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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26화 (425/468)

426화. 마성의 황태자 (3)

“리한 군의과아안-!”

마치 거짓말 같은, 실화가 아닌 듯한, 여기서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건 외침. 이내 위쪽에서부터 날아오는 검은 실루엣.

“이거부터! 받도록!”

……턱!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뭔가가 손에 잡혔다. 잡자마자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감촉. 너무나 익숙한 모양과 질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만년필……?”

그토록 애타게 바랐던 무구.

만년필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거 실화인가. 고민할 틈은 없었다. 손에 쥐어진 물건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들어 올렸다.

훤히 드러나 있던 본드래곤의 가슴, 그곳의 코어를 조준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다. 최소한의 마나를 입력하여 최대 출력의 화염을 쏟아내려…… 했지만 멈추었다.

- 쓰카하악악!

화염의 강타를 쏟아내기 직전, 본드래곤의 앞발이 먼저 복구되었다.

그런데 놈은 앞발이 복구되자마자 제 가슴의 코어부터 가렸다. 우연인 건지, 혹은 이쪽의 의도를 간파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쯧!”

라키엘은 만년필에 투입하려던 마나를 재빨리 거두었다. 섣불리 쏠 순 없다. 그래선 안 된다.

괜히 어설프고 성급하게 화염을 쏘았다가 그게 허무하게 막히면? 다시는 같은 기회를 붙잡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거면 한 방에 성공해야 해. 괜히 어설프게 빗맞혔다간 타격은 주지도 못한 채 놈의 경계심만 잔뜩 끌어올리게 될 거니까.’

한 방을 확실하게.

그러한 선빵의 진리를 새삼 되새기며, 라키엘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선택했다. 즉, 본드래곤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샤샤샥 움직였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포기하기엔 이르다. 게다가 혈당을 모조리 소모한 데미안이 쓰러졌다. 십중팔구 저혈당 쇼크 상태로 접어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속하고도 확실한 한 방으로 본드래곤의 코어를 타격한 뒤에, 녀석에게 사탕이든 꿀이든 뭘 먹여야 한다.

‘……이건 무슨 갓난아기 분유 타서 먹이는 것도 아니고!’

내심 한탄(?)하며 옆으로 데구르르 굴렀다. 본드래곤의 앞발이 뻗어올 수 있는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직후에는 뒤로 파파팟 기었다.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가까스로 참아내고서 발휘한, 생애 최대 속도의 포복이었다.

하지만 본드래곤도 바보가 아니었다. 놈의 시선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텅 빈 공허한 안와 구멍. 좀처럼 읽을 수가 없는 눈빛이라서 더욱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마침내 앞발 복구를 완전히 마친 놈이 한 걸음을 불쑥 내밀어 왔다.

쿠웅!

“…….”

애써 벌렸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다시금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와 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당장, 만년필을 쏴야 하나.

아니, 그보다도, 조금 전에 이 만년필을 던져준 사람은 누구였던 걸까. 어쩐지 그 목소리가 살짝 오싹한 쪽으로 익숙했는데.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감이!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리한 군의관을 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가아-!”

아까의 그 목소리가 재차 외쳤다. 그 외침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위쪽에서부터 여기로. 급격히. 내리꽂히듯. 본드래곤의 두개골에 검기 다발이 내리꽂힌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투카캉!

- 쓰하칵?

본드래곤이 주춤했다.

그사이,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이 본드래곤과 이쪽 사이에 거칠게 착지했다.

쿠쾅-!

굉음과 함께 내려선 거구의 뒷모습. 2미터에 육박하는 키. 떡 벌어진 어깨. 이쪽을 슬쩍 뒤돌아보는 투구. 테니온 시장의 심복, 그레노 경이 미끼 작전을 수행하며 입었던 차폐갑옷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물(?)은 다른 사람인 듯했다.

“괜찮은가, 리한 군의관?”

“…….”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쟈빌론이다. 확실하다. 그런데 이 인간에 여길 왜?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이런 대답부터 튀어나왔다.

“나 리한 군의관 아닌데.”

“안다. 황태자 라키엘. 그러나 내겐 리한 군의관이지.”

“…….”

이런 x발.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했다.

“댁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뛰어서 내려왔다.”

“아니 그게 아니고.”

“쓰러져 있던 놈의 갑옷을 빌려서 입고 왔다.”

“빌려? 그레노 경의 차폐갑옷을?”

“이걸 차폐갑옷이라 부르는 건가? 아무튼 그래. 내겐 조금 작아서 갑갑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입을 수는 있었지, 이렇게.”

“아니. 그게 아니고. 댁이 여길 왜 왔냐고.”

“왜?”

“그래. 왜.”

“리한 군의관. 그대가 있는 곳에 내가 있다. 이는 당연한 사실 아닌가?”

“어오 썅.”

“……뭐?”

“썅이라고, 썅.”

“그대가 방금…… 내게 욕설을 내뱉은 건가?”

“그딴 대답을 듣고 욕이 안 나오게 생겼어?”

욕도 나오고 닭살도 1톤쯤 돋아났다. 여기서 저 인간한테 저런 멘트를 들을 바엔 차라리 귓구멍에 엔진오일 두르고서 청양고추 팝콘을 터뜨리고 말지.

하지만 그런 이쪽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쟈빌론은 제 할 말만 떠들어댔다.

“하지만 상관없다. 리한 군의관, 그대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나는 그대를 사로잡아 내 곁에 둘 것이다. 평생, 내 두통만 치료하게 만들어 주지.”

“…….”

“그걸 위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황도에서부터 여기까지. 그대가 이동하는 모든 곳의 자취를 따라 함께했지.”

“…….”

“그러니 언젠가는 잡고 말 것이야, 그대를.”

“아니 내가 무슨 치ㅌ스도 아니고.”

“뭐? 치ㅌ스가 뭐지?”

“알 필요 없고. 일단 잡담은 여기까지.”

리키엘은 쟈빌론의 수다를 끊었다. 저 인간, 오랜만에 이쪽과 만나며 나름 기분이 좋은 것 같긴 한데, 지금은 화기애애하게 회포나 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쓰카하아악?

잠깐 잠잠했던 본드래곤이 포효했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기색. 어찌 보면 이쪽에게 뭔가를 묻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마치, 너 이젠 괜찮으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국경지대의 죄 없는 주민 수천 명을 끔찍하게 학살한 괴수가 사람을 걱정해 준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가 아닐까.

라키엘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을 치며 물었다.

“그쪽, 저거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 그건 나로서도 무리다.”

“……그런데 왜 나섰어?”

“그대가 나 이외의 다른 놈에게 죽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

“…….”

“우선 이것부터 받도록.”

쟈빌론이 뭔가를 내밀어 왔다. 만년설이었다. 그걸 받으니 비로소 생각이 정리되었다.

갑작스러웠던 쟈빌론의 난입. 쓰러져 미동도 없는 데미안. 여전히 이쪽만 집요하게 노리는 본드래곤. 꼬이고 묶인 퍼즐. 그걸 풀어낼 방법. 그러니까.

“잘 들어. 그쪽, 데미안을 업고 여길 빠져나가.”

“뭣?”

“두 번 말하지 않아. 길게 말할 시간도 없어. 저쪽, 수평 통로가 보이지? 저 끝에 막장이 있어. 그곳 천장에 작은 탈출구가 보일 거야. 지상까지 이어져 있을 안전 통로야. 거기로 나가. 데미안을 데리고.”

“내가, 왜?”

“안 그러면 두통 치료 같은 거, 평생 안 해줄 거니까.”

“…….”

쟈빌론의 대답이 굳었다. 아마도 이쪽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거겠지. 하지만 이쪽에게도 나름의 계산과 이유가 있었다.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올 기색을 보이는 본드래곤을 경계하며, 빠르게 말했다.

“데미안 녀석, 방금 무리해서 저혈당 쇼크가 왔을 거야. 당장 꿀이든 사탕이든 먹여야 해. 안 그러면 우리 모두가 죽어.”

“무슨…….”

“농담할 기분 아니야. 어차피 데미안은 이대로 놔둬 봤자 자력으로는 회복 못 해. 도움이 되지 못한단 소리야. 괜히 여기 있다가 본드래곤에게 밟히기라도 하면 죽을 뿐이고.”

“…….”

“게다가 그쪽, 아무리 날뛰어 봤자 본드래곤이 관심도 주지 않을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 저놈은 나한테만 꽂혀 있으니까. 그래서야. 차라리 그쪽이 데미안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줘.”

“뒷일은?”

“내가 감당해야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러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겠다.

감정을 내려놓고, 원하는 바를 버려두고,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이게 최선이라는 결론만 나왔다.

“어차피 데미안도, 그쪽도 도움이 안 돼. 그러니까 다들 나가 있으라고.”

“내가 왜 그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하지?”

“협박이니까.”

“두통 치료?”

“그래.”

“하.”

쟈빌론이 낮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신경을 집중할 여유는 없었다.

- 쓰카하악?

쿠우웅!

“……!”

본드래곤이 크게 한 걸음을 다가왔다. 재빨리 물러섰다. 그러나 놈은 한가롭게 이쪽을 놓아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감히. 그대가 내게 명령을 해? 그것도 협박을 곁들여서?”

쟈빌론의 투구 속에서 낮은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서늘하고 불길한 목소리. 그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고 말았다.

“차라리 잘됐어. 리한 군의관, 그대의 말대로라면 저 성가신 호위가 지금은 무력하다는 뜻이지?”

“…….”

젠장.

오싹한 예감이 척추를 훑는 순간, 쟈빌론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반 박자 늦고 말았다. 황급히 물러서려 하는 이쪽을 향해 그의 팔이 불쑥 뻗어왔다.

“그렇다면 지금이,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순간이로군.”

터턱!

그의 손아귀가 어깨를 움켜잡아 왔다.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가 훨씬 빨랐다. 그의 커다란 주먹이 복부에 꽂혀오기까지는, 불과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뻐어억!

“……!”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차폐갑옷? 소용이 없었다. 쟈빌론은 소드마스터였다. 그의 주먹을 타고 흘러들어온 마나가 갑옷을 간단히 통과해 명치를 직접 타격했다.

“……쿠, 쿨럭! 컥!”

뒤늦게 가까스로 뚫린 호흡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리의 힘이 탁 풀리며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컥컥대며 의식을 잃어가는 이쪽을 가뿐하게 들어서 어깨에 탁 짊어지는 쟈빌론의 뻔뻔함을.

“내가 수차례 말했을 텐데. 나는 오직 그대를 납치할 순간만을 기다려왔노라고. 그런데 왜, 어째서, 내가 그대의 말을 따라야 하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버려두고서 말이야.”

“……크, 쿨럭, 컥.”

“고맙군, 내게 이런 기회를 주어서.”

타닷!

이쪽을 들쳐멘 쟈빌론이 땅을 박찼다. 아까 알려주었던, 탈출로가 있는 막장 방향을 향해서였다.

‘미친…….’

순식간에 도약한 쟈빌론이 본드래곤의 곁을 지나쳤다. 내달렸다. 쓰러진 데미안을 뛰어넘었다. 막장 방향 통로로 접어들었다.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내가 안일했다.

쟈빌론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막 나갈 줄은 몰랐다. 내 탓이다.

멀어지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도. 본드래곤과 함께 남겨질 녀석의 미래도.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질 파멸적인 결말도 모두.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런데…….

- 쓰카하아아아아아악!

어째서 본드래곤이 나보다 더 다급한 포효를 내지르며, 나보다 더 빡친(?) 몸짓으로, 지금까지 없었던 초월적인 빠르기를 선보이며 이쪽으로 돌진해 오는 걸까.

마치, 쟈빌론의 마수로부터 날 구하기 위해 영혼까지 바칠 듯이. 그렇게. 앞발로 쟈빌론을 서슴없이 찰싹. 아니, 투쾅.

“……커억!”

그렇게, 의기양앙하게 납치 성공을 자축하려던 쟈빌론이, 채 열 걸음도 달려가지 못하고서, 본드래곤의 앞발 싸대기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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