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집돌이를 끌어내는 법 (1)
자식이 아플 때 부모의 마음은 무너진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산다. 그러다 누군가의 아비가 되고서야 비로소 실감을 하게 된다.
국왕 하르난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에 제가, 귀 왕가 3왕자님의 질환을 치료해드린다면, 그래서 3왕자님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상태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면, 도시를 빼앗겨 시름에 잠긴 하르미온 왕가의 울분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까요?”
“…….”
국왕의 눈길이 경악으로 흔들렸다.
설마하니, 황태자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3왕자의 질환이라니.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이오?”
“이미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
얼마나 알기에 저러는 것일까.
혹시 넘겨짚는 것일까.
국왕 하르난트는 당혹감을 애써 갈무리하며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도 풍문을 들은 것이오?”
“하르미온의 3왕자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
“단지 소문만 들은 것은 아닙니다.”
“…….”
라키엘을 향한 국왕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사실 3왕자는 단순한 병을 앓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막내아들이 감당하게 된 병마의 무게는 그 정도로 단순하고 우아한 수준이 아니었다. 깨끗한 시트에 누워 지내는 병약한 소년? 현실은 그따위 아름다운 동화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국왕이 물었다.
“방금의 발언은 풍문 이상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소만.”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마젠타노의 눈과 귀가 우리 궁성 안에까지 닿아 있다는 오만한 말씀을 하려는 것이오?”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이제부터 제가 드릴 제안이, 결코 서로에게 손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그대에게도 이득이 되리란 소리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얻을 이득이 아주 조금 더 클 것입니다.”
“지나친 솔직함이로군.”
“제 알량한 혓바닥에 쉽게 넘어올 분이 아니심을 알기 때문이지요.”
라키엘은 탁 터놓고 말했다.
방금 말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국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한데 괜히 큰 이득을 안겨주겠다는 둥, 제안을 수락하기만 하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는 등등의 감언이설을 했다간?
오히려 의심만 살 것이다.
그래서였다.
어설픈 이타적 혀놀림보다는, 뻔뻔하고 이기적인 오픈 마인드로 신뢰를 얻기. 그 전략을 되새기며 라키엘이 말했다.
“사실 저는 욕심이 많은 인간입니다. 게다가 남을 함부로 이롭게 해줄 생각도 없습니다. 괜한 수고이기 십상이고, 자칫 제 배만 아플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여기로 오기 전에 나름의 손익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결론이 나오더군요.”
“결론이라면?”
“이번 제안을 통해 하르미온 왕가가 얻을 이득이 막대할 것입니다. 대신 제가 얻을 이득은 그보다 살짝 더 커다랄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일은 제법 추진할 만하다는 결론을 얻었지요.”
“추진할 만하다라…….”
“혹시 좌우를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키엘이 물었다.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하니 그대도 꺼릴 것 없이 원하는 바를 시원하게 밝혀주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우선, 저는 귀국의 3왕자가 앓고 있는 병마의 정확한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뭐요?”
국왕 하르난트는 깜짝 놀랐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무좀입니다.”
“…….”
“하지만 단순한 무좀은 아니지요. 전신에 빼곡하게, 심각한 수준으로 번져 버린 무좀이니까 말입니다.”
“…….”
“맞습니까?”
“……이쯤이면 부정할 수가 없겠군. 맞소.”
국왕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방금 황태자의 발언은 사실이었다.
처음엔 단순하고도 사소한 무좀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잠깐 앓고 끝날 피부병 정도로만 취급했다. 당연했다. 무좀이었으니까. 그것이 3왕자가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반 년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금방 사라질 것 같았던 무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발 전체로 번졌다. 아예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발이 짓무를 지경이었다.
그때에서야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도 지나기 전에, 3왕자의 발을 점령한 무좀이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손이며 팔뚝은 물론이었다.
배, 가슴, 등, 목덜미, 심지어 머리와 얼굴까지.
온통 진물이 흐르고, 갈라지고, 머리칼이 몽땅 빠졌다. 결국, 맑고 훤칠한 외모로 자라나던 열다섯 살의 3왕자는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몰골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때까지 국왕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신관을 불러 갖은 치료를 시도했다. 기도를 올리고, 신의 축원을 갈구하며, 한편으로는 남몰래 구해온 이교도의 약을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백방이 무효하였다.
그 어떤 정성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여 결국, 다시 2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가 3왕자의 존재를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단 말이오?”
“듣기에도 괴로운 일이실 텐데, 이렇듯 언급을 드리게 돼서 참으로 유감입니다.”
“괜찮소. 도와주겠다는 뜻을 위해 꺼낸 이야기이니.”
국왕은 잠시 떠올렸던 후회로 가득한 과거를 가슴속으로 접었다. 그리고 협상 테이블 건너편의 라키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실은 전부터 나도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소.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신묘한 의술을 지녀 수많은 이들을 병마의 고통에서 구해내기를 즐겨 행하노라고 말이오.”
“예. 풍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럴 것이라 믿고 싶소. 하여 궁금한 점이 있소만.”
라키엘을 향한 국왕의 눈길이 깊어졌다.
“3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따위는 묻지 않겠소. 이 마당에 와선 별로 의미도 없을 테니까. 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오. 만약, 내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오. 그대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내 아들을 어떻게 치료할 생각이오?”
“일단은 진단이 우선이겠지요.”
“그 말은, 지금은 치료의 성공 여부를 확답할 수가 없단 말이오?”
“실제로 3왕자를 만나 진단을 하기 전까지 제 대답은 똑같을 것입니다.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소?”
“100퍼센트 완치된다는 말은 사기꾼이나 입에 담을 소리일 테니까 말입니다.”
“…….”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국왕께서 타국과 전쟁을 벌인다고 치면 말이지요.”
“무조건적인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는 뜻이겠군. 맞소?”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키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국왕 하르난트가 거의 넘어왔다.
‘운 좋게도 소설 마검황에 하르미온의 3왕자와 관련된 짤막한 에피소드가 있었지. 데미안이 하르미온의 국경분쟁에 관여했던 스토리였나.’
그 에피소드에 3왕자가 등장했더랬다. 우연히 데미안과 조우한 적이 있었다. 그때 3왕자와 대화를 나눈 데미안이 탄식을 하는 장면도 있었더랬다.
‘인품이 훌륭하고 재지 또한 번득인다 했지. 그런데 그 모든 재능과 가능성이, 괴물처럼 추하게 변할 몰골 때문에 파묻히게 된 것이 아깝다고 했어.’
고작 무좀 때문에.
고작 흉하게 변한 외양 때문에.
3왕자는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펼쳐보지도 못하고서 자살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그것이 원래 마검황의 하르미온 에피소드였다.
‘그 기억을 써먹은 덕분에 여기까지는 쉽게 왔어.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라키엘은 다시금 정신무장을 다졌다.
소설 속 정보를 통해 협상까지는 쉽게 이끌어냈다. 하지만 실제 진료는 엄연한 실전이다. 아니, 진료를 보기 위해서도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말이오. 그대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아무리 좋은 뜻으로 내 아들을 돌보아주려 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소.”
“어려운 부분이라시면?”
“아마 내 아들이 그대와 대면하기를 꺼려할 것이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익히 아는 바를 말하였다.
“귀국의 3왕자는 자신의 외양이 망가진 후로 사람 만나기를 지극히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까지.”
“죄송합니다.”
“아니, 괘념치 마시오. 사실이니.”
국왕 하르난트의 낯빛에 탄식이 서렸다.
“솔직하게 말하리다. 3왕자, 내 막내 녀석은 심각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소. 그 어떤 이도 자신의 모습을 보길 원하지 않지. 심지어 이 아비조차도 말이오.”
“마지막으로 3왕자를 만난 것이 언제였습니까?”
“작년. 오늘로부터 정확히 195일 되었소. 그때도 거의 강제로 문을 부수고서야 간신히, 아주 잠깐 그 아이의 모습을 본 것이 다였지. 아니. 그걸 본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녀석이 덮어쓴 이불의, 그것도 침대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듯 숨어들던 뒷모습만 스치듯 보았으니 말이오.”
“상처가 크셨겠습니다.”
“그 아이의 상처가 훨씬 클 것이오.”
국왕의 눈시울이 아주 살짝 붉어졌다.
그가 물었다.
“그렇듯 그 아이는 자신만의 동굴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소. 나는 물론이고 3왕자궁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조차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말이오.”
하여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세 아들 중에 그나마 가장 장래가 촉망되던 아이를, 벌써부터 가슴에 묻어둘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혹시 강제로 끌어내려 시도한 적은 없습니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소.”
“이해합니다. 3왕자에게 굉장히 잔인한 일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소. 이미 모든 치료법이 실패한 마당에, 치료될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마당에 그 아이를 강제로 끌어내어 남들 앞에 발가벗기듯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짓은…… 차마 못 하겠더구려.”
마음으로야 이미 골백번은 더 끌어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왕 하르난트는 새삼 저미듯 다가오는 괴로운 심정을 삼키며 물었다.
“그래서 묻고 싶소.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그대는 아까 완치의 여부를 장담할 수가 없다고 하였소. 실제로 진단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라 했지. 그렇다면 말이오. 그대는 과연 어떻게, 3왕자궁에 틀어박혀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 내 아들을 진료하고 진단할 생각이오?”
“아, 그거야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고?”
“예.”
“그게, 정말이오?”
국왕 하르난트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예. 그래서 마침 좀 미리 여쭤볼 생각이었는데 말입니다. 혹시, 오늘 밤에 제가 3왕자궁에 불을 좀 질러도 되겠습니까?”
“…….”
“불. 파이어.”
“…….”
“활활.”
“…….”
그 순간 국왕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거, 미친 새x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