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훌렁훌렁 훌러덩이라는 신세계 (2)
한 번만 더 기회를 받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자신이 테니온에 도착하기 이전으로. 빌어먹을 마젠타노의 황태자와 대면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우.”
하르미온의 1왕자, 제로스 마스트리히 하르미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분을 삭이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잊고 싶은 기억은 자꾸만 스멀스멀 되살아나 뇌리에 들러붙어 왔다.
황태자에게 납치당했던 날의 굴욕. 테니온의 시민들 앞에서 도시를 이양하겠노라 반강제적인 선포를 입에 담던 순간의 치욕. 왕도로 돌아와 받아야 했던, 부왕의 한심해하던 눈빛까지.
“빌어먹을!”
콰앙!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잊으려 할수록 분통이 터진다.
결국, 참지 못한 1왕자는 애꿎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직, 와장창. 다탁이 넘어지며 값비싼 화병이 깨졌다.
그의 구두를 닦아주던 시종이 두려움에 온몸을 움츠렸음은 물론이었다.
1왕자는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뭔데. 왜 솔질을 멈추는 건데.”
“아, 저, 그게…….”
“하던 거 마저 안 해?”
“며, 명을 받듭니다.”
시종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구둣솔을 움직였다. 1왕자는 인상을 잔뜩 구기며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1왕자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누구냐. 문을 두드렸으면 용건을 말하지 왜 잠자코만 있어?”
안 그래도 요즘 심기가 불편한데 멍청한 아랫것들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린다. 안 되겠다. 조만간 날을 잡아서라도 1왕자궁 잡것들의 정신상태를 한 번쯤…….
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다짜고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형님.”
2왕자 사르난 투로니아 하르미온이 능글맞게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1왕자의 눈빛 가득 불쾌감이 서렸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찜찜하다.
배가 다른 형제이자, 음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2왕자 놈이 지금 자신을 왜 찾아온 걸까. 혹시 테니온에서 벌어졌던 일을 듣고서 조롱을 하려고 온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하러 온 거면 썩 꺼져. 네놈 따위와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니까.”
1왕자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하지만 2왕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닐 텐데요.”
“뭔데 그럼.”
“마젠타노의 황태자.”
“……이 빌어먹을 새x가!”
“가 왕도에 왔다는 소식입니다. 3왕자 녀석을 치료하려고.”
“뭐?”
홧김에 버럭 외치려던 1왕자가 멈칫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한 거냐?”
“사실입니다. 3왕자궁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들으셨지요? 그 후에 3왕자 그놈, 황태자의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정말로?”
“예.”
“어째서?”
“뻔하지 않겠습니까?”
2왕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3왕자 그놈이 말입니다, 괴물 같던 꼴이 멀쩡해지면, 비로소 본격적으로 왕세자 자리를 노리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가만히만 보고 있을 겁니까?”
“…….”
아니.
그건 안 된다.
3왕자가 치료되는 일 따위, 무조건 막아야 한다.
그런 치료는 어떻게든 망가뜨리는 게 최선이다.
‘당연하지. 부왕께서는 그놈을 이상할 정도로 감싸고 도시니까.’
까드득!
1왕자는 이를 갈았다. 사실 그는 전부터 막내인 3왕자가 거슬렸다. 스스로도 이유는 몰랐다. 그냥 싫었다.
주위에 현명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던 놈의 모습이. 빼어난 성군의 재목이라고 칭찬을 듣곤 하던 녀석의 태도가. 모두. 재수 없고 짜증이 났다.
어쩌면 시샘이었을까.
혹은 위기감이었을까.
‘웃긴 소리. 내가 1왕자인데 그따위 녀석을 시샘? 말도 안 돼.’
그저 3왕자인 주제에 설치는 꼴이 보기 싫을 뿐이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이다. 지금 놈이 받는 치료를 망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도 그래서인 거다.
왜냐. 나는 1왕자니까. 확실하게 왕위를 물려받을 그릇이니까. 윗사람으로서 건방진 놈에게 본때를 보이는, 딱 그런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3왕자를 치료해주는 놈이 황태자라고?”
“예. 제가 듣기로는 그랬습니다만.”
2왕자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1왕자의 가슴에 천불을 일으킬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잖아도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겐 빚이 있지 않습니까?”
“…….”
당연하다.
놈 때문에 테니온에서 어떤 굴욕을 겪었던가. 왕도로 돌아와서는 부왕의 실망스러운 눈길까지 받아야 하였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나면 무엇이건 집어던지고 고함을 질러야 성이 풀릴 지경이었다.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황태자.
그놈이 싫다.
죽이고 싶다.
그런데 마침 죽이고 싶은 놈이 재수 없는 놈을 치료하겠답시고 들러붙어 있는 상황이라니. 생각하자니 더 분통이 터졌다.
당장 달려가 두 놈을 한데 묶어서 장작불에 던져넣고 싶었다.
“그런데 대체 황태자, 그놈이 왜? 어째서 3왕자 놈을 치료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와 있는 거지?”
“뻔하지 않겠습니까?”
2왕자가 피식 웃었다.
“치료의 대가로 테니온의 완전한 양도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뭐?”
“그러니까 형님은 지금 두 가지 곤경에 처하게 된 겁니다. 그게 뭔지는 알겠습니까?”
“설마.”
“예. 눈치채셨습니까.”
“하나는 완치된 3왕자 놈이 왕위 경쟁 구도에 끼어들게 되리라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날 짓밟고 앗아간 테니온이 공식적인 마젠타노의 영토로 인정이 되리라는 건가?”
“아마도 역사서에 남겠지요. 1왕자의 실책으로 넘어간 테니온이 결국엔 어쩌고저쩌고라는 식으로.”
“……빌어먹을!”
1왕자가 구두를 닦던 시종을 걷어찼다.
2왕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그러니까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런데 말이다. 너는 왜 이 소식을 내게 가지고 온 거지?”
“저야 당연히 3왕자 놈의 치료가 망가지길 원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왜 네가 직접 나서지 않고?”
“저보다는 형님이 조금 더 다급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밀리는 2왕자인데.”
“…….”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저는 이만.”
2왕자가 꾸벅 예를 올리고는 물러갔다.
남은 1왕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름의 빈약한 지혜로 셀프 무덤을 파기 위한 흉계를 차곡차곡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
“으음, 3왕자님?”
“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는지?”
“네에?”
“거,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꼭 한 시간쯤 뒤에 들어갈 무덤을 분양받은 좀비를 쳐다보는 것 같은 눈빛?”
“……아, 제가 그랬나요?”
“예. 솔직히.”
“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그게?”
“이틀 만에 다크써클이 너무 심하게 진해지셔서…….”
“…….”
3왕자가 쭈뼛쭈뼛 꺼낸 대답에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였을까. 3왕자의 난처한 기색이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처럼 한결 진해졌다.
“아, 이런 말도 실례인 걸까요. 다시금 죄송합니다. 그래도 안색이 너무 거무튀튀 칙칙해지셔서…….”
“…….”
“게다가 그냥 안색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말라비틀어진 오이처럼 수척해지기도 하셨고…….”
“…….”
“자세가 힘이 빠지고 구부정해지셔서 그런지 키도 좀 줄어든 것 같…….”
“그만. 거기까지.”
“…….”
“알고 보니까 이거, 팩트로 사람 함부로 패는 나쁜 사람이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뭐, 사실이니까.”
라키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난데없이 3왕자에게 디스(?)를 연타 콤보로 맞긴 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말 중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이틀째 날밤을 새운 덕분이었다.
‘게다가 검정색 K-맛 가시도 계속 써댔고.’
그냥 영화나 게임으로 날밤을 지새워도 체력이 갈리는 법. 하물며 자신은 극한의 고통을 연달아 참아내고 신진대사 가속을 거듭한 터였다. 이런데 몸 상태가 멀쩡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게다가 어쩔 수가 없기도 하고 말이지요.”
“어쩔 수가 없다니요?”
“연고, 만들어야 하거든요.”
“아…….”
3왕자는 흠칫했다.
연고.
그는 황태자가 말한 그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연고라는 걸 만들기 위해 황태자가 어떤 매일을 보내고 있는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저 때문에 그런…….”
“괜찮습니다. 한 며칠만 더 이러면 결과물을 얻어낼 것 같으니까.”
“그 전에 쓰러지시면 안 될 텐데요.”
“걱정해주는 건가요?”
“아, 네.”
“그런데 3왕자께서는 어째서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는 겁니까?”
“…….”
라키엘의 지적에 3왕자의 온몸이 딱 굳었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라키엘의 이어지는 말은 단호함 그 자체였다.
“제가 그랬죠. 훌러덩 벗고 지내야 한다고.”
“아, 네…….”
“그래서 그걸 위해 왕궁 정원의 절반이나 되는 구역을 통째로 비우고, 근위대를 동원해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출입을 전면 금지하기까지 했잖습니까?”
“그, 그렇긴 한데…….”
“그래서, 그 모든 이들의 수고를 헛되게 할 셈입니까?”
“하, 하지만…….”
“하지만?”
“조금, 부끄러워서요…….”
3왕자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솔직히 사실이었다. 엄청나게 부끄러웠다.
훌러덩이라니. 열일곱 살이나 먹고서는 나체 꼴로 옆나라 황태자를 대면해야 한다니. 게다가 자신의 몸은 스스로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치료를 위한 겁니다. 더 나은 앞날을 위해서인 겁니다. 그걸 잠깐의 부끄러움 때문에 포기할 겁니까?”
“아, 아뇨.”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렸는데요?”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왕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싶다면서요. 백성들을 책임지고 싶다면서요. 근데 지금 보니까 그거 다 뻥이었네. 잠깐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보다도 못한 거였네.”
“아, 아닙니다!”
“아녜요?”
“네!”
“그럼 훌러덩.”
“…….”
“당장. 쯧!”
“네에…….”
마침내 자포자기한 3왕자가 자신의 몸을 가리던 이불을 옆으로 치웠다. 하지만 라키엘은 만족(?)하지 않았다.
“빤쓰.”
“……네.”
마침내 속옷까지 벗고서야 완벽한 나체족으로 진화한 3왕자!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휴.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봐요. 얼마나 보기 좋아.”
“…….”
“명심합시다. 통풍이 제일 중요합니다. 상큼상큼 뽀송뽀송.”
“상큼상큼…… 뽀송뽀송…….”
“그렇죠. 일단 그게 기본으로 깔려야 약빨도 듣는 거니까.”
“그럼 그 약은…….”
“얼른 만들겠습니다.”
“아뇨. 너무 무리하진 마시라고요.”
3왕자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사실 그는 자신보다도 황태자가 더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누가 봐도 당장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하고, 칙칙하고, 구부정해진 황태자의 상태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그리고 저도…… 황태자님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는 당부를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훌러덩?”
“네. 훌러덩.”
“좋군요. 그럼. 오늘의 진료는 여기까지. 며칠 동안은 매 끼니 식후마다 처방받은 탕약 빼먹지 말고 마십시다. 면역력을 끌어올려 주는 탕약이니까. 면역력이 올라가야 피부도 진균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거고.”
“알겠습니다.”
“그럼, 연고가 완성되면 다시 올게요.”
“저기, 감사…….”
하다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태자가 휘적휘적 별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누가 보아도 바쁜 걸음걸이와 뒷모습. 그걸 보며 3왕자는 숙연해졌다. 자신을 고쳐주기 위해서 저렇게 애를 쓰는 사람이라니.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새삼스러운 각오를 다지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걸린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타인 앞에서 완전한 나체가 되는 것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련처럼 남겨두었던 몇 벌의 속옷과 셔츠 등등이었다.
일단 그것부터 다 치웠다. 스스로의 각오를 새기듯 아예 태웠다. 그 과정에서 시중을 드는 이들 앞에 당당한 나체로 나섰다.
물론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지? 어째서, 해방감이 느껴지는 거지?’
까닭 모를 묘한 자유가 느껴졌다.
이 얽매임 없는 시원함!
오직 나체만이 선사하는 훌러덩한 개방감!
그렇게, 하르미온의 앞날을 책임질 17세의 3왕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