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지글지글 보글보글 (2)
지글지글!
무언가가 끓는 소리.
혹은 타오르는 소리, 아니, 소음.
1왕자 제로스는 자신의 고막을 후벼파는 ASMR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안면 근육을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눈을 가린 안대를 벗어보려는 나름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안면기예의 달인이 아니었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안대를 벗겨내는 기적을 행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강제로 눈이 가려진 채로,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만 모든 정보를 의지해야 했다.
그 처지가 그의 기분을 더욱 끔찍한 도가니로 몰아넣었음은 물론이었다.
“이, 이봐?”
“…….”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대.
아니, 빌어먹을 황태자!
“이봐? 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
역시나 황태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른 소리가 돌아오긴 했다. 지글지글. 또다시 뭔가가 끓는 듯한, 혹은 가만히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후우, 후웁……!”
1왕자는 호흡을 고르며 공포심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뭔가가 끓는 소리, 타는 소리와 함께 아까 황태자가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던 물건이 자꾸만 연상되었다. 인두. 시뻘겋게 달아오른. 사람의 몸을 지지기 위해 만들어진 고문 도구.
“서, 설마, 정말로 내게 그따위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생각하며 물었다. 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그 침묵이 1왕자의 불길한 상상력에 부스터를 한껏 넣어 주었다.
갑작스럽게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였다.
“자, 잠깐! 잠까아안-!”
불쑥 다가오는 인기척에 1왕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인기척이 우뚝. 1왕자는 자신의 눈을 가린 안대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말했다.
“나는……! 나는 왕족이다.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선택받은 사람이야. 그런데 내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한다고?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무사? 못하면 어쩔 건데.”
“지탄받을 것이다. 영원히 회자되며 비난받을 것이다. 명예도 모르는 황족 같으니라고! 그런 소리를 들으며 여생을 살아가도 좋은가? 정녕, 그런가? 응?”
“움직이지 마. 화상 번져.”
치이이익!
“……끄읏!”
강렬한 뜨거움이 손등에 내려앉았다. 정확하게는 손등 방향,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의 뿌리가 만나는 살갗이 연약한 지점이었다.
“아아아, 크아아아악!”
1왕자가 고통에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떠한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손등에 올려진 뜨거운 것을 치울 수도 없었다. 양팔이 의자 팔걸이에 얹힌 채 묶여 고정된 까닭이었다.
“……크그극! 그그으으극!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아플 수가 있을까.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 있을까.
너무나 아파서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흐른 눈물이 안대를 적셨다. 한없이 무력한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고 화가 났다.
그런 1왕자를 바라보는 라키엘의 눈빛에도 한심함이 배어났다.
“그렇게 아파?”
“그그그으윽! 그긋!”
“이거 생각만큼 아픈 거 아닐 텐데.”
“……주, 죽인다!”
“그래. 이게 좀 죽여주긴 해.”
후욱!
라키엘은 1왕자의 손등, 액문혈(液門穴)에 잠시 올렸던 쑥뜸봉을 치웠다. 그리고 물었다.
“어때? 눈가가 좀 촉촉해지지 않았어?”
“……커흐윽! 흐억! 후! 후욱!”
“촉촉해졌을 거야. 여기가 안구 건조에 좋은 자리거든.”
“죽여 버린다아아악!”
“아이고 자꾸 그렇게 쌩목으로 소리 지르면 목 다 쉬는데.”
라키엘은 싱긋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사실은 1왕자 입장에선 저럴 법도 했다. 아마도 자신이 인두로 지져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이라 상상하고 있을 테니까. 그 상상의 나래 속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이쪽이 노린 바였다.
“그런데 어쩌나. 날 죽이겠다고? 벌써 그렇게 악이 차올라? 곤란한데. 난 이제 시작인 거라서.”
“……뭐?”
“내가 말했잖아. 검색엔진 지글.”
“무슨…….”
“이제 시작이라니까? 이쪽 손은 아직 안 했잖아?”
치이익!
이번엔 쑥뜸봉이 반대편 손등 액문혈에 올려졌다. 1왕자가 갓 낚아 올린 등 푸른 고등어처럼 힘차게 퍼덕거렸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해. 내가 불러주는 그대로 읊으면 돼. 그러면 편해질 수 있다니까?”
“무, 무슨…… 그그으극, 크극!”
“나 1왕자 제로스는 하르미온의 영토였던 도시 테니온을, 마젠타노 제국령으로 양도함을 선언한다. 이렇게.”
“……개소리를!”
“응, 아직 덜 괴로운 거구나?”
치이익!
이번에는 액문혈에서 손등 쪽으로 살짝 더 올라간 자리의 중저혈(中渚穴)에 쑥뜸봉이 올려졌다.
“크아아아악!”
한꺼번에 두 곳을 향하여 감행된 ‘건강해져라’ 고문법!
라키엘의 요구는 간단했다.
“말해. 테니온을 마젠타노 제국에게 바치겠노라고.”
“미, 미친! 크그으급!”
“말하기 싫으면 다른 괴로움도 함께 맛봐야겠지?”
톳! 토도돗!
“크아아악!”
이번에는 제법 아픈 통증을 선사하는 꼬슴이표 갈색 가시가 1왕자의 몸에 푸푸푹 꽂혔다. 안구건조증, 목 결림의 해소에 좋은 혈맥만 골라서였다. 물론 그걸 모르는 1왕자는 갑작스러운 날카로운 통증에 또다시 상상력을 새록새록 펼쳐야 했다.
‘이, 이번엔…… 뭐지!’
바늘인가?
아냐.
바늘이라기엔 너무 아파.
그러니까 이건…… 불에 달군 대못이다!
“크, 크그그그아아악! 그가각!”
1왕자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덕분에 라키엘의 입가에 실소가 맺히고 말았다.
“이게 그렇게 아픈가? 겨우 갈색인데? 검정색으로 찌르려다가 쇼크로 혼절할까 봐 진짜 많이 봐준 건데.”
“……그그그아악.”
“괜찮아. 안 죽어. 이거 할머니들도 잘 맞는 거거든.”
“미친……! 노인들도 괴롭혔던 것이냐, 이 악독한 자야!”
“어 내가 우리 동네 어르신들한테 좀 쩌는 아이돌이긴 했어. 부경한의원에 사는 치유의 요정이었달까.”
“무슨, 개소리를……!”
“멍멍. 또 한 방 갑니다갑니다갑니다아.”
토돗! 톳!
“크그긃! 두, 두 방이잖……!”
“어 미안. 그래서? 도시 줄 거야, 안 줄 거야?”
“내, 내가 왜 그걸…… 너 같은 미친놈한테……!”
“어이쿠 어깨가 틀어진 걸 보니까 평소 앉는 자세가 말투처럼 삐딱했나 보네.”
뽀그닥!
“……그거헓?”
이번에는 다짜고짜 레고 조립술을 곁들인 추나요법으로 목 비틀기!
덕분에 1왕자는 깨달았다.
황태자라는 이 미친 인간이, 어쩌면 정말로, 오늘 자신을 죽이려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정말이야. 장난이 아니야. 단순한 협박이나 위협? 그것도 아니야. 방금…… 하마터면 목이 꺾여서 부러질 뻔했다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힘차게 줄줄 가로질렀다. 두려움에 눈물도 나왔다. 하지만 1왕자는 참아냈다. 자신은 고귀한 핏줄을 지닌 존재다. 한낱 이따위 고문에 굴할 만큼 비루한 자가 아니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명예를 지켜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일 바엔 차라리…… 나를 죽여라!”
“어휴. 숭하게 무슨 그런 소리를.”
“더는 나를 모욕하지 말란 말이다!”
“모욕이 아닌데. 내가 장난을 치는 걸로 들려?”
“……뭐?”
절규하듯 항의하던 1왕자가 멈칫했다.
라키엘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진지해. 댁을 정말로 죽일 수도 있지만 안 그러고 있잖아. 신사다운 명분으로 협상을 요구하고 있잖아.”
“신사다운? 명분……?”
“어. 내 환자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명분.”
“뭐? 환자……라니?”
“테니온의 시민들.”
라키엘이 딱 자르듯 말했다.
“1왕자 댁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거기 사람들은 시장을 포함해서 전부 내 환자들이야. 왜냐. 내가 연구하고 직접 달인 탕약을 마셨거든. 내 치료를 받던 중이었거든.”
“그, 그게 지금 도시를 내놓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상관? 당연히 있지.”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댁이 나한테 요구했지. 당장 도시를 떠나라고.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 말대로 순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시를 떠나왔으면, 탕약 원샷 페스티벌 현장에서 체포되어 수감된 시장과 시민들이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당연히…….”
“죄인이라고?”
“당연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지. 멀쩡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말이야. 자기 마음에 조금 안 들었다고 마구잡이로 가두고. 없던 죄를 뒤집어씌우고. 결국엔 댁한테 해코지를 당했겠지? 어쩌면 대다수가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을 거고.”
“그건…….”
“부정을 못 하네. 역시 이런 식이라니까.”
“설마, 황태자, 당신은 고작 그따위 개돼지 같은 비루한 것들을 위한답시고 도시를 내놓으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거였나?”
“쓰읍. 비루하다니. 어딜 감히 남의 환자분들한테.”
“그게 무슨…….”
“어쨌건, 내 환자는 내가 끝까지 지킨다. 그게 내 신조고, 나는 지금 그 신조에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길을 걷는 거야. 이쯤 말했으면 잘 알겠지? 도시를 넘겨.”
“……하! 개소리!”
“협상 결렬? 오케이. 좋아.”
라키엘이 쓴웃음과 물러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1왕자는 나름의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어쩌면 오늘, 죽을 정도로 험한 일들을 겪을지도 모르겠노라고. 하지만 그 어떤 역경 앞에서도 저 미친 인간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진 않을 거라고.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고귀한 핏줄이니까. 그리고 내겐, 5천의 군세가 있으니까!’
사실 1왕자는 자신의 자존심이나 정신력 외에도 따로 믿는 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왕도에서부터 이끌고 왔던 5천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서 여전히 존재감이 느껴지는 위치 표시 아티팩트였다.
‘다행히 아직 아티팩트를 들키지 않았어. 멍청한 황태자 놈. 이제 내일쯤이면 당황할 거다. 이 몸의 충실한 5천의 병력이 아티팩트가 보내는 위치 신호를 따라 네놈을 추격하여 포위할 것이거든.’
……어디, 그때에도 지금처럼 여유롭게 웃을 수 있을까. 그때가 오면 바뀐 입장을 한껏 살려 네놈을 하르미온의 왕도로 납치해 주마. 그리고 제국의 황제에게 굴욕적인 몸값 흥정의 경험을 새겨주도록 하지.
‘부디, 그때까지, 두고 보자, 황태자!’
결연하게 이글거리는 복수에의 의지. 1왕자는 심호흡을 하며 이어질 고문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각오는 한참 전에 다져두었는데, 어쩐지 고문이 시작되지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손길이 안대를 벗겨주었다.
확!
“……으읏?”
갑작스럽게 안구를 찌르는 환한 햇볕.
1왕자는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어둠에 적응되어 있던 시야는 조금 후에야 회복이 되었다. 차츰, 조금씩, 주위의 사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사물이 아니었다. 사람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주위에 잔뜩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내…… 장군들?”
자신의 기억에 있는, 왕도에서부터 보무도 당당하게 이끌고 왔던, 5천의 병력을 이끌던 지휘관들이 손발이 묶인 채 무릎 꿇고 있었다. 계급이 높은 준간부급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묶여 있었다.
“이게 무슨…….”
얼떨떨한 기분에 빠진 1왕자의 시선이 황급히 바빠졌다. 그의 눈길이 사방팔방을 더듬었다. 더욱 많은 시각 정보가 그를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자신이 고문을 받던 이곳. 이제 보니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테니온의…… 광장?”
“빙고.”
황태자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광장을 둘러싼 자신의 1만에 달하는 군대와, 미노타우로스 괴물과, 새하얀 본드래곤과, 그 너머에 웅성웅성 모여서 이쪽을 구경하는 수많은 테니온의 시민들을 가리켰다.
“내가 댁을 납치해서 어디 먼 데로 데려간 줄 알았어? 아니지. 여기로 다시 돌아왔지. 덕분에 조금 전까지 댁이 이 도시 사람들에 대해 떠들었던 본심을 모두가 제대로 감상해 버렸고.”
“…….”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말이야. 딱히 그쪽이 도시를 안 넘겨도 여기 사람들이 알아서 넘겨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단 말이지이?”
“…….”
이거, 실화인가.
1왕자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민들의 매몰찬 시선에 망연자실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