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벌거숭이 왕자님 (1)
누구에게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순간이 있다.
가령, 예고 없이 사춘기의 첫사랑을 깨닫는다든가, 전부터 꺼려왔던 반찬의 참맛을 느껴 버린다든가, 혹은 본인도 모르고 지냈던 내면의 흑염룡(?)을 일깨운다든가 하는 경험들이 그렇다.
여기, 하르미온의 3왕자 크리스탄 리니에르 하르미온 또한 그러했다.
“이거…… 이렇게 편한 거였는지 정말 몰랐는데 말이지요.”
“…….”
“시원합니다. 후련합니다. 상쾌합니다.”
“…….”
“제가 왜 여태껏 이런 좋은 걸 모르고 살았을까요?”
“…….”
당연히 정상인이니까 그렇지, 라고 대꾸하고 싶지만 그건 최신 정서 트렌트에 살짝 반하는 대답일 수 있으므로 내적으로 커트!
라키엘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그는 조금은 난처한 미소와 함께 화제를 돌리려 노력했다.
“뭐, 좋군요. 그럼 요즘 마시는 탕약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마실 때마다 겨드랑이가 뽀송해지는 느낌입니다. 역시나 훌러덩 벗고 지내는 덕분인 걸까요?”
“마시기 불편할 만큼 쓰거나 하진 않고요?”
“쓴맛이 느껴져도 잠깐이더군요. 겨드랑이를 파닥파닥 움직이면 상쾌해지는 덕분이겠지요.”
“마시고 나서 몸에 열감이 느껴진다거나 목이 칼칼해진다거나 하는 증상은 없고요?”
“열감이 느껴져도 바람 한 번 쐬면 다 날아갈 테니 괜찮습니다. 역시나 몸에 걸친 것이 없는 자유 덕분인 거겠지요.”
“…….”
이런 x발.
라키엘은 결국 이렇게 묻고 말았다.
“나체가 그렇게나 좋아진 겁니까?”
“예.”
대답이 돌아오는 데에는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취향이 확고(?)해진 걸까. 3왕자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조금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님, 아니…… 라 원장님이 지도하고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상큼상큼, 뽀송뽀송. 처음에는 물론 부끄러웠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하고, 이래도 되나 싶더군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라 원장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었지요. 그 덕분입니다. 며칠 동안 이렇게 지내다 보니 어색한 기분이 사라지더군요.”
“그랬……습니까.”
“예. 이제는 옷을 걸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정말로 이거, 이렇게 좋은 걸 왜 모르고 살았던 걸까요?”
“…….”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 원장님.”
“…….”
라키엘은 쩝, 입맛을 다셨다.
무좀 진균 치료를 위해서 통풍이 중요한 건 맞는데. 이렇게 벗고 지내는 게 정말로 좋기는 한데.
‘조금 걱정되네, 이건.’
사실 나체로 지내는 건 치료를 위해서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나체 상태에 대단히 만족을 해 버린 3왕자는 새로운 취향(?)에까지 눈을 뜨는 중인 듯했다.
“…….”
모르겠다. 내가 남의 취향까지 케어해주거나 잔소리할 입장은 아니고. 결국,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배어나려는 쓴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감기에 걸리면 곤란하니까, 춥다 싶으면 얇은 거라도 한 장은 걸치세요. 요즘 일교차가 은근 큰 편이니까. 아, 그리고 이거-”
3왕자에게 주먹만 한 약병을 내밀었다.
“항진균 연고입니다.”
“아, 이게 말입니까?”
“네.”
마침내 완성했다.
대략 닷새쯤 걸린 것 같다.
이곳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조합했다. 최적의 비율과 배합을 가려냈다. 그걸 위해서 그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검정색 K-맛 가시로 얼마나 셀프 자해를 푹푹 저질러야 하였던가.
생각만 해도 1억 리터의 눈물이 나이아가라 폭포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콸콸 흐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완성했다. 최종적으로 뽑아낸 성분과 효능 또한 대만족이었다.
라키엘이 물었다.
“며칠 전에 제가 셀프로 발에 무좀을 감염시켰던 거, 기억하죠?”
“네, 기억합니다.”
“그거, 이젠 말끔히 나았습니다. 이거 바르고서요.”
“아……!”
사실이었다.
마침내 추출하고 졸여낸 연고를 시험 삼아 열심히 발랐다.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또 검정색 K-맛 가시로 셀프 시침을 자행했다. 덕분에 가속된 신진대사. 원래라면 족히 한 달은 걸렸을 치료 과정이 하루 반나절로 단축되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역시나 연고를 다 만든 직후에 뜨던 성분 분석 스킬의 결과표 그대로였지.’
문득, 당시에 떠오르던 결과표의 내용이 생각났다.
……딩동!
연고를 완성하자마자 쑴펑쑴펑 떠오르던 메시지.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연고를 감지하였습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①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선택은 예스.
이내 알차게 떠오르던 결과물이란.
[무좀박멸고]
[유효 성분 : 키아누마이신(keanumycins), 라우르산(lauric acid), 쿠마린(coumarin), 부틸리데넵스알라이드(butylidenephthalide), 페룰릭산(ferulic acid), 카로틴(carotene), 베르갑텐(bergapten), 크산토톡신(xanthotoxin), 그 외 이거저거, 기타등등, 블라블라]
[성상 : 흑자색의 연고]
[효능과 효과 : 진균 제거, 피부 표피 및 진피층의 세포 회복 가속, 피부 면역력 증진]
[용법, 용량 : 1일 2회, 환부가 덮일 정도로 도포]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 환자에게는 도포하지 말 것 - 간 질환 및 신부전 환자, 임부, 수유부, 2세 미만의 영아]
[부작용 : 본 연고는 항진균 작용으로 피부의 기능회복을 북돋고 미용 효과를 증진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사용자에게 지나친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 나르시시즘 과다 주의. 사용자의 자뻑이 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치달을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도포를 중지하기를 권함.]
[저장 방법 : 1~15℃의 직사광선이 들지 않는 환경에서 보관할 것]
[사용 기간 : 제조일로부터 1개월]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였던가.
“뭐, 어쨌건. 약효는 이미 시험을 마쳤으니까 열심히 바르면 될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점심 먹고 한 번, 저녁에 잠들기 전에 한 번. 혼자서 바르기 어려운 등 같은 부위는 시종에게 도움을 받으면 될 테고요.”
“그럼 시종의 손은 감염이…….”
“연고 덕분에 괜찮을 겁니다. 접촉 직후에 흐르는 물로 깨끗이 씻어주기만 한다면요.”
“아……!”
3왕자의 눈꼬리가 글썽글썽해졌다. 체질 개선 탕약에 이어 피부에 바르는 전용 치료 연고라니. 이런 걸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해본 적도 없었는데. 이렇듯 구체적인 완치의 희망을 안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사, 감사합니다.”
“뭘요. 진짜 감사는 다 나은 후에 받는 걸로 하지요. 그럼.”
“벌써……가시게요?”
“예.”
라키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훌러덩’ 상태에 지나치게 만족하는 당신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내 안구가 조금 숭해지는 것 같다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다른 핑계를 둘러댔다.
“좀 피곤해서요.”
사실은 솔직한 대답이었다.
검정색 K-맛 가시는 애들 장난이 아니다. 신진대사 가속을 위해 그 고통을 참아내는 건 더더욱 장난이 아니다. 그런 미친 짓을 며칠째 날밤을 새우며 감수했더니, 지금 당장에라도 아무 데나 쓰러져 잠들고 싶은 충동이 새록새록 솟구칠 지경이었다.
“그러니 일단 오늘은 좀 쉬고,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연고 바르는 거 빼먹지 말고요.”
“무, 물론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체인 상태로 넙죽 고개를 숙이는 3왕자.
그 모습에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숙소로 돌아갔다. 만족스러웠다. 마침내 완성한 연고도. 그걸 받아든 3왕자가 내보이는 기쁨의 감정도. 모두. 뿌듯했다. 이래서 자신이 한의사가 되었구나 싶을 정도로.
♣
뿌듯하다.
이래서 내가 하르미온의 1왕자로 태어났구나 싶을 정도다.
“크흐흣, 흐흣!”
1왕자, 제로스 마스트리히 하르미온은 흐뭇한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화려한 상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버지, 국왕의 친서와 직인이 새겨진 선물상자였다.
‘내가 1왕자니까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걸 이렇듯 중간에 가로채지도 못했을 거야.’
그는 문득,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렸다.
2왕자 녀석의 방문을 받은 뒤부터였던가. 3왕자 놈의 치료를 어떻게 방해할지를 내내 고민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3왕자가 복용하는, 황태자가 제조한 물약에 손을 댈까도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보안이 철저해서 접근할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어설프게 수를 썼다간 자신이 경을 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황태자에게 몰래 위해를 가하는 것은? 그건 뒷감당이 안 될 것 같았다. 제국의 황태자가 하르미온의 왕도에서 누군가의 습격을 당하여 상해를 입는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아마도 제국의 침공을 불러오겠지. 아무리 부왕이 계셔도 그것까지는 못 막아줄 것이고.
그러던 와중이었다.
마침내 오늘 아침, 눈이 번뜩 뜨이는 정보를 입수했다. 부왕이 치료에 전념 중인 3왕자에게 소소한 선물을 보낼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하여 바로 움직였다.
부왕께 찾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부왕의 선물을 자신이 3왕자에게 전달하면 안 되겠느냐고. 같은 핏줄을 이은 형제로서 아우를 격려하는 일이 자신의 책무가 아닐까 한다고.
그랬더니…….
‘부왕께서 너무나 흡족해하셨지. 크흐흣!’
그리고 선물상자를 자신에게 넘기셨다. 3왕자에게 잘 전해달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나니깐 가능한 거야. 나 정도 되니까.”
1왕자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선물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귀한 옷감으로 만든 정복이 담겨 있었다. 물론 최고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옷이겠지. 3왕자의 완쾌를 바라는 부왕의 마음을 담고서 말이다.
그래서다.
이 옷을 없애야 하는 것은.
“이거, 남들 눈에 안 띄도록 태워 버려.”
1왕자는 부름을 받고 달려온 시종에게 상자 속의 옷을 툭, 던졌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시종에게 위협적인 한마디를 첨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을 네놈과 나, 둘 이외의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 모두가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아니, 명심하겠습니다.”
창백해진 시종이 서둘러 옷을 보자기로 감싸고는 밖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게 된 빈 상자. 그걸 보는 1왕자의 시선이 더욱 흡족하게 물들었다.
“어디 그럼, 빈 선물상자를 받게 될 우리 막내 아우님의 반응을 조금 기대해 보실까.”
♣
“이게…… 부왕께서 보내신 선물?”
기대가 된다.
두근거린다.
무려 부왕께서 보내신 선물이라니.
이런 격려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두근, 두근!
하르미온의 3왕자, 크리스탄 리니에르 하르미온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선물을 받은 것은 10분 전, 저녁 식사를 마친 직후 무렵이었다.
뜻밖의 선물이라니.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3왕자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섣부르게 상자부터 여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 전에 그는 상자 위에 놓인 국왕의 친서부터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펼쳤다.
바스락…….
이내 눈앞에 펼쳐지는 아버지의 친숙한 필체. 마치 목소리가 들리듯, 눈가를 어루만지는 진실된 당부의 말씀들.
- 3왕자, 나의 소중한 아들에게
“…….”
부왕이시여.
아니, 아버지.
3왕자는 첫 줄을 읽자마자 콧등이 찡해짐을 느꼈다.
그 뒤로 어떻게 친서를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간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아버지의 솔직한 당부와 염려, 격려의 마음을 확인하며 몇 번이나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는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숨이 차올라 몇 번이고 서신 읽기를 멈추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듯 간신히 서신을 다 읽었을 때에는 이미 눈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도 3왕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행복했으니까.
특히,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으니까.
- 부디, 네가 지금의 역경을 이겨내고 이 옷을 멋지게 입어주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네, 아버지.”
기필코 부왕의 당부를 지키리라. 언젠가 이 저주받을 질환을 완전히 극복하는 날, 부왕께서 내리신 옷을 입고 부왕을 기쁘게 하여 드리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3왕자는 호흡을 골랐다. 떨리는 손길로 선물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비어 있는 상자의 진실을.
“……어?”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의 따스했던 당부처럼 포근한 옷감도. 언젠가 입어주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던 멋진 정복도. 없다. 어디를 보아도. 거꾸로 살펴도. 없다. 그냥. 없다.
“…….”
따스한 당부.
차갑게 빈 상자.
그 뜻은 무엇일까.
설마, 너 따위는 서신에서 당부한 바를 지킬 필요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걸까. 그걸 돌려 말하기 위해서 일부러 따스한 친필 서신과 싸늘하게 비어 있는 상자를 보내신 걸까.
정말로…… 그런 걸까.
3왕자의 고개가 서서히 떨구어졌다. 이내 가느다란 떨림이 목덜미를 사로잡았다. 목덜미를 지나, 어깨를 거쳐, 주먹까지 떨림이 옮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눈가를 떠나, 볼을 가로질러, 입꼬리에 머물렀다.
“빈 상자라니…….”
떨려 나오는 혼잣말.
저도 모르게 깨물어지는 아랫입술.
“너는 아무것도 입지 말라는 뜻이신가…….”
이내 찾아오는 선명한 깨달음.
그와 함께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
“……오히려 좋아.”
3왕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덜미가, 어깨가, 주먹이, 깨달음의 희열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마침내 알게 된 아버지의 진심에 감격의 눈물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도……내 나체력을 응원하고 계셨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1왕자가 나름 정성껏 꾸민 흉계가 3왕자를 완벽한 나체족으로 진화(?)시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