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지글지글 보글보글 (1)
“하, 마젠타노의 황태자? 실제로 보니 별것도 아닌 인물이었군.”
회담이 끝났다.
황태자와의 대면을 마친 1왕자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숙소의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모처럼 편안한 숨이 흘러나왔다. 사실 아까는 조금 긴장해 있었는데. 마젠타노의 황태자와 독대한다는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다 쓸데없는 긴장이었던 것 같다.
‘도시를 떠나란다고 순순히 떠나? 쯧, 아무 줏대도 없는 비리비리한 놈 같으니라고.’
절로 실소가 나왔다.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솔직히 황태자가 조금이라도 반발을 할 줄 알았다. 아무리 무단으로 국경을 침범해 들어왔다지만 상대는 엄연한 황족, 제국의 후계자였다. 당연히 자신 못지않게 오만하고, 안하무인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실제로 대면한 황태자는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름으로 이쪽과 각을 세워본답시고 까칠한 말로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정작 도시에서 당장 꺼지라는 이쪽의 강경한 요구를 듣고 나서는 별다른 반박도 못 했다.
‘그게 그놈의 실체인 것이겠지. 비아냥까지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도망치고 마는 나약한 습성. 역시 소문은 거짓에 불과했던 거야.’
전에 들었던 황태자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한때는 병약하여 황태자위를 지키는 것조차도 불투명했다 하였던가. 한데 어느 날부터 사람이 점차 바뀌었다고 했다. 다소 건강을 회복하며 숨겨왔던 진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노라고도 했다.
하여 수많은 공적과 명성을 쌓아 올렸다던가.
한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그따위 소문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따위 약골에 겁쟁이 놈이 수많은 공적과 명성? 웃기는 소리. 이제 보니 전부 만들어진 소문이었어. 마젠타노 황실에서 황태자의 권위를 살려주려고 만들어낸 소문 말이지. 쯧쯧. 안타까운 것들 같으니라고.’
제국씩이나 되어서 하는 일이라곤 허위소문으로 허세를 부리는 게 다였다니.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불쌍하게도 느껴졌다.
자신처럼 고귀한 혈통에 어울리는 담대하고 우아한 인물을 갖추지 못한 마젠타노 황가는 어찌나 불운한가. 아마도 다음 세대에는 이쪽과 마젠타노의 국력이 역전되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 것이다. 왜냐. 하르미온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이토록 빼어난.
이토록 준수한.
이토록 호쾌한.
그 순간이었다.
콰직!
“……!”
난데없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침실의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커다란 실루엣 하나가 부서진 문을 뭉개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익숙한 모양의 갑옷. 망토. 그리고 실수로 떨어뜨린 케이크 조각처럼 살포시 뭉개진 얼굴.
“바틴 경?”
자신의 근위대장 바틴 경이었다. 하르미온에서 능히 열 손가락 안에 들 강력한 기사 바틴 경이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형편없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어떻게?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쓰러진 바틴 경을 태연하게 넘으며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흑발의 사내가. 사내의 너무나 평온하고도 멀쩡한 모습이. 그 뒤를 따라 건들거리듯 모습을 나타내는…….
“……황태자?”
댁이 왜 여기서 나와?
1왕자는 묻고 싶었다.
황태자와 그의 호위가 어째서 자신의 숙소에, 이런 방식으로 들어오는 것인지. 자신의 근위대장은 대체 어떻게 저렇듯 엉망진창이 된 것인지. 이 상황이 정녕코 무슨 의미인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전부. 궁금한 게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하나도 물을 수 없었다.
“쉿. 지금 우리가 바빠서.”
“……허?”
황태자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눈웃음을 그렸다. 그를 따르는 흑발 호위의 모습이 흐릿해진 것도 그 순간의 일이었다.
뻐억!
“……!”
어느새 명치에 꽂혀 버린 흑발 호위의 주먹!
1왕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숨이 콱 막혔다. 비명도,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역자로 접힌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고서, 원망스러운 눈길로 황태자를 쏘아보는 것만이 전부였다.
“……허, 크, 헉?”
어째서?
내게?
왜?
묻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억울했다. 따지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의문도, 항의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멍해지고, 눈꺼풀 앞이 삽시간에 캄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황태자 놈에게 따져야 하는데.
가능하면 한 방쯤 먹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한심하게 쓰러지며, 황태자가 이죽거리는 소리를 무력하게 들을 수만 있었을 뿐.
“혹시 마젠타노 관광, 해본 적 있어?”
……관광은 개뿔.
말로는 미처 내뱉지 못한 내적 대꾸.
그것이 1왕자가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
아프다.
배가 아프다.
맞은 곳이 아프다.
부러워서 또 아프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어째서 그렇게 태연했던 걸까. 어째서 그의 호위가 내 호위보다 강했던 걸까. 어째서 나는 그런 굴욕을 당해야 했나.
배를 얻어맞고.
컥컥거리다가.
이렇게 깨어나서는…….
“……크, 쿨룩! 켁!”
1왕자 제로스는 악몽에서 깨어나듯 온몸을 움찔거렸다. 그를 처음으로 맞이한 감각은 불쾌하고도 격렬한 기침이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동시에 와락 겁이 났다.
‘여긴 어디지?’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빛 한 점도 없는 완벽한 암흑. 혹시 자신의 눈이 멀어 버린 걸까. 다급한 마음에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 손이 묶이진 않았구나.
‘그럼…… 다리도?’
1왕자는 무의식중에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뜻밖에도 자유로웠다. 묶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몸 어디도 묶인 곳이 없었다. 재갈이 물리지도 않았다. 즉, 자신은 비교적 신체가 자유로운 상태로 아주 캄캄한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제, 젠장!”
그제야 아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제대로 좌르륵 떠올랐다. 덕분에 찾아온 첫 감정은 격렬한 분노였다. 이런 치욕이라니. 이런 굴욕이라니.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수치스럽게 얻어맞은 것은. 무력하게 정신을 잃어버린 것은.
“감히!”
1왕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었다. 사방을 짚으며 공간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여기가 어디건 간에 일단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텁!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뭔가 이질적인 물체가 손에 잡혔다. 크기는 사람 머리통만 했다. 감촉도 사람 머리통 같았다. 털 같은 게 숭숭 돋아난 느낌도 딱 사람 머리통이었다. 이내 들려오는 누군가의 까칠한 물음도 사람 머리통에서 나오는 소리 그 자체였다.
“지금 사람 머리통을 함부로 만져대는 건가?”
“……!”
화들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비로소 1왕자는 깨달았다. 이 공간에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
물었다.
의외로 대답은 순순히 돌아왔다.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하?”
“그대는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적어도 일국의 왕족이라면 말이지.”
“…….”
쟈빌론.
당연히 들어본 적 있다.
앙부아즈의 반란자. 내전에서 패배한 뒤로 앙부아즈 왕가의 손에 처단됐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그가 왜 이런 곳에 자신과 함께 갇혀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감히 내게 거짓을 나불거려? 너야말로 누구냐. 누구냔 말이다.”
1왕자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었다. 자신을 쟈빌론이라 주장하는 자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죽고 싶은가?”
“뭐? 어딜 감히!”
1왕자가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한 대쯤 올려붙여야 상대가 고분고분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당연하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상대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내뿜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그대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군.”
“……!”
1왕자의 전신이 덜컥 멈추었다. 상대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완벽한 포식자. 맹수와 함께 갇혀 있는 기분이 그를 사로잡았다. 뺨을 때리려고 치켜들었던 손이 저도 모르게 고분고분 내려갔다.
동시에 강력한 깨달음이 그의 생존본능을 자극했다. 진짜다. 허풍이 아니었다. 정말로 쟈빌론이 맞는 것 같다. 이런 살기와 위압감은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발산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그럼…….”
“이제야 내 말에 신뢰가 생긴 것인가?”
“그, 그렇소.”
“하면 내 턱을 좀 놓아주는 것은 어떨는지.”
“…….”
1왕자는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뒤늦게야 깨달았다. 쟈빌론과 자신이 갇힌 이 공간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그리고 양쪽에 기다란 의자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어둠 건너편에서 쟈빌론의 말이 들려왔다.
“우린 마차 안에 갇혀 있지.”
“마차 말이오? 황태자의?”
“그래.”
“하면…… 쟈빌론, 당신은 왜 여기에?”
혹시 자신을 감시하려고 황태자가 붙여놓은 사람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쟈빌론이 황태자의 하수인일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희미한 희망이 엿보이기도 했다.
‘잠깐. 쟈빌론이 여기 있다는 건…… 내게 좋은 징조일 수도 있어.’
전에 접했던 정보가 떠올랐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하였던가. 한데 아델린은 쟈빌론의 숙적이자 앙숙이었다. 즉, 쟈빌론은 황태자와도 험악한 관계를 지녔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했다.
‘즉, 쟈빌론은 황태자의 적이지. 황태자는 나의 적이고. 그러니까…… 적의 적은 곧 아군! 이 사람은 내게 힘이 될 존재다!’
어쩌면, 쟈빌론을 잘만 이용한다면 이 곤경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오히려 황태자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말의 희망을 느낀 1왕자가 물었다.
“혹시 그러면…… 당신은 날 구해주러 온 거요?”
“뭐?”
“황태자는 우리 공통의 적이니까 말이오. 그래서 혹시, 전략적인 협력을 위해서 날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
“나도 납치된 건데.”
“…….”
“게다가 나는 그대와 달리 묶여 있는 처치라서 당장 탈출은 좀.”
“젠장…….”
희망(?)이 사라졌다.
1왕자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별안간 마차 창문이 열리며 강렬한 햇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강렬한 빛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물어왔다.
“정신이 들었어?”
“…….”
황태자다.
듣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들어본 가장 얄미운 목소리와 말투니까. 저걸 어떻게 잊을까.
“감히! 왕족인 나를 상대로 무슨 짓을!”
분노의 샤우팅이 절로 성대를 찢으며 터져 나왔다. 하지만 빛을 등진 황태자는 고개만 한쪽으로 까딱, 뻔뻔스럽게 기울였다. 그리고 무슨 뜻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있잖아. 지금 나한테는 두 가지 검색엔진이 있어.”
“……뭐?”
검색엔진?
그게 뭐지?
얼떨떨함에 멈칫하는 사이, 황태자가 뭔가를 들어 올렸다.
“하나는 요거야. 지글(Geegle).”
치이이익!
황태자가 들어 올린 것은 새빨갛게 달구어진 인두였다.
“화 속성의 검색엔진이지. 요기, 커서가 빨간색일수록 검색 속도가 빨라진다?”
“무슨…….”
“그리고 이건 보글(Bogle).”
출렁!
두 번째로 황태자가 들어 올려 보인 것은 물을 가득 담은 가죽 주머니였다.
“수 속성의 검색엔진이야. 실제로 검색에 쓰는 물은 이것보단 제법 많을 거고. 보글보글 소리가 많이 날수록 검색속도가 빨라져. 왜냐. 물은 답을 알고 있거든.”
“설마…….”
“응. 이제부터 댁을 살포시 지지고 볶고 괴롭혀서 원하는 대답을 얻어낼 거란 소리야.”
“감히! 그래도 되는 건가!”
“어.”
격하게 항의했다.
황태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음기를 싹 지운 목소리로 낮게 뇌까렸다.
“싫으면 당장 도시를 내놓든가. 그러면 유혈사태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