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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40화 (439/468)

440화. 지배자의 시대유감 (2)

“……뭐?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여기로 오고 있다고? 짐과…… 이번 일을 담판 지으러?”

평범한 오후였다.

날씨는 적당히 맑았고,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으며, 여느 때처럼 적당한 식곤증이 밀려오던, 그렇기에 마젠타노에 빼앗겨 버린 도시에 대한 고민을 잠깐 접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던, 그런 지극히 평온한 오후였다.

그러나 하르미온의 국왕,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에게 주어진 평범하고 평화로웠던 오후는 갑작스러운 보고 한 큐에 머나먼 사상의 지평선 너머로 증발하고 말았다. 불현듯 쑴펑쑴펑 피어나는 황당함과 함께였다.

“지금, 짐에게 농을 거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절대로 아니옵니다. 방금 고하여드린 바는 모두 사실이옵니다.”

“…….”

혼비백산 놀란 낯빛으로 바짝 조아리는 시종장. 그의 기색을 보니 방금 귓구멍으로 접수한 보고가 사실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긴, 자신의 시종장은 원래부터가 농담과는 담을 쌓은 자이니, 더더욱 그렇겠다.

“허어, 허허, 허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하니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이렇듯 저돌적인 대응을 선보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는데.

“하면, 황태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왕성 앞에서 입궁 절차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뭣?”

국왕 하르난트는 또다시 경악했다.

“벌써 황태자가 이곳 왕성에 당도하였다고?”

“그렇사옵니다.”

“하면? 조금 전에 그대가 짐에게 올린 보고는 무엇이었지?”

“황태자가 국경을 넘을 때 해당 지역에서 올린 급보였사옵니다.”

“잠깐만, 하면…… 황태자 일행이 급보와 나란히 이곳 왕성에 도착한 것이라고?”

“정확하게는 황태자 일행이 지나는 지역에서마다 올린 급보‘들’과 다 함께 도착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대체…….”

국왕 하르난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급보는 장난이 아니다. 가장 유능한 기수로 구성된 전령이 엄선된 말을 타고서, 릴레이 식으로 왕도까지 전달하는 보고문이 급보다. 즉,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전달 속도가 빠르다.

한데, 그런 급보와 국경에서부터 이곳까지 나란히 달려왔다고?

“어떻게?”

이쯤 되니 궁금했다. 황태자 일행은 무슨 수를 썼기에 이토록 신속한 기동력을 선보일 수 있었단 말인가.

해답은, 시종장의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버무림에 있었다.

“그게……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를 타고 온 듯하옵니다.”

“미노타우로스? 황태자가 예전에 길들였다는?”

“그렇사옵니다.”

“미노타우로스가 그렇게 엄청난 체력을 지녔다고?”

“아마도 황소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

“소, 송구하옵니다.”

“아니. 되었어. 일단 나가보도록 하지.”

국왕 하르난트는 잠깐 멍해지려던 대뇌피질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비결이 어쨌건 간에 황태자가 지금, 이곳 왕성까지 당도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오직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하니 이제부터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더더욱 중요할 터이고.

“황태자를 알현실로 부르도록.”

명을 내린 국왕은 알현실로 향하였다. 그동안 고민에 잠겼다. 황태자가 이곳을 전격적으로 방문한 이유. 목적. 예상되는 요구. 거기에 대응할 전략까지. 국왕은 노련한 통치자답게 금방 새로운 대응책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마젠타노의 황태자와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의 아들,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하르미온의 정당한 지배자인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을 뵙습니다.”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이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진심으로 반기는 바요.”

인사를 나누고는 맞은편에 앉는 황태자.

그 모습을 보며 국왕 하르난트는 내심 감탄했다.

‘저렇게 뻔뻔할 수가.’

마치 옆집에 놀러 온 사람 같다. 그것이 황태자를 보며 받은 첫인상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황태자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어찌 보면 잠재적인 적국의 중심부에 들어온 것임에도 아무런 불안감이 없는 듯했다.

멍청해서?

용감해서?

생각이 없어서?

‘아니.’

단순히 그래서는 아닐 것이다.

국왕은 황태자의 속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멍청한 이라면 지금 같은 시점에 여기로 올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했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사실 황태자의 이번 방문은 시기가 매우 미묘하고도 절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침 지금이 마젠타노와 함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인 웬록, 프라슨, 시크마르를 포섭하기 직전인 상황인 까닭이었다.

‘당장 열흘 뒤면 그들과 협의를 거쳐 다 함께 여론을 만들고 마젠타노를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마젠타노의 대사를 다자 테이블로 끌어들일 심산이었다. 그곳에서 다 함께 압박을 가하여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한데 지금, 황태자가 이렇게 쳐들어(?)와 버렸다.

‘덕분에 다자 테이블을 구성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구나. 이건 실로…… 완벽한 찌르기로다.’

염두에 두었던 다자 테이블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오히려 자신과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독대하는 1:1 테이블이 꾸려지게 되었다.

‘아마도 황태자가 이렇듯 방문한 것은, 내 의도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주도하는 협상의 무대로 이쪽을 끌어들이려 함이겠지.’

그런 의도가 느껴졌다.

멍청한 이라면 절대로 내릴 수 없는 판단. 단순히 용감하기만 한 이라면 도출할 수 없을 치밀한 결론. 생각이 없는 이였다면 잡을 수 없었을 타이밍까지. 하여 이렇듯 선보인 정확한 판단과, 과감한 결단과, 대범한 실행력이란.

볼수록 젊다 못해 새파란 황태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적수로 느껴졌다.

“…….”

내 아들 중에 한 놈만, 황태자의 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사에 성급한 첫째.

인격에 하자가 있는 둘째.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셋째.

국왕 하르난트는 저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머금었다. 눈앞의 황태자가 대단하게 느껴질수록, 자신의 아들들과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부러웠다.

‘내가 그 마젠타노의 무도한 황제를 이토록 부러워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사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를 비웃었던 날도 있었다.

연일 들려오던 황도에서의 첩보 덕분이었다.

황태자의 건강이 최악이란다. 갖가지 원인도 모를 병들을 줄줄이 달고 있단다. 병상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간신히 산책만 하는 것이 다란다. 즉, 사람 구실을 못 한단다.

그 첩보를 들으며 얼마나 웃었던지. 미래의 패권이 하르미온에게 넘어오겠구나 싶어 얼마나 설레었던지.

하지만 오늘 보니 아니었다.

전부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

설마하니, 그 볼품없다는 황태자가 이런 역량을 지닌 청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건강을 회복했다는 첩보도, 때때로 빛나는 공적을 세웠노라던 소식도, 그래서 마젠타노 황가가 의도적으로 뿌리는 허세성 풍문일 것이라 치부하였던 모든 정보들이…….

‘전부 사실이었구나.’

부럽다.

부러워서 미칠 것 같다.

국왕 하르난트는 절로 아파오는 배를 살살 어루만지는 심정으로 미간을 콱 찡그렸다.

그런 국왕의 모습을 보며 라키엘이 내심 감탄했음은 물론이었다.

‘와, 이 아저씨…… 장난이 아니네.’

분위기가 미쳤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할리웃에서 국왕 역할로 섭외한 배우인 줄 알았다. 그만큼 일국의 왕으로서의 위엄과 분위기가 너무나 찰떡이었다. 게다가 눈치로 보아선, 국왕이 이쪽의 방문 의도를 벌써부터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제대로 판단할 시간을 안 준 채로 만나려고 일부러 엄청나게 무리하면서 달려온 건데.’

국경에서부터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말 그대로 워낭소리 박살 나는 수준의 강행군이었다. 덕분에 그 튼튼한 우루스가 이곳 왕도 하르마스에 도착하자마자 몸살에 당첨되어 몸져눕게 됐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방문 소식을 듣고 한 시간도 안 된 지금 시점에 벌써부터 내 의도를 눈치챘어.’

역시나 눈치 100단. 일국의 지배자라는 자리를 고스톱으로 거저 획득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그에 맞설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한국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고.’

한의사가 되기 전엔 험난한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바득바득 기어서 올라왔다. 한의사가 된 후에도 어르신 환자들 어르고 달래느라 대인관계 눈치부터 강제로 만렙을 찍어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격려하며 말했다.

“이렇듯 제 전격적인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듯 일부러 찾아왔는데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소.”

“이렇듯 만나 뵙게 되니 반갑군요.”

“이렇듯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어 황당하기도 하고 말이오.”

“이렇듯 속내를 터놓고 서로의 조건을 이야기할 기회도 드물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반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는 경험도 확실히 드물긴 하겠구려.”

“…….”

이 아저씨, 기 싸움 장난 아니네.

라키엘은 잠깐 고민했다.

계속 받아칠까.

아니.

살짝 둘러가자.

“그러면 서로의 소중한 시간을 위해 이제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합니다만.”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시겠소?”

“그러면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수가 있겠소?”

“…….”

아, 이 아저씨 진짜.

“하면 국왕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따로 있으신지?”

“있소.”

국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마젠타노는 항상 이런 식이오?”

“예?”

“이런 식으로 강압적이고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상대를 흔들어놓는 것이 마젠타노의 외교 방침인지가, 진심으로 궁금해지오만.”

“…….”

“이것이 강대국의 품격이라는 것이오? 우리에게서 도시를 강탈할 때에도 그러더니, 이처럼 절차조차 엿보이지 않는 전격적인 방문으로 주도권을 쥐려 드는 노골적인 행동을 과연 품격이라고 할 수 있겠소?”

“으음, 그건…….”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국왕은 지금 상황을 힐난할 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진하게 고개를 숙여줄 생각은 없었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이렇게 오지도 않았을 거니까. 어디까지나 자신은 졸지에 얻어낸 도시의 소유권에 확실한 쐐기를 박으면서도, 하르미온과의 앙금을 말끔히 풀어내려고 온 것이니까.

그러자면 일단은 대화의 주도권부터 좀 가져와야겠다.

“사실은 더 강압적일 수 있습니다.”

“……뭐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여길 찾아왔고, 도시 하나의 가치에 필적할, 어쩌면 그보다 더욱 거대할 보상을 안겨드림으로써 이번 일을 원만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를 짓고자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니까 말입니다.”

“평화적? 원만……이라고 했소?”

“네.”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어서 말입니다.”

이쪽에 대한 감탄과는 별개로, 여전히 불만을 품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국왕 하르난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만약에 제가, 귀 왕가 3왕자님의 질환을 치료해드린다면, 그래서 3왕자님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상태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면, 도시를 빼앗겨 시름에 잠긴 하르미온 왕가의 울분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까요?”

“…….”

마침내 내민 회심의 협상 카드.

그걸 받아든 국왕 하르난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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