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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27화 (426/468)

427화. 마성의 황태자 (4)

……퍼컥.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 혹은 부서지는 듯한 소리. 굉음? 모르겠다. 엄청난 소리가 전신을 뒤흔든 것 같다. 분명 그렇게 느꼈다. 한데 정작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작다. 아득하다. 너무나 멀리서 들려오는 듯이. 허공에 붕 뜬 전신이 거짓말인 것처럼. 삽시간에 다가오는 추락의 바닥이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트컹콰드큭!

혹시 본드래곤의 싸다구에 맞아서 자유비행을 만끽한 후에 돌바닥으로 배치기 다이빙을 해 본 적이 있나요. 네. 저는 있답니다. 짜릿하고, 아파요. 진심으로. 온몸이 친절하게 인수분해가 됐다가 재조립이 되면서 식도랑 항문 괄약근이 하이파이브를 하는 느낌이랄까.

‘……커어억.’

죽겠다.

오늘만 이런 식의 패대기가 몇 번째인지.

라키엘은 멍해진 의식 속에서 실눈을 떴다. 투구에 달린 특수경이 깨진 건지, 금이 간 건지, 혹은 흙먼지가 잔뜩 들러붙은 건지, 그도 아니라면 이쪽의 시각이 개판이 되어서인지, 하여간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캄캄했다.

푸르렀다.

때론 하얗게 작열하다가, 붉게 물들었다가, 노랗게 바랬다가, 다시금 오색찬란한 어둠으로 서걱서걱 잘려나갔다. 아무튼 참 이상했다. 가장 끔찍한데 웃기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나, 무사한 건가.’

호흡을 의식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숨을 쉬고는 있는 건지 의심부터 들었다. 그러니까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진 말고. 부풀어 오르는 아랫배를 느끼고. 내쉬면서 전신의 힘을 빼고.

“……쿨럭!”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걸까. 막혔던 호흡이 격한 기침과 함께 뚫렸다. 삽시간에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과 함께였다.

“그, 거억…….”

온몸이 아팠다. 그럴 법도 했다. 비로소 뒤늦게야 의식이 제대로 돌아왔다. 잠깐 퓨즈가 꺼졌던 기억의 굴레도 함께였다.

‘나, 쟈빌론한테 졸지에 납치를 당할 뻔했지.’

그리고 도주하던 쟈빌론이 본드래곤의 앞발 싸대기에 제대로 얻어맞았다. 고작 열 걸음을 달려보지도 못하고서. 제대로 분노한 듯한 일격에 철퍽. 덕분에…….

‘아예 벽에 틀어박혔구만.’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였다. 쟈빌론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현대미술을 방불케 하는 자세로 통로 옆면의 벽에 틀어박혀 있었다. 죽은 걸까. 혼절한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미동조차 하지를 않았다.

그럼 나는, 움직일 수는 있는 걸까.

‘그읏…….’

몸을 일으켜보려 애를 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쟈빌론이 본드래곤에게 얻어맞는 와중에 함께 휩쓸려 버린 것이 제일 문제였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본드래곤이 쟈빌론의 하체 쪽을 노리며 휩쓸어 버린 듯하긴 했지만.

‘저놈 앞발이…… 워낙 커서…… 으읏, 크긋!’

이쪽이 받은 충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살짝 빗맞긴 했지만, 공중에서 뜀틀 올림픽 금메달을 따낼 기세로 몇 바퀴나 회전했으니까. 그 기세를 그대로 살리며 장대한 배치기로 도약의 마지막을 장식했으니까.

사실은 몇 군데쯤 부러진 건 아닐까.

아니.

일단은 몸부터 좀 뒤집고.

“그읏…… 큭……!”

배치기 때문에 차폐갑옷의 앞면이 찌그러진 건지, 혹은 갈빗대가 나간 건지, 숨을 쉬기가 너무나 갑갑했다. 몸을 뒤집으면 조금 나을 것 같았다. 버둥거리며 애를 썼다. 얼마나 벌레처럼 바닥과 비비적거렸을까. 어찌어찌 간신히 몸을 뒤집고 누울 수 있었다.

덕분에 보게 되었다.

- 쓰하아악……?

“…….”

본드래곤은 언제부터 바로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던 걸까. 몸을 뒤집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본드래곤의 코끝이었다.

솔직히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먼지투성이가 된 특수경의 저열한 화질(?)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젠장.’

이건 완전히 차려진 밥상 꼴이다.

1초 뒤에라도 당장 본드래곤의 거대한 아가리가 이쪽의 허리를 두동강이라도 낼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두려움이나 불안감과는 별개로, 내가 뜻밖의 기회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나마 깨달은 덕분이었다.

‘코어…….’

본드래곤의 코어가 고스란히 보였다. 즉, 놈은 양쪽 앞발을 넓게 벌린 채 바닥을 짚고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팔굽혀펴기를 하는 듯한 자세였다.

덕분에 놈의 코어가 무방비로 열려 있었다. 코어의 균열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유혹의 표적지 같았다. 쏘라고. 맞춰 보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듯이 활짝 노출된 약점.

‘……은 못 참지.’

손아귀를 꿈틀, 움직였다. 뭔가 쥐어져 있는 게 느껴졌다. 왼손에는 납작한 카페 진동벨 같은 모양. 오른손엔 얇고 기다란 막대. 만년설과 만년필이다. 그걸 느끼자 일말의 희망이 피어났다. 할 수 있겠다. 가능하겠다.

- 쓰하아악? 하악……?

본드래곤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이며 팔을 들어 올렸다. 부들부들,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해야 하니까. 들어 올린 만년필로 코어를 조준했다. 왼손의 만년설은 전개를 준비했다.

만년필에 최소의 마나를 투입했다. 반대로 만년설에는 최대 출력의 마나를 밀어 넣었다. 먼저 반응이 온 쪽은 만년설이었다.

츠즈즈즈즈……!

냉기의 실드가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면 전면부가 망가지고 칠이 벗겨진 차폐갑옷의 방열 기능을 충분히 보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쏘았다.

망설임 없이.

투확-!

최소의 마나가 투입된 만년필에서 최대의 극열이 발사되었다. 단숨에 코어를 타격하며 휘감았다.

- 쓰카학?

본드래곤의 기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타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정말로 어렵게 잡은 기회였다. 이걸 놓치면 뒤가 없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집요하게 쏘고, 또 쏘았다.

투콱! 투화학-!

통로의 벽면이 통째로 붉게 달아오를 정도의 열기! 수천 도를 상회하는 염격에 직격된 코어가 붉게 물들었다. 균열을 따라 녹아내렸다. 그리고…… 용접이 되었다.

- 쓰학?

코어의 균열이 용접되는 순간, 역병의 권속 악티누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고통스러워서? 물론 따끔하고 뜨겁긴 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고통보다 훨씬 거대한 기쁨과 환희가 악티누스의 영혼을 물들였다.

- 스카하학! 카학!

절로 터져 나오는 기쁨의 표효!

악티누스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탄생하던 날, 흑마법사들의 저주가 쏟아지던 그 새벽, 자신은 얼마나 남몰래 탄식을 하였던가.

모자랐다.

창조자인 흑마법사들의 인원이 모자랐다. 마력이 모자랐고, 저주가 부족했으며, 기량 또한 구멍투성이였다.

하여 코어가 완전히 융합되지 못하였다. 불완전한 코어에는 지울 수 없는 균열이 새겨졌고, 균열 때문에 코어의 순환은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로 머무르게 되었다.

자신은 내내 그것이 불만이었다. 두고두고 아쉬웠다. 당시 흑마법사들의 인원이 모자라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의 기량이 충분했더라면. 자신이 떠안을 필요가 없었을 결함이었고, 하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동안 낙인처럼 품고 살아야 했던 결함이자 하자였던, 균열이 사라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열기에 녹아서, 벌어졌던 균열이 메꾸어지고, 합쳐지고, 융합되며, 매끈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 스크하하하학!

악티누스는 웃었다.

라키엘이 쏘아내는 만년필의 열기를 더욱 활짝 받아들였다. 아예 가슴을 살짝씩 틀어가며 코어의 옆면까지 두루두루 열기에 노출되도록 했다. 마치 한평생 김만 구운 김밥 장인의 것과 같은 몸짓이었다.

덕분에 만년필의 마지막 분출이 끝났을 때였다.

투확……!

최후의 불꽃이 통로를 휩쓸며 사라진 직후, 악티누스의 코어가 완전하게 융합이 되었다. 이제 더는 균열이 없었다. 조금의 흠집조차도 없었다. 완벽, 그 자체가 되었다.

덕분에 악티누스의 코어에서 전에 없던 마나의 흐름이 생겨났다.

……쏴아아악!

새로이 생겨난 1,024줄기의 마나가 격류처럼 분출되었다. 분출되며 코어를 둥글게 감쌌다. 자기장처럼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였다. 내내 코어로부터 쏟아져 나오던 방사선이 마나의 자기장에 가로막혔다. 더는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츠즈즈즛…… 즛……!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방사선 수치가 극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코어가 뿜어내던 열기도 마찬가지였다. 코어 자체는 예전보다 더 뜨거워졌으되, 그 열기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악티누스는 더욱 감격했다.

- 스하아악? 하악……?

원래 방사능이 뭔지도 모르던 악티누스였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자신의 몸에서 뭔가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었다. 어쩌면 그 정체 모를 분출이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문드문 품었더랬다.

한데 그게 없어졌다. 제어하지 못하던 분출에 고삐가 채워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기뻤다.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완벽한 존재가 되었노라고.

여기 쓰러져 있는, 이 사람 덕분에.

이 사람이, 내게 너무나 커다란 은인이라고.

- 하아악……? 학?

악티누스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키엘을 불렀다. 인간의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다. 당신이 나의 은인이라고. 평생 당신을 섬기고 싶다고. 그러니 나를 받아달라고.

“그읏…… 크긋…… 이게…… 무슨…….”

그런 본드래곤의 모습에 라키엘은 기겁했다. 아니, 기함했다. 분명히 코어를 파괴하려고 만년필을 쏘았던 건데, 설마하니 거꾸로 코어가 용접(?)이 되어 버릴 줄이야.

‘이거 실화?’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딱히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코어가 용접이 되어 버린 직후부터 대놓고 느껴지는, 본드래곤의 너무나 친근해진 태도 때문이었다.

“…….”

어째서 이놈은 강아지처럼 배를 깔고 헥헥거리는 걸까. 꼬리마저 흔드는 걸까. 심지어…… 앞발로 바닥에 커다란 하트를 비뚤배뚤 그리기까지 하는 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설마.’

라키엘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본드래곤이 앞발로 바닥에 새긴 어설픈 하트를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엎드린 본드래곤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오늘 겪었던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어쩐지, 이쪽을 간택이라도 한 듯이 집요하게 쫓아오던 모습. 정말로 날 죽이려고 했던 걸까. 만약 그런 거였다면, 벌써 열 번은 넘게 죽었을 거 같은데.

그런데 죽지 않았다.

매번 이쪽이 엄청난 타격을 받고서 버둥거릴 때면, 이놈은 어김없이 이쪽을 기다려 주었다. 덤으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이놈에게 살의가 있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이놈은 내내…….

‘날 따르려던 거야? 설마? 진짜?’

말도 안 된다.

그런데 그게 진짜인 것 같다.

그러면…… 확인을 해봐야겠다.

꿀꺽.

긴장 속에 마른침을 삼키며, 라키엘은 본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일어서.”

- 후악!

명령(?)을 들은 본드래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일어났다!

“……앉아.”

- 후아악!

쿠웅!

냉큼 앉았다.

‘설마.’

정말로, 진짜인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 꾸악!

본드래곤이 거대한 앞발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이쪽의 손 위에 촵, 올려주었다.

“그럼…… 빵야.”

- 꾸아악!

총을 쏘듯이 빵야를 시전(?)했다. 그랬던 본드래곤이 정말로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고는 옆으로 콰당탕 쓰러졌다. 그러고는 이쪽을 힐끔 쳐다보기까지 했다. 마치, ‘나 잘했지? 칭찬해줘.’라고 말하듯이.

확실하게 알겠다.

이건 진짜다.

“……헐. 미쳤네.”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전하아! 괜찮으십니까!”

뒤편의 수직갱도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라한 변경백의 외침이었다. 돌아보니 익숙한 이들이 달려오다가 다급하게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아스라한 변경백, 시장 브레다, 특근대의 세르지오, 근위대의 프란델 경, 그밖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검과 방패를 움켜쥔 비장한 차림으로 이쪽과 본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5초쯤 후에, 모두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은 얼빠진 소리를 투구 밖으로 흘려보냈다.

“헐.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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