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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39화 (438/468)

439화. 지배자의 시대유감 (1)

“제발,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다오.”

“…….”

“어찌하여 대답이 없느냐?”

“저, 그게…….”

“정녕, 그 소식이 사실이더냐?”

“…….”

“어허. 또 합죽이가 된 것이냐?”

“저기, 그게…… 사실은…….”

“사실은?”

“사실이…… 맞사옵니다.”

“허어.”

하르미온의 국왕,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은 깊은 탄식과 함께 기다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거의 명치까지 내려오는 기다랗고 풍성한 수염. 자신의 자랑거리이자 트레이드마크인 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요하고도 간단한 임무를 맡겨 국경도시로 보냈던 1왕자가, 대형 사고를 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너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우리 왕실이 테니온을 마젠타노에 바치게 되었다는 뜻이렷다?”

“아니, 그건 아니옵니다. 바쳤다기보다는 비열한 수단에 억울하게 강탈을 당하여…….”

“비열? 억울?”

“예, 예!”

“쯧쯧. 협상 테이블에 비열함이 존재할 수 있더냐?”

“……예?”

“어리석은 놈.”

국왕 하르난트는 다시금 탄식했다. 여전히 억울하다는 듯이 조아린 1왕자의 모습을 보자니 탄식이 더더욱 깊어졌다.

‘어째서 내 아들들은 죄다 이 모양인지.’

1왕자는 어리석고 오만하다.

2왕자는 난폭하고 조급하다.

3왕자는 아예 사람 구실도 힘들다.

각각 따로 놓고 보아도 누구 하나 왕의 재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도 왕위를 넘겨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1왕자에게 왕세자의 자리를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세 아들 모두가 똑같이 모자람을 지녔다면, 그나마 장자에게 왕위를 주는 것이 분란을 적게 일으킬 길이라 본 까닭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아무도 아니야. 이래서는 본 왕가의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겠구나.’

이번에 1왕자가 친 대형 사고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테니온.

정체불명의 본드래곤의 난동으로 위기에 처하였던 국경의 도시. 긴급 상황에서 발동된 성막 때문에 왕도에 전해져 온 소식이 다소 늦었더랬다.

한데 그 소식의 속사정이 충격적이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테니온의 공방전에 방어군으로 참전하였다고 했다. 심지어 본드래곤을 제압하고 사고의 뒷수습까지 도맡았다고 했다.

듣자마자 위기감을 느꼈다. 향후 테니온의 민심이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1왕자를 급히 보냈다.

5천의 정예군과 함께였다.

손쉬운 임무였다. 원래 테니온은 하르미온 왕가의 것이니, 5천의 병력과 함께 무난하게 주둔만 하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

그 또한 해결법은 단순했다.

도시의 위기에 힘을 보태어 준 노고를 적당히 치하해 주면 될 일이었다. 협의 없던 국경 침범에 대한 책임은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걸 따지지 않아야 오히려 이쪽의 넓은 아량을 대외에 선보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만 하면 두루두루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민심도 이쪽으로 휘어잡을 수 있었다. 역시 우리의 왕가는 변두리일지언정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라는 생각만 갖게 하면 될 일이었다.

즉, 1왕자는 테니온에 가서 5천의 병력과 함께, 무난하게,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었다!

‘한데…… 그런 일을 이렇게까지 망쳐?’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일을 망치는 재주.

국왕 하르난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물었다.

“대체, 너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였더냐?”

“……예?”

“다 들었노라. 네가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게 노골적이고도 무례한 요구를 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너는, 일이 이 지경이 된 지금까지도 너의 행동을 숨기고 변명할 참이더냐?”

“그, 그것은…….”

“그래. 우리 국경도시의 재난에 구원의 손길을 보태어준 이를, 단지 타국의 황태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굴욕적으로 내쫓으려 들었어야 했더냐? 너의 아량은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이더냐?”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없어야지. 당연히 없어야지.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어야지.”

“…….”

“물러가거라. 당분간은 얼굴도 보기 싫으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물러나는 1왕자. 그 모습에 국왕 하르난트는 다시금 탄식했다. 그리고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냉철하게 삭였다.

‘하면, 이제는 어찌해야 좋을까.’

분노는 분노일 뿐.

사건을 대처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에 불과하다. 이럴 때일수록 냉철해야 한다. 그것이 수많은 백성의 운명을 짊어진 왕좌의 책임이며 무게이다.

그 사실을 새삼 되새기며, 국왕은 이 사태에 대처할 생각에 골몰하였다.

‘전쟁? 아니. 그것은 최후이자 최악의 수단일 터이고.’

국경의 도시를 졸지에 빼앗긴 것은 뼈아팠다.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국경 단위의 무력 분쟁? 그것도 하책일 뿐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실질적으로 얻어내는 것이 없을 테니까.

‘무력 분쟁은 의미 없는 분풀이일 뿐일 테지. 오히려 손해를 안 입으면 다행일 터이고.’

마젠타노는 강력하다. 하르미온 단독의 힘으로는 감히 맞서지 못한다. 그런 상대를 향해 분노의 분쟁을 시도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더욱 처절하고 비참한 응징일 뿐일 터다.

그렇다고 이대로 참아야 할까.

속으로만 삭여야 할까.

물론 그것도 아니다.

‘역시 답은 외교에 있겠지.’

톡, 토독.

국왕 하르난트는 권좌의 팔걸이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더욱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지금쯤 하르미온의 국왕 하르난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무력 분쟁은 어리석고, 침묵은 억울하니, 외교로 답을 풀어내야겠노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폐하.”

“그럴 테지.”

이곳은 하르미온의 왕도 하르마스로부터 한참 떨어진 황도 마젠타. 황궁의 가장 깊은 심처에서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리가 났을 테지. 왕성이 온통 발칵 뒤집혔을 테지. 그 와중에도 국왕 하르난트는 분노에 이성을 빼앗기지 않고 냉철한 대응에 골몰하고 있을 테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외교전이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겠지.”

황제 아스테리온은 문득 기억을 되짚었다. 30년쯤 전이었던가. 자신이 황태자였던 시절,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하르미온의 왕세자였던 하르난트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제법 인상적인 적수였다. 물론 자신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황제는 잠깐의 추억(?)을 접어두고서, 곁에 시립한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을 향해 말했다.

“아마도 그자라면 우리와 함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한 소국들을 동원할 것이야.”

“인접한 소국들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웬록, 프라슨, 시크마르 정도가 있겠지. 우리의 국경지대인 아스라한 변경백령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소국들. 경은 그 소국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송구하옵니다. 잘 모르겠사옵니다.”

“이번 본드래곤 사태 때문에 국경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의 국가들이라는 점이지.”

“아…….”

“무슨 뜻인지 이제는 짐작이 되는가?”

“…….”

“역시. 아직 모를 줄 알았어.”

“아는 척해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괜찮아. 경은 그게 매력이니까.”

“…….”

잠깐 평생의 친우이자 가장 신뢰하는 검인 로베르토 경을 놀려먹은 황제가 싱긋 웃었다.

“하르미온의 국왕은 그런 소국들을 끌어들여서 다 같이 떠들 생각인 것이야. 마젠타노에서 비밀리에 양성한 무기인 본드래곤 때문에 국경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노라고.”

“예? 하지만 그건 사실이…….”

“사실이 아니지. 하지만 다 같이 그런 주장을 펼치면 사실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외교라는 무대의 전쟁터에서는.”

황제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번져갔다.

“그렇게 우리가 저들에게 피해를 입혔노라고, 국경의 도시 테니온도 위기에 빠졌던 것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 제국이 의도적으로 황태자를 투입하여 테니온을 구해주는 척하며 민심을 흔들고, 도시를 강탈한 것이라고. 그렇게 주장하겠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아니옵니까?”

“저들은 그걸 말이 되게 만들 생각인 것이야.”

“하오면 우리 쪽에서도…….”

“그래. 대응을 해야겠지. 이미 지시는 내려두었으니.”

“벌써 말이옵니까?”

로베르토 경은 깜짝 놀랐다.

거의 평생을 황제를 모셔온 그였지만, 아직도 종종 이렇게 놀라는 때가 있었다. 그만큼 황제의 속은 깊고도 넓어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황제가 껄껄 웃었다.

“그걸 벌써라고 말하면 곤란하지. 이 경우엔 적당한 시기의 조치라고 해야 맞는 것이겠지.”

“하면 어떤 조치를 내리신 것이시온지…….”

“이번에 획득한 도시의 이름을 바꾸라 지시하였다.”

“이름을 말이옵니까?”

“그래. 라키엔데.”

“라키엘의 도시……라는 뜻이시옵니까?”

“바로 그렇지.”

황제의 웃음이 흡족한 감정으로 번져갔다.

“그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결단과 용맹과 기지를 통하여, 처음으로 제 손에 거머쥔 영토가 아니던가. 하니 기념을 하여야겠지. 두고두고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당대의 사람들도 모두가 인식하도록.”

“이름표를 대놓고 바꾸어 버리셨다는 뜻이시옵니까.”

“그렇지. 또한 짐은 그 도시를 그 아이의 직할령으로 선포할 것이야.”

“직할령…….”

로베르토 경은 감탄했고, 황제는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황제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번에 하르미온의 1왕자와 자신의 아들이 제대로 붙었다. 그 결과는 완승, 그 자체였다. 생각할수록 너무나 행복했다. 솔직히 당장에라도 하르미온의 국왕에게 달려가서 외치고 싶었다. 우리 아들이 네 아들보다 이렇게나 잘났다! 부럽지 않느냐! 라고.

덕분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행복감에 몸부림치며 이불을 걷어차는 요즘이었다. 식사를 하다가도, 신하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다가도, 남몰래 왼쪽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내적 댄스의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라키엘. 나의 아들아. 너는 이제 네가 직접 얻어낸 도시를 마음껏 다스리기만 하거라. 그 뒷수습은 이 아비가 모두 치러주마. 그것이 이 아비가 너의 공적에 보여줄 수 있을 고마움일 터이니까.’

사실 하르미온의 외교전에 대응할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인 라키엘이 직접 외교 테이블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들의 여론전을 정면에서 박살내 버리는 것이 가장 깔끔하고 신속한 길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크나큰 공적을 세운 아들에게 그런 짐까지 떠맡기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폐하, 국경도시 테니온, 아니, 라키엔데로부터 급보가 전해져 왔사옵니다.”

집무실 바깥이 어수선해졌다.

급보를 품은 파발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

무슨 일일까.

들라 하였다.

이윽고 그는 충격적인 보고를 고막으로 접수(?)하게 되었다.

“……뭣이? 라키엘이, 그 아이가, 하르미온의 왕도 하르마스를 침공…… 아니, 전격 방문했다고? 국왕 하르난트와 이번 일을 직접 담판 지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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