 가슴팍 아래에까지 들어와서 딱 올려다보니까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균열?’
악티누스의 코어에 희미하게 새겨진 불완전한 결합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라키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