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집돌이를 끌어내는 법 (3)
“어라? 여기에 왜 약만 잘 쓰면 금.방.나.을.수.있.는.피.부.병.환.자.가 있는 거지?”
“…….”
창가를 이글이글 태우며 춤추는 불길.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매캐한 냄새.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길하게 삐걱대는 천장.
그 속에서 3왕자 크리스탄은 경이감을 느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순간에 기적처럼 나타난 은발의 사내. 그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은 까닭이었다.
“당신, 누구지? 정말로…… 사람인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질문을 했다.
혹시 자신이 너무나 절박해진 나머지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너무나 감격적이게도.
“하. 참.”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사람이냐니? 무슨 만나자마자 건네는 질문이 그래?”
“아, 그건…….”
“됐고. 일단 이리로.”
3왕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3왕자의 상태를 살폈다.
‘생각보다 심하네.’
실제로 본 3왕자는 단순한 피부병 수준의 무좀을 앓는 게 아니었다. 심하다기보다는 심각하다는 말이 걸맞을 정도였다. 얼굴이며 목덜미며 손등까지,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었다. 두피마저 무좀진균에 점령당했는지 머리칼이 간신히 듬성듬성 남아 있을 정도였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치자면 거의 나병 환자 수준인데.’
아마도 이곳 사람들의 인식도 그랬을 것이다. 흉측해진 외모만큼이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겠지. 게다가 이 3왕자, 지금의 외모로는 짐작하기가 어렵지만 실제로는 열일곱 살 남짓이라고 했던가.
“…….”
힘들었겠네.
라키엘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3왕자가 여전히 멀뚱멀뚱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기만 하는 까닭이었다.
“뭐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아, 아?”
기다리다 못해 손을 뻗어서 쥐었다. 그 서슬에 3왕자가 기겁하듯 놀라며 손을 빼려 했다. 아마도 반사적인 반응이겠지. 병을 앓은 뒤로는 누구와도 손을 잡아본 적이 없을 테니까. 아니, 주위의 모두가 접촉을 피하려고만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라키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3왕자의 손을 더욱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동정심?
의료인으로서의 환자에 대한 예의?
전부 아니었다.
‘자아, 일단 기절부터 시키고!’
탈출에 앞서 3왕자의 정신줄(?)부터 끊어놔야 한다. 그래야 사기행각이 들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3왕자궁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침실 창틀에 마법사들이 피운 불길? 창틀을 제외한 주위로는 옮겨붙지도 않았다. 매캐한 연기? 그나마 냄새만 리얼하게 느껴질 정도로만 유입되고 있었다. 당장 복도로만 나가도 이곳이 멀쩡하다는 걸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였다.
일단 사기를 치려면 들키지를 말아야 한다. 3왕자의 정신이 멀쩡해서 들킬 위험이 있다면, 멀쩡한 정신을 안 멀쩡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바로 이렇게!’
확!
3왕자의 손을 당겼다. 3왕자가 당황하며 확 끌려왔다. 짐짓 다급한 상황인 척하며 외쳤다.
“이제부터 여길 빠져나갈 거니까 정신 꼭 챙기시고!”
“어, 으읏?”
3왕자의 당혹감이 가라앉기 전에 다른 손으로 그의 등을 짚었다. 동시에 아스라한 심법을 일으켰다. 마나 흡인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샤아아아악……!
“……헙?”
역사에 남은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 그가 창안한 아스라한 심법은 기본적으로 흡성의 능력을 지녔다.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고, 증폭해서, 자신의 것처럼 써먹는 것이 기본 사용법이기도 했다.
라키엘은 그런 아스라한 심법과 함께 나름의 산전수전을 거쳐온 터였다. 숙련도? 이제는 어디 가서도 능숙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반면, 3왕자는 딱히 강력한 마나하트가 없는 일반인이었다. 아니, 최근 3년 정도는 골방에서만 방콕하며 지낸 덕에 보통보다도 저질스러운 체력과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3왕자가 라키엘의 숙련된 아스라한 심법의 흡수력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 흐으…… 읏…….”
불과 10초쯤 지났을까.
순식간에 기가 빨린(?) 3왕자의 눈빛이 흐려졌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자세가 구부정해졌다. 다리가 풀리고 전신이 허물어졌다.
깔끔한 기절이었다.
“읏차.”
무너지는 3왕자를 받아서 눕혔다. 그리고 3왕자의 컨디션을 체크했다.
‘푹 재웠네, 아주.’
순식간에 마나를 빼앗기긴 했지만 건강에 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운 노곤함을 느끼며 잠든 것에 불과하달까. 아마도 앞으로 서너 시간 정도는 흔들어도 깨지 않을 꿀잠을 잘 것이다.
거기까지 확인한 라키엘은 침실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깥쪽 복도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똑, 또도독, 똑똑, 또독똑!
미리 정해둔 박자를 따라 울려 퍼지는 상큼한 노크. 그러자 아까까진 3왕자가 아무리 두드리고 애원해도 꿈쩍하지 않던 침실 문 바깥의 바리케이드가 너무나 간단하게 치워졌다. 문 또한 손쉽게 달칵, 열렸음은 물론이었다.
“작전 성공. 밖으로 옮깁시다. 안 깨도록 살살.”
라키엘이 시종으로 변장한 근위기사들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근위기사들은 비로소 안심했다. 다행이라고. 3왕자를 골방에서 끌어내기 위한 작전을 안전하게 성공시켰다고. 그러니 이제는 굳이 3왕자궁을 태우지 않아도 될…….
“아 뭐해들. 빨리빨리 좀.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 기름 좀 뿌립시다. 미적거리지 말고.”
“……예?”
근위기사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방금 자신의 고막으로 접수한 소리의 진위를 의심해야 했다.
기름이라니?
그걸 뿌린다니?
왜?
설마 여기서 튀김이라도 해먹으려고?
……라던 현실부정적 눈물겨운 상상은 황태자의 뻔뻔한 대답에 금방 부정당해야 했다.
“예는 무슨. 여기 태워야지.”
“그…… 3왕자궁을, 정말로 태울 거란 말입니까?”
“당연히.”
“…….”
안 당연한데.
3왕자를 무사히 끌어냈는데 굳이 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황태자가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소독 몰라요?”
“예?”
“아 여기 안 보여서 그렇지 무좀 진균으로 아주 그냥 득시글할 건데. 이걸 그냥 두자고?”
“…….”
“게다가 여길 제대로 태워야 3왕자가 깨어났을 때도 계속 속일 수 있을 거 아냐. 생각들 좀 합시다. 생각 좀.”
“…….”
“기름! 빨리!”
너무나 당당하게 남의 나라 궁전을 태우자고 외치는 마젠타노의 황태자. 그를 보며 근위기사 일동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런 돌아이 같은 놈이 차기 황제가 될 거라니,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옆나라 운이 별로 없는 거 같다고.
♣
내 이름은 크리스탄.
하르미온의 3왕자.
아무래도 나는 운이 없는 것 같다.
남들이 빛나는 햇볕 아래 청춘을 뽐낼 나이에, 나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얼굴과 몸을 추스르며 골방에 갇혀 지내야 했으니까.
억울?
그 말이 적합한지 모르겠다. 억울하다는 단순한 말 하나에 모두 담기엔, 내가 그동안 느꼈던 심정들이 너무나 억울해할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어났느냐.”
짹, 째잭!
3왕자 크리스탄은 몽롱하고 어둡던 꿈의 세계에서 잠시 흠칫했다. 아주 잠깐, 바깥세상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니. 바깥이 아니다. 현실이다. 누군가가 현실의 아침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저 목소리의 정체를 안다.
아바마마.
아버지.
부왕.
온몸이 문드러진 후로는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다. 자신의 흉측해진 꼴을 보이기 싫었다. 자칫 그랬다가 아버지가 자신을 포기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식으로 왕위 계승 경쟁에서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잠든 내 귓가에 부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고?
“……허어억!”
3왕자는 기겁하며 손을 움직였다. 마침 이불이 잡혔다. 다행이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뒤집어쓰며 얼굴부터 가렸다.
하지만 도중에 잠깐 보았다.
이불이 시야를 가리기 전에 언뜻 비친 부왕의 얼굴. 눈빛. 울고 계셨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계셨다. 그래서 믿기지가 않았다. 잘못 본 거겠지. 아니. 설령 제대로 본 것일지라도 저 눈물은 나를 향한 연민과 사랑은 아닐 테지. 어쩌면 한심해서 울고 계신 건지도 몰라.
“어, 어쩐 일이시옵니까!”
이불 속으로 더욱 깊이 웅크리려 애를 쓰며 물었다. 그 물음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돌아오는 부왕의 대답은 차갑지 않았다.
“밤새 너를 걱정하였단다.”
“…….”
밤새?
여기서?
곁에서?
잠든 내 모습을 보셨다는 걸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왕의 말씀이 이어졌다.
“행여나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였다. 한데 이렇듯 눈을 떠주니 고맙구나.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불길 속에서 별달리 다친 곳도 보이지 않고. 이것이 오르무스의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
은총.
불길.
그래.
화재가 났었지.
“3왕자궁은……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불길에 휩싸였단다. 완전히 타고 무너져 흔적도 남지 않았지. 안타깝게도.”
“그렇……사옵니까.”
“그래. 하지만 네가 이렇듯 무사하니 괜찮다.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하오면 그 사람은……?”
“널 구해준 은인 말이더냐?”
“예. 은발의…….”
“마젠타노의 황태자란다.”
“예에?”
크리스탄은 깜짝 놀랐다.
불길에 갇혀 죽을 최후만 기다리던 자신 앞에 기적처럼 나타났던 그 은발의 사내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라고?
“어째서…….”
“외교적 협상 때문에 그가 왕도에 체류하고 있었단다. 그러다가 마침 수행원과 밤 산책을 하던 중에 3왕자궁에서 솟구치는 불길을 목격했다더구나.”
“그게, 우연 치고는 너무…….”
“절묘하다고?”
“예…….”
3왕자는 이불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궁에 불이 났는데, 그걸 목격하고 달려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와 준 사람이 마젠타노의 황태자라니. 우연치고도 너무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들었던 3왕자의 의문과 의심은 이어지는 국왕의 말에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무릇 세상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인 일도 많단다. 하여 때로는 우연이 필연을 뛰어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그것이 신의 인도이자 큰 뜻이 아니겠느냐.”
“아…….”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너는 건물과 함께 재가 되어 있었겠지. 이 아비는 그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단다.”
“…….”
그저, 진짜 우연인 거였구나. 나를 골방에서 끌어내려는 자작극이 아닌가 싶었던 내 잠깐의 의심이 못난 생각이었구나.
‘하긴……. 설마 나 하나를 끌어내자고 3왕자궁을 모조리 태워 버릴 분은 아니시긴 하지, 아바마마께서는.’
그런 미친 돌아이가 세상에 존재할까. 만약 있다면 그건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해악이 아닐까. 3왕자는 비로소 의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난감함을 느꼈다.
“저, 그러면, 하면 저는 이제…… 어디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냐고?”
“그, 그렇사옵니다.”
난감했다.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던 3왕자궁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더는 숨을 곳이 있을까. 다시 도망칠 곳이 있을까.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돌아온 부왕의 대답이 뜻밖의 울림이 되어 3왕자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이 아비와 지내면 아니 되겠느냐?”
“……예?”
“네 마음을 안다. 이렇듯 아노라고 함부로 말하면 더 아프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은 해야겠구나. 이 아비는 네 마음을 알겠단다.”
“무슨…….”
“너의 모습 때문에 이 아비가 너를 포기하게 될 것이 두려운 게 아니더냐?”
움찔.
정곡을 찔린 3왕자가 이불 속에서 흠칫했다.
그 모습에 국왕은 다시금 눈시울을 적셨다.
사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아들이 어째서 3왕자궁에 숨은 것인지. 한사코 모습을 숨기려고만 들었던 것인지. 그저 흉해진 모습을 부끄러워해서, 수치스러워해서 숨는 것이라고만 여겼더랬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걸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알려주었다.
3왕자는, 자신의 막내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아비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 두려워 숨고 있는 것이리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기도 하였다. 그러자 황태자가 대답했다. 권좌를 물려받을 똑같은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의외로 답이 간단하였노라고. 자신이 3왕자의 입장이 되어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고.
그리고 황태자가 당부했다.
3왕자의 치료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첫걸음이 오늘 아침의 부왕과의 대면이 될 것이라고. 그러니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라고. 3왕자가 그걸 느낀다면, 앞으로의 모든 치료에 한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했던가.
하여 황태자의 당부대로 하였다.
덕분에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아비야말로 너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지금까지는 몰랐으되 이제는 알겠다.
황태자가 말한 ‘치료’의 대상이 비단 3왕자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음을. 어쩌면 황태자는 아들에 대해 무지했던 자신 또한 치료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확실히 그런 듯하다고.
‘고맙소.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뒤늦은,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은 깨달음과 함께 맺힌 눈물이 국왕의 볼을 가로질렀다. 떨어졌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3왕자의 손등을 톡, 톡, 가만히 적셨다.
국왕과 왕자.
아비와 아들.
두 사람이 소리 없는 첫 치유의 온기를 느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