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마성의 황태자 (1)
‘……균열?’
라키엘은 부릅뜬 눈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본드래곤이 자신의 바로 위에서 플랭크(?)를 하고 있는 듯한 상황. 처음으로 이 각오에서 놈을 올려보게 되니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뜻밖의 모습.
코어의 희미한 균열이 보였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확실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특수경의 희미한 시야 사이로도 뚜렷하게 보였다. 코어에 금이 가 있었다. 아니, 저건 금이라기보다는…….
‘꼭, 카라멜 몇 덩이를 손아귀에 쥐고서 꽉 움켜쥔 것 같아.’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코어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다. 불안정해 보였다. 강하게 후려치면? 어쩌면 들러붙은 코어 덩어리가 균열을 따라 몇 조각으로 나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덕분에 머릿속이 바빠졌다.
‘어쩌면 이놈을 격퇴할 수 있을지도?’
문득, 핵물질에 대해 주워들었던 상식이 떠올랐다. 임계질량이라고 했던가. 핵물질이 일정 이상의 질량으로 뭉치게 되면 그때부터 핵분열 반응이 일어난다고 했다.
중성자가 원자핵을 때리고, 원자핵이 분열되며 중성자가 또 나오고, 그 중성자가 근처의 다른 핵을 또 때리고 등등. 어쨌건 그렇게 연속되는 연쇄적 핵분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치의 질량이 임계질량이라고 했다.
그런데 핵분열 중인 핵물질이 모종의 이유로 임계질량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핵분열이 멈추는 거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놈의 코어를 살폈다.
확신이 스며왔다.
된다.
어쩌면 가능하겠다.
저 코어의 균열을 키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코어를 쪼갤 수만 있다면, 놈의 코어가 일으키는 핵분열을 멈출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엿보였다.
‘할 수 있어. 핵분열이 멈추면 놈도 타격을 입을지도 몰라. 최소한 움직임이 느려지거나, 어쩌면 완전히 멈출 수도 있겠지. 그러면 돼. 놈이 코어를 잃은 타격에 허우적거리는 순간 막장 쪽으로 뛰는 거야. 거기에 있는 최종 함정을 발동하고, 탈출로로 빠져나가는 거지.’
그렇게만 된다면 대성공이다.
코어까지 잃은 본드래곤은 통째로 붕괴하는 광산 밑바닥에 매몰될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암담함도 함께 밀려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잠깐 떠오른 희망회로. 한데 그걸 실제로 구현할 답이 보이지가 않았다. 막막했다. 그런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 쓰크흐으으으윽!
본드래곤이 이쪽을 내려다보며 포효성을 내질렀다. 커다란 아가리에 데미안을 물고 있는 채였다.
“…….”
그렇다.
데미안이 문제다.
녀석이 의식을 잃은 채 본드래곤의 아가리에 물려 있는 이 상황이 문제다. 만약, 이대로 본드래곤이 입에 힘을 준다면? 데미안은 으깨진 토마토 꼴이 될 것이다. 당장에라도 가능한 이야기다. 주식 꼭대기에 물린 것보다도 더한 암울함이 밀려왔다.
‘생각을 해. 이한. 머리를 굴려!’
수능 시험을 치던 때보다도 더욱 절박하게 머리를 쥐어짰다. 여기서 포기하긴 싫었다. 죽는 건 더더욱 싫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꿀만 빠는 달달한 미래를 누려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러한 절박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런 외침이 튀어나온 것은.
“데미안 카이엔! 근무 태만! 감봉 12개월!”
다 외친 직후,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죽기 직전에 되니까 나도 모르게 머리가 회까닥 한 걸까.
그런데 아니었다.
뜻밖의 반응(?)이 얼핏 엿보였다.
……움찔.
본드래곤의 아가리에 물린 채 축 늘어져 있던 데미안 녀석의 어깨와 팔뚝이 눈에 띄게 움찔, 경련하듯 움직였다. 착각? 아니었다. 본드래곤이 움직이는 바람에 흔들린 거? 아니었다. 확실했다. 아니, 확실하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염원하며 외쳤다.
“데미안 카이엔! 야근 및 위험수당 삭감!”
……움찔!
또다.
제대로 움직였다.
정말로 확실하다.
- 쓰크흐으윽?
이쪽의 돌연한 외침에 본드래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뭐 하나 싶은 걸까. 혹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가며, 데미안이 깨어나길 바라며 계속 외쳤다.
“월차 및 연차 몰수!”
……흠칫!
녀석의 반응이 더욱 커졌다.
된다.
되겠다.
어쩌면 가능하겠다.
제발 깨어나라. 제발 일어나라. 좀. 움직여라. 제발. 염원하고 또 기원하며, 자극을 받은 본드래곤이 이쪽을 짓밟지 않아 주기만 바라며, 애타게 소리쳤다.
“거기에 이번 달부터 연금 납부액 3배로 상승!”
그 순간이었다.
……스칵!
이쪽을 내려다보려던 본드래곤의 눈길. 놈의 거대한 두개골에 돌연한 섬광이 서렸다. 날카로운 폭풍도 몰아쳤다.
“……으엇!”
그 서슬에 깜짝 놀라 몸을 숙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너무 무모했던 걸까. 끝내 놈을 자극한 걸까. 그래서 놈이 브레스 같은 거라도 뿜으려는 걸까. 기겁한 나머지 본능적으로 뒤로 기었다.
한데 그때였다.
투콱!
본드래곤의 머리통이 날카로운 폭풍 다발에 휩싸였다. 거센 폭발이 몰아쳤다.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졌다. 순간 주마등 비슷한 거라도 보이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하다 하다 연금까지……. 아무리 전하라도 그건 선 넘는 거 아닙니까?”
“……!”
곁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데미안이었다.
어느새 바로 옆에 착지한 녀석이 표범처럼 웅크린 채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녀석의 검날 한쪽의 이가 통째로 나가 있는 모습도 보였다.
“정신 차린 거냐?”
“예. 덕분에.”
“혈당, 쓴 거지?”
“예.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
데미안이 이쪽의 앞을 가로막으며 본드래곤과 마주 섰다. 녀석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본드래곤도 거의 멀쩡한 모습으로 이쪽과 녀석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공허하게 텅 빈 시선. 그래서 더욱 섬뜩한 느낌.
“잘 들어, 데미안.”
몰려오는 오싹한 느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네가 정신줄 놓고 있던 사이에 내가 발견한 게 있어.”
“뭡니까.”
“놈의 코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아까의 셀프 협박극, 그때 느낀 바가 있다면, 저 본드래곤이 이쪽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작전 회의는 되도록 은밀하게.
가능한 한 속닥속닥.
“놈의 가슴 정중앙에 박힌 코어, 보이지?”
“예.”
“내가 확인했어. 아까. 코어에 균열이 있더라.”
“균열이라시면……?”
“쉿. 목소리 낮춰. 그게…… 온다.”
“예?”
“일단 피해!”
외쳤다.
그 직후, 살짝 몸을 웅크리는 듯했던 본드래곤의 머리가 순식간에 흐릿해졌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놈의 머리통이 통째로 데미안을 휩쓸어 왔다.
쿠후우웅-!
폭발적으로 밀려 나오는 돌풍!
그러나 이쪽이 먼저 경고했던 덕분인지 데미안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녀석이 재빠르게 물러나며 이쪽으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콰앙!
“……긃!”
또 옆차기다.
녀석의 옆차기가 옆구리를 두드려 왔다. 일순간 온몸이 옆으로 후웅 뜨며 날려갔다. 덕분에 본드래곤의 박치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잠깐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야 했지만.
“야!”
“쉿. 전하, 이쪽으로.”
텁!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자욱해진 흙먼지 속에서 데미안의 손아귀가 불쑥 뻗어왔다. 녀석이 이쪽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서 뛰었다. 수직갱에서 막장으로 향하는 수평 통로가 있는 쪽이었다.
아마도 데미안은 이대로 수평통로 반대편 끝에 있는 막장으로 뛰어가 최종 함정을 발동하고, 그대로 탈출로를 통해 빠져나가려는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숙여!”
옆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의 기류!
아스라한 심법을 따로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써클이 비명을 지르듯이 경고를 보내어 왔다. 당장 몸을 숙이지 않으면 차폐갑옷을 입은 채로 찌그러져 죽게 될 거라고.
그 본능에 따랐다.
손을 뻗었다.
앞서 달려가던 데미안 녀석의 뒤통수를 확 눌렀다. 동시에 함께 몸을 숙였다.
그 직후.
콰하학-!
본드래곤의 초특대 쇠사슬 같은 꼬리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수평으로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정확히 이쪽의 상반신이 있던 높이였다.
만약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상반신이 뭉개지는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식은땀이 왈칵 솟았다. 그러나 마냥 두려워만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냥 무지성으로 달려서는 수평통로로 못 들어가. 들어가도 금방 따라잡힐 거야. 놈이 우리보다 빠르니까.”
“그럼 어떡하시려는 겁니까.”
“너, 혈당을 동원할 수 있는 게 한 번이라고 했지?”
“그걸로 코어를 타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
“맞출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시선을 끌게.”
“예?”
“시간 없어. 얼른. 움직인다.”
녀석과 토론을 나눌 여유 같은 건 없다. 몸을 일으켰다. 팔도, 다리도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 방법뿐이다. 둘이 함께 살아남으려면 이것밖에 없겠다. 몸을 돌렸다. 본드래곤의 마나가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뛰었다.
“흡!”
투확-!
용천혈의 써클을 폭발시켰다. 온몸을 휘감는 가속감. 그만큼 비례하며 치솟는 두려움. 내가 뭔 짓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리라는 생각만 붙잡았다. 한 방이면 된다. 코어에 한 방만 제대로 먹이면. 코어가 쪼개지기만 한다면. 그러면.
‘임계질량 상태가 풀릴 수도 있어.’
그러면 어떤 형태로든 놈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막장까지 도망칠 수 있다. 설령 데미안이 저혈당 쇼크에 빠지게 된다 하더라도, 이쪽이 어떻게든 업고서라도 움직일 여유는 생길 것이다.
그러면 된다.
막장에 무사히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광산 전체를 붕괴시킬 최종 함정이 있으니까. 그걸 작동하고,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만들어둔 탈출로로 빠져나가면 돼.’
할 수 있을까.
의문은 접어두었다.
다시금 용천혈의 써클을 발동했다.
쿠확!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본드래곤의 앞발이 허공을 헛쳤다. 그사이, 거칠게 내리꽂히듯 착지했다.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미끄러지듯, 바닥을 갈아엎는 기세로 움직였다.
콰학!
연달아 몰려오는 급격한 가속과 감속. 순식간에 속이 메슥거렸다. 멀미가 몰려왔다. 그러나 참았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불안감은 접어두었다. 오직 데미안이 이 기회를 살려주기를. 제대로 호응해 주기를 바라며 숨 가쁘게 움직였다.
“헉! 후욱! 헉!”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절대 포기하기 싫었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끝날 줄 알고!’
에프킬라로 조준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보려 날뛰는 바퀴벌레 같은 심정! 그러한 굳은 의지 하나로 버티고, 한계를 돌파했다. 집중하고, 애를 썼다.
덕분에 라키엘은 자각하지 못했다.
- 쓰카하아악? 하악? 카학! 학학학!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너무나 애를 쓰는 자신의 모습.
그러한 이쪽의 모습을 본드래곤이 단단히 오해하게 되었음을. 이쪽이 제대로 놀아주려는 것이라 착각하게 됐음을. 덕분에 본드래곤이 한결 기뻐하며 이쪽에게 더욱 빠져들고, 조련되며, 라며들고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결국, 이쪽의 여자한테만 빼고 다 인기 있는 마성(?)의 매력이 어김없이 또 발동하고 있음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