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마성의 황태자 (2)
- 쓰카하아악? 하악? 카학! 라카학학……!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의 포효성이 수직갱도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악티누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인간이 너무나 현란하게 움직여서? 도무지 잡을 각이 보이지가 않아서? 덕분에 성질이 나서?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악티누스는 기뻤다!
- 쓰카르학학학!
온몸을 들썩이며 내는 포효성의 정체는 박장대소! 악티누스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주위를 빙빙 돌며 바쁘게 움직이는 라키엘. 그런 그의 움직임을 ‘놀이’라고 받아들인 까닭이었다.
- 카르학학!
드디어 저 인간이 날 받아들여 준 것 같다. 아니었다면 아까까지 그랬듯이 도망치느라 바빴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저렇듯 무해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으로 이쪽 주위를 빙글빙글. 게다가 이쪽이 심심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듯이 다채로운 널뛰기처럼 위아래위위아래.
- 쓰꺄르륵!
이런 술래잡기라니. 기뻤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그렇다면 나도 이 놀이를 받아들여도 될까. 이젠 아까처럼 힘 조절을 못하진 않을 테니까. 실수하지 않도록, 네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거니까.
- 카륵!
투콱!
앞발을 뻗었다. 라키엘을 향해 마구마구 휘저었다. 당연하지만 힘은 쭉 뺐다. 라키엘을 맞추지도 않고, 일부러 빗나가게 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 티 나도록 하지는 않았다. 맞을 듯이 말 듯이, 아슬아슬하게, 그래야 놀이가 더 실감 나고 재미있어지는 법이니까.
콰아앙-!
악티누스의 앞발에 맞은 수직갱도 벽면 일부가 위태롭게 흔들리며 허물어졌다. 수많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음은 물론이었다.
“……크으읏!”
라키엘은 기겁하며 몸을 숙였다. 방금까지 자신의 상체가 있던 자리에 농구공 크기의 돌덩이가 투포환처럼 지나가는 걸 보니, 저절로 식은땀이 전신 모공을 쑴펑쑴펑 물들였다.
‘미친.’
한 대라도 맞는다면 끝장이다. 직격은 물론이고, 파편에 맞아도 위험하다. 위기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사로잡았다. 공포심이 시시각각 이성과 판단력을 좀먹으려 달려들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지?’
신기했다.
암울했다.
자신은 그저 꿀만 빨면서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에까지 휘말린 건지. 어쩌자고 이런 까마득한 지하에서, 상상해본 적도 없는 방사능 괴수 앞에서, 목숨을 건 미끼 댄스를 추고 있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각하고, 받아들이고, 냉정하게 판단하며,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고, 꿀도 빨 수 있을 테니까.
‘정신 차려, 이한!’
라키엘은 공포심에 위축되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이번 주만 버티면 월급이 나온다는 마음가짐으로 야근을 버티는 직장인처럼, 언젠가는 노예 신세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랩실로 나가는 대학원생처럼, 스스로를 믿으며 더욱 집중했다.
“후욱! 크훅! 훅…… 후훅!”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차폐갑옷의 구조 때문이었다. 방사선의 투과를 막기 위해 납 등으로 도금을 하고, 도금재가 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일 겉면에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바른 차폐갑옷이었다.
그런데 그 엘렌시아 수액이 문제였다.
‘……더워!’
세상에 알려진 마법 재료 중에 가장 강력한 단열재가 엘렌시아 수액이었다. 하여 전설의 역대급 영지 설계사로 전해지는, 300년 전의 로이드 프론테라도 건설 단열재로 희석된 엘렌시아 수액을 썼다고 하였던가.
어쨌건 덕분에 본드래곤의 코어가 내뿜는 엄청난 열기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는 있게 됐지만, 반대로 갑옷 안에 들어차는 체온이 빠져나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혹시 밀폐된 사우나 안에서 버피 100개를 뛰어본 적이 있는가. 보통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 최소 탈진한다.
지금 라키엘의 상태가 그랬다. 아니, 더 심했다. 광산에 들어오기 전부터 악티누스에게 간택(?)이 되고, 그때부터 엄청난 추격전을 벌였던 터였다. 그 후에는 철수레의 전복을 겪으며 약간의 뇌진탕 체험도 했고, 그런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무한 초스피드 널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하지만 멈추면 진짜로 죽는다.
그 일념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 모습이 악티누스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왔다.
“헉헉헉……!”
- …….
자그마하고 귀여운 인간, 너는 나와 놀아주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할게. 네 노력이 조금도 헛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서 같이 놀도록 할게!
악티누스는 감격했다.
지금껏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인간은, 진심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열과 성을 다해서 마음껏 함께 노는 것이 당연한 예의이고, 도리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래서였다.
- 쓰카라하하학!
즐거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박찼다. 라키엘이 용천혈 써클을 이용해서 솟구치는 것과 똑같이, 코어의 마력을 모조리 끌어와서 전력으로 뛰어올랐다.
투확-!
“……!”
라키엘은 기겁했다. 본드래곤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도약을 선보이며 자신을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망할!’
반면, 자신의 몸은 이미 허공에 떠올라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대로면? 저놈의 전신 바디프레스에 짓눌릴 것이다. 결과는 볼 것도 없겠다. 돈가스 고기, 혹은 자이언트 스윙을 맞은 페퍼로니 피자 꼴이 나겠지.
‘……그렇게 될 줄 알고!’
퍼엉!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공중에서 발의 방향을 바꾸었다. 용천혈의 써클을 폭발시켰다. 반탄력이 허공에서의 몸의 궤적을 바꾸었다. 옆으로 튀어나갔다. 그 직후, 본드래곤의 바디프레스가 아슬아슬한 차이로 빗나갔다.
투콰학!
광산이 통째로 진동하는 건 아닐까. 거의 유성낙하에 버금가는 바디프레스의 위력을 보며 라키엘은 식은땀을 추가로 적립했다. 그리고 비틀비틀 간신히 착지에 성공했다.
한데 그때였다.
본드래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위쪽에서, 뭔가 시커먼 덩어리가 떨어져 내려왔다.
쐐애액-!
“……!”
피할 틈도 없었다. 뭔가가 떨어져 온다고 느낀 순간, 바로 머리 위까지 쇄도해 오고 있었다.
“으엇!”
거의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며 몸을 뒤로 눕혔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이 손바닥을 때렸다.
터커엉-!
“……!”
낙석이었다. 아마도 본드래곤이 날뛰는 통에 광산이 흔들리고, 그 진동 때문에 허물어진 돌덩이가 수직갱도를 통해 떨어져 내려온 것 같았다.
‘커억……!’
가까스로 막기는 했지만, 타격은 컸다. 낙석을 막으며 몸이 뒤로 확 밀려났다. 넘어졌다. 투구 뒤통수가 땅에 부딪혔다. 터엉, 세상이 통째로 흔들렸다.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제대로 뇌진탕 당첨이라고.
‘미친.’
욕지기가 나왔다. 하필이면 자신이 몸을 피한 자리로 낙석이 떨어지다니.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있을까.
‘일어……나야 하는데.’
다급해졌다. 손으로 땅을 짚으려 애를 썼다. 그런데 잘 되지가 않았다. 돌덩이를 막아내며 타격을 받은 까닭일까. 혹은 뇌진탕 때문일까. 손은 물론이고 두 팔에 감각이 없었다.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다리도, 몸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려는 것은 마음뿐. 몸은 지금의 위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머리가 내리는 모든 명령을 거부하며 바닥을 비척거릴 뿐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를 헤치며 스르륵 다가오는 본드래곤의 모습을 보니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젠 끝인가.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서 터져 나오는 본드래곤의 괴성이 그런 기분을 더욱 부추겼다.
- 쓰카라하하학!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는 코어가 쿵쿵 뛰는 기분이었다. 자욱하게 피어난 흙먼지 속에 쓰러진 소중한 인간을 보자마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설마 또 다친 건가. 코어가 통째로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바로 앞에서 비척거리며 도통 일어나질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런 초조함과 걱정을 더욱 부추겼다.
- 쓰하하악? 하아악?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오늘의 놀이는 여기까지다. 인간이 너무 무리한 것 같으니까. 일단 좀 일으켜줘야겠다.
악티누스는 자신의 두개골을 조심조심 인간에게 들이밀었다. 코끝으로 인간의 몸을 일으켜 줄 심산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쓰러진 인간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옆쪽에서, 뭔가 새하얀 섬광이 날아왔다.
쐐애액-!
- ……!
피할 틈도 없었다. 뭔가가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바로 가슴 앞까지 쇄도해 오고 있었다. 이쪽의 코어를 향해서였다.
- 쓰카학!
거의 반사적으로 앞발을 내밀었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이 앞발을 분쇄했다.
투콰하학-!
- ……!
고도로 응축된 검기였다. 검기가 날아온 방향에 다른 인간이 검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저 인간이 검기를 날린 것인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기억이 났다. 30일 전에도 이랬다. 성벽 밖의 평원에서, 두 번이나 자신을 아프게 했던 인간의 기억이었다.
- 쓰카하아악……!
역시나 이번에도 아팠다. 앞발이 통째로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티누스는 꾹 참았다. 자신을 자꾸 아프게 하는 저 인간에게 화가 났지만, 지금은 분노 따위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소중한 인간이 쓰러져 있으니까. 아야한 거 같으니까. 도와야 한다. 일어날 수 있도록. 푹 쉬고 집에 갈 수 있도록. 자신이 도와야 한다.
- 하아악, 카학!
악티누스는 데미안에게 달려드는 대신, 두 앞발을 열심히 복구시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두개골보다는 앞발을 쓰는 편이 좋겠다고. 그래야 소중한 인간을 더 수월하게 부축해줄 수 있을 듯하다고. 그러니까 앞발이 복구될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츠스스스스……!
악티누스의 코어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분쇄된 앞발을 빠르게 복구하기 시작하였다. 쓰러진 채로 그 모습을 보던 라키엘은 탄식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젠 진짜로 끝인가.’
어지러운 의식. 흐릿한 시야. 저 너머에서 천천히 쓰러지는 데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본드래곤에게 날렸던 일격, 아마도 마지막 혈당을 사용한 것이었겠지. 한데 그게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나 때문이야.’
멍청하게 뇌진탕에 걸리는 바람에. 무력한 꼴이 되어서. 기회를 노리던 데미안도 다급했던 것일 터다. 이쪽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지 못하고 검격을 날린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끝장이 나게 된 거다.
내가 무력해서.
힘이 없어서.
“…….”
라키엘은 멍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앞발을 복구하느라 멍하니 서 있는 듯한 본드래곤. 놈의 가슴이 무방비로 활짝 드러난 모습이 보였다. 코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저기로 한 방.
강력한 한 방.
꽂아 넣을 수만 있다면.
내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아니, 최소한 만년필만 내 손에 있었어도.
조금은 다른 결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원통하게도. 억울하게. 이렇게.
‘끝나는 건가.’
……라고 탄식하는 순간이었다.
“리한 군의과아안-!”
마치 거짓말 같은, 실화가 아닌 것 같은, 여기서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외침이 수직갱도 위쪽에서부터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이거부터! 받도록!”
거친 외침과 함께 뭔가가 세차게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턱, 손에 잡혔다. 잡고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애타게 바랐던 무구.
만년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