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34화 (433/468)

434화. 홀리워터탕 페스티벌 (3)

깨달음은 짖궂다.

언제나, 대부분의 경우에, 필요한 것보다 아주 살짝, 한발 늦게 찾아오곤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러했다. 하르미온의 1왕자 제로스는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쯧. 비천한 것들 같으니라고.”

접견실로 안내를 받은 1왕자는 불쾌한 심정을 곱씹으며 혀를 찼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 자신이 받으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대접을 방금까지 잔뜩 받았던 까닭이었다.

‘뭐? 원샷? 감히? 내게?’

그는 조금 전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함성. 연호. 원샷, 원샷, 원샷, 눈을 감아도 그 우렁찬 외침이 온몸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불쑥 내밀던 커다란 그릇.

처음엔 뭔가 싶었다.

얼떨떨했다.

그릇을 내민 이를 살펴보았다.

감히 자신에게 이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올 수 있는 이라면, 응당 도시 내의 지체 높은 유력가의 가주이거나 신관쯤은 되어야 할 테니까. 그것이 정말 최소한의 자격일 테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그릇을 내밀어 온 이는 유력가의 가주도, 이름난 신관도, 하다못해 명성이 높은 학자나 예술가도 아니었다.

잡부.

그저 잡스러운 인부.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는 무명의 개돼지.

감히 자신과 눈을 마주칠 자격조차 없는 흙투성이 공사장 인부 따위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정체 모를 그릇을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화가 났다.

호통을 쳤다.

덕분에 주위가 한순간에 잠잠해졌던가.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일단 자신의 호위를 맡은 근위대부터 혼쭐을 냈다. 어디 감히 이런 것들이 다가오게 허락을 하는 것이냐고. 왕국의 법도와 규칙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온통 천한 것들뿐이었다. 오로지 천한 출신의 핏줄들이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며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주제에 감히 원샷? 듣도 보도 못한 함성을 이 몸에게 내질렀다는 사실이 새삼 불쾌했다.

하여 물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온 인부를 향해서였다.

‘이 그릇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인부가 움츠러든 어깨 사이로 대답했던가. ‘환영의 의미로 홀리워터탕을 드리려 했습니다’라고.

‘……홀리워터탕? 웃기는 소리!’

코웃음만 나왔다.

한편으로는 살짝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그게 대체 뭐길래 감히, 1왕자인 자신에게 이토록 난리를 칠 정도였나 싶었다.

그래서 한 잔 부어보라고 했다. 그릇을 채우던 탁한 빛깔의 액체를 보자니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서민 따위가 마시는 것에 너무 큰 기대를 품었나 싶었다.

한데 그때였다. 예상치 못했던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던 것은. 가만히 보니, 그 홀리워터탕이라는 음료에서 나오는 향기였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단순히 달콤? 아니, 최상급의 와인만큼 깊은 향이었다. 하여 홀리워터탕을 곁의 호위기사에게 먹였다. 자신이 출처도 모르는 음료를 아무렇게나 받아마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리워터탕을 마신 기사가 기절했다. 갑작스러운 괴로운 몸짓을 몇 번인가 퍼덕퍼덕. 그러더니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생선처럼 추욱. 창백해진 안색으로 홀리워터탕을 게워내며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

그거, 뭐였을까.

독약?

기사가 죽진 않았으니 그 정도까진 아닌 듯하고. 하여간 대경실색했다.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음료를 자신에게 내밀며 원샷? 웃기는 것들. 정도도 모르는 것들.

하여 좌우를 향해 매섭게 명하였다.

이곳에 있는 것들을 전부 잡아들이라고. 체포하여 감옥으로 연행하라고.

그러자 자신을 안내하던 시장이 황급히 설명했던가.

‘전하? 부디 진노를 거두시고 제 설명을 들어주십시오. 이 홀리워터탕은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개발한 피폭 치료 음료입니다. 비록 맛이 괴상할 정도로 쓰고 고약하긴 하지만, 혹여나 전하께서 이곳으로 오시는 동안 방사선에 입었을 피해를 치유하는 데에 크나큰 도움이 되는 음료일 터이니 모쪼록…….’

‘모쪼록? 모쪼록 뭐?’

‘이해를…….’

‘닥치거라!’

……라는 호통과 함께 시장도 함께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곧바로 걸음을 돌려 이곳, 시장 관저의 접견실로 걸음한 것이었다.

“쯧.”

하여간 이 도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따위가 접견실? 왕도에서는 키우는 개한테나 줄 법한 허름한 공간을 만들어두고서 접견실이라니, 코웃음도 나오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마젠타노의 황태자인지 뭔지 하는 그 개x끼는 언제 오는 거야.”

자신이 사람을 시켜서 접견을 요청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껏 소식이 없는 걸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국의 황태자라고 으스댈 꼬락서니도. 예고조차 없이 이곳에 와서, 허락도 없이 공적을 세우고, 민심을 얻고, 괴상한 페스티벌이나 만들며 설쳐댄 꼬라지도. 전부.

그때였다.

똑똑똑.

“마젠타노의 황태자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와 함께 접견실 문이 열렸다. 이윽고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은발의 사내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만나서 반갑습니다.”

1왕자 제로스는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안면을 싹 지우고 외교용 미소를 장착했다. 그러자 황태자도 비슷한 빛깔의 미소로 화답해 왔다.

“저 또한 하르미온의 1왕자가 떨치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 명성을 말입니까?”

“예. 벌써 시내 곳곳에 풍문이 자자하더군요. 이곳에 오자마자 도시의 해이했던 기강을 엄정하게 바로잡으신 대쪽처럼 곧은 성정에 대한 칭송 말입니다.”

“…….”

이거, 먹이는 건가.

1왕자 제로스는 잠깐 입가를 꿈틀거렸다. 마주 앉은 황태자의 입술에 내걸린 은은한 미소를 보자니,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황태자의 말은 명백한 비난이라고.

제로스는 피식 웃었다.

“출처도 모르고, 용도도 밝혀지지 않은 끔찍한 음료를 축제랍시고 마셔대는 무식한 만용과 방종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었지요. 제게도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힘든 결정이셨다, 라.”

“안 그랬을 것 같습니까?”

“아뇨. 이 도시의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던 때에는 어쩐지 그런 힘든 결정을 내리지 않고 멀찍이만 계셨던 듯해서.”

“필사적인 마음으로 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만.”

“그러시겠지요. 이곳 사람들이 전부 1왕자의 백성들이니까 말입니다.”

“예. 그렇지요. 제 백성들이지요.”

“그래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백성들을 감옥에 투옥하신 겁니까?”

“그것 또한 지배자의 권한이겠지요.”

“아, 그렇군요. 제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잘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홀짝.

자신이 이겼다.

1왕자는 만족하며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한데 그때였다.

“그래서 1왕자께 드리는 말씀인데, 투옥된 이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어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네?”

뜻밖의 개소리였다.

1왕자는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곳 시민들이 벌이던 축제는 엄연한 치료 행위였으니까 말입니다.”

“치료? 그것이? 그 끔찍한 음료가?”

“예. 약입니다.”

“설마. 황태자께서 만든 음료이니 무해할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겁니까?”

“적어도 제법 검증은 거쳤지요. 누군가의 추측이나 억측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래 봤자 이교도의 허락 받지 않은 치료법 아닙니까?”

“이곳의 신관장은 허락을 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쩔 겁니까?”

1왕자가 테이블을 향해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그런 이쪽의 태도에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부담을 느낀 걸까. 마치 이쪽을 피하듯, 상체를 뒤로 부자연스럽게 기대었다. 마치, 소파 등받이에 파묻히려는 듯이.

제로스는 그 모습이 즐거웠다.

‘하. 역시. 제국의 황태자? 헛소리 말라고 그래. 제국이건 뭐건 간에, 여긴 하르미온의 영토야. 엄연한 내 땅이고, 네놈은 그런 내 땅을 무단으로 침범한 존재에 불과해. 그러니 지금 이 회담의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고.’

그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명분이다.

자신이 유리한 명분을 등에 업었노라 확신한 1왕자의 미소가 비릿하게 번졌다.

“혹시 말입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께서는 지금 우리 하르미온에 대한 내정간섭을 행하려 하시는 겁니까?”

“예? 그건, 그럴 리가…….”

“어째 아까부터 하시는 말씀이 다 그런 쪽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군요.”

“당연히 미안해하셔야지요. 무단으로 영토를 침범한 것도. 제멋대로 타국의 일에 지나친 간섭을 하셨던 것도.”

“…….”

“그래서 그리는 말씀입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한 가지 제안을 드리지요.”

“제안이라. 무엇입니까?”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이 도시에서 나가주십시오.”

“하. 진심입니까?”

“농담 같습니까?”

“…….”

“황태자께서 내 요구에 불응한다면, 그때는 더 큰 배상을 위한 협상 테이블이 공식적으로 열릴 겁니다. 어디, 그래도 좋습니까?”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는 1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위험한 사태가 다 끝나고 난 후에야 뒤늦게 쭐레쭐레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랬다. 이곳에 오자마자 홀리워터탕 페스티벌을 중단시키고 무려 수백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투옥한 것도 그랬다. 심지어 투옥된 이들 중에는 시장 브레다마저 포함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 인간, 딱 그거네. 자기 감정 상하면 주위를 막 대하는 타입.’

아마 지금껏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평생을 유리한 갑의 위치에서만 살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삶을 누려왔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그런 듯했다.

‘쯧쯧. 나한테 감사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오히려 감정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고, 당장 꺼지란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당연하게도 화가 났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이 고분고분한 미소를 방긋 지어 보인 것은. 그리고 1왕자가 매우 만족할 대답을 알뜰하게 돌려준 것은.

“……알겠습니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니, 나가야 하는 것이 손님으로서의 예의이자 도리겠지요.”

“내 뜻을 잘 아셨으니 다행입니다.”

“예. 그럼 회담은 여기까지로 하고, 저는 1왕자께서 건넨 당부대로 도시를 떠날 준비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배웅은 없을 테니 알아서 잘 살펴 가시길.”

“예. 그럼.”

라키엘은 별다른 대꾸나 반발 없이 물러났다. 그동안 1왕자는 라키엘에게 비릿한 비웃음만을 보냈다.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한 자의 미소였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1왕자의 적반하장식 요구에 고분고분 수긍한 황태자 일행이 순순히 도시를 떠나갔다. 쓱싹 납치한 1왕자를 전리품, 혹은 하르미온 관광 기념품(?)으로 챙기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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