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벌거숭이 왕자님 (2)
“이거 혹시, 제가 흉계에 말려든 겁니까?”
“어허허허.”
“아무래도 맞나 보군요.”
“허허허허허.”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말입니다.”
“허허, 미안하오.”
“말로만 미안한 겁니까?”
“아니, 진심이오.”
“보통 진심은 요런 것과 함께할 때에 비로소 제 위력을 발휘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요런 것……이 무엇이오?”
“성의 말입니다. 성의.”
“성의라는 게 원래…… 동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었소?”
“대부분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라키엘은 넉살 좋게 웃었다.
그리고 동전 모양을 그려내고 있던 손가락을 풀고는 하르미온의 국왕,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의 목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자, 갑니다. 힘 푸시고. 호흡 길게 후우.”
“후우우…….”
“얍.”
뚜둑!
국왕 하르난트의 목에서 스티븐 시걸도 감탄해서 기립박수를 칠 만큼 상큼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곁에 시립해 있던 근위기사들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 크게 떨렸다. 옆 나라 황태자가 주군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꺾어대고 있는 상황이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자, 그럼 반대편도 갑니다. 후우.”
“후우우…….”
“욥.”
뚜그독!
“……커어어.”
“그렇게 시원하십니까?”
“이런 시원함은 처음이오.”
“아예 저를 전속 치료사로 임명하실 기세인데 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오.”
“그러자면 일단 저희 폐하께 허락을 좀 받으셔야 하겠지요?”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국왕 하르난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문득 오늘, 이렇듯 졸지에 황태자에게 ‘추나요법’이라는 걸 받게 된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런 걸 받을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사실은 그저 3왕자의 치료 상황을 전달받기 위한 소소한 만남이었다. 마침 3왕자의 치료에 진척이 있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을 두근두근 끌어안고서 나온 자리이기도 하였다.
한데 그런 두근두근이 너무 지나쳤던 탓일까.
지난밤을 온통 하얗게 꼬박 지새우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온갖 뻐근함과 두통에 시달리는 초췌한 얼굴로 황태자를 만나게 되었던가. 덕분에 이쪽과 대면하자마자 황태자가 염려스러운지 괜찮으냐 물어왔을 정도였다.
하여 자신은 솔직하게 말했다.
여기가 쑤시고, 저기가 뻐근하고, 요기가 당기고, 조기가 결리고, 이쪽은 아릿하고, 저쪽은 시큰거리고, 아주 그냥 머리어깨무릎팔무릎팔, 위아래위위아래 안 아픈 곳이 없다고. 그렇게 늙은이다운 엄살을 좀 섞어보았더랬다.
그랬더니 황태자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던가.
‘좀 주물러 드릴까요?’라고.
그때만 해도 그저 예의상 해주는 말인 줄 알았다. 이쪽의 장단에 맞추어주는 화법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막상 황태자의 ‘추나’라는 걸 받아보니까, 이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
이 정도로 본격적(?)일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나 시원하게 온몸의 관절을 모조리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수준일 줄은 정녕코 몰랐는데.
“그런데 말이오, 후우……!”
또그닥!
레고 조립술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국왕이 잠깐 더듬던 기억의 타래를 돌돌 말아 접었다. 그리고 라키엘을 향해 물었다.
“내 아들…… 3왕자는, 지금 어떤 치료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이제는 좀, 들을 수 있겠소? 끱!”
또곡!
“물론이지요.”
라키엘이 추나요법을 시전하며 씨익 웃었다.
“일단 상황이 매우 좋습니다. 체질 개선 탕약이 3왕자의 체질에 잘 맞고, 덕분에 면역력이 제법 올라오고 있으니까요.”
“면역력……이 무엇이오?”
“온갖 병마와 맞서 싸우는 우리 몸의 힘입니다. 건강한 신체의 필수요소이지요.”
“그럼…….”
“예, 그게 많이 개선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무좀 퇴치를 위해 만든 항진균 연고도 다행히 효과를 보이더군요.”
“그렇소? 걁!”
뽀그독!
“네. 어깨 시원하시죠? 여기가 많이 뭉치셨네. 아무튼, 3왕자가 연고를 바른 지 닷새가 지났는데 벌써부터 효과가 보이더군요. 특히 두피와 얼굴, 목덜미를 비롯한 상반신의 무좀이 눈에 띄게 줄고 있습니다.”
사실이었다.
3왕자를 위해 제조한 항진균 연고, 무좀박멸고의 효과가 생각보다 탁월하였다. 덕분에 며칠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3왕자의 얼굴을 비롯한 상반신에 온갖 딱지가 가득해졌을 정도였다.
“지금은 온통 딱지로 뒤덮여서 보기가 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딱지가, 말이오?”
“네. 무좀 때문에 짓무르던 피부가 드디어 자가 회복의 과정을 밟기 시작한 거지요. 상처가 나을 때처럼 말입니다.”
“하면, 그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예전처럼 정상적인 뽀얀 살갗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오오…….”
“하지만 그래서 좀 걱정인 부분도 있습니다.”
“걱정이라니, 무엇이오?”
국왕 하르난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매사에 염려라곤 없어 보이는 황태자가 걱정이 있다고 말하는 사안이라니. 3왕자에게 또 무슨 안 좋은 곳이 생겼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제가 안내한 치료법에 3왕자가 다소 지나칠 정도로 협조적이 되어 버려서 말입니다.”
“치료법에…… 지나치게 협조적?”
“그렇습니다.”
“그게 무엇이기에 그러오?”
“나체입니다.”
뽀그닥!
“……긃! 나, 나체?”
“그렇습니다.”
라키엘이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국왕의 척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무좀 퇴치를 위해 3왕자에게 통풍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가급적 나체로 지내도록 하였음은 익히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랬지. 그럼 설마…….”
“예. 생각하신 그 설마가 맞습니다.”
라키엘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3왕자가 의외의 취향에 눈을 떠 버린 것 같습니다.”
“…….”
“나체 상태가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더군요.”
“…….”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는지,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이 후회가 될 지경이라고.”
“…….”
“앞으로 무좀이 다 나아도 이렇게만 지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지경이랍니다.”
“……거, 혹여 만류는 해보았소?”
“물론이지요.”
라키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씨알도 안 먹히더군요.”
“…….”
“심지어 날이 갈수록, 무좀이 나아 갈수록, 3왕자의 나체력(?)도 함께 상승하는 것 같습니다.”
“…….”
“괜찮을까요?”
“……뭐, 괜찮소.”
잠시 고민했던 국왕 하르난트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사람답게 살기만을,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다른 어떤 것이든 희생할 수 있겠노라 생각했던 바요. 한데 완치의 부작용이 그 정도인 거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누가 무어라 해도 내 자랑스러운 아이니까.”
국왕이 흐뭇하게 웃었다.
라키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완치 후에도 이 일로 따로 문제 제기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고개를 끄덕이는 국왕.
덕분에 라키엘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국왕이 생각보다 열린 사람이라서.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으며 진상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건…… 한국에서 너무 많이 겪어봤으니까.’
문득 예전의 일들이 생각났다.
한국에서 서비스업을 비롯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진상이 생각보다 너무나 많다고. 이쪽이 호의를 지니고서 서비스 정신 충만하게 도움을 주어도, 그 결과를 가지고 또 꼬투리를 잡는 인간마저 수두룩하다고.
한의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곳은 나았는데 침 맞은 자리에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는 사람?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한약이 너무 써서 애한테 먹일 때마다 사탕이랑 초콜릿 등을 함께 먹여야 했다고, 사탕값 영수증을 가져와서 비용을 청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일까.
한의원 건물 지하 주차장을 출입하다가 차를 긁었다고, 한의원에 오느라 그런 거니까 한의원 잘못이 아니냐면서 차량 수리비를 청구하는 사람마저 봤다.
그래서였다.
오늘도 3왕자의 상태를 알려주기 전에 걱정이 되었더랬다. 괜히 3왕자를 나체족으로 만들었고 그게 너 때문이고 어쩌고저쩌고 말이 나올까 염려도 되었다.
하여 일부러 서비스를 핑계로 국왕에게 추나요법을 시전했다. 그 상태에서 3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의 몸이 이쪽의 손에 좌우되고 있다는 심리적 위치. 그게 정해진 상태에서는 진상질이 살짝 덜해진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렇게 잘 넘어가게 돼서.’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또 갑니다? 호흡 후우.”
“후우……!”
♣
……뽀그작!
“이 미친놈이.”
같은 시각, 1왕자 제로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손아귀 속 형편없이 구겨진 서신과 함께였다.
“감히, 나를, 초청을 해?”
그는 방금 자신이 구겨 버린 서신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3왕자의 초청장이었다. 자신이 은둔 생활을 끝낸 기념으로 형제들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 지극히 소박하고도 평범한 내용의 초청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1왕자에게는 이 초청장의 내용이 그렇듯 평범하게만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건…… 아무래도 우리에게 선포를 하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똑같은 초청장을 받고 1왕자궁으로 달려온 2왕자, 사르난이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건 도전장인 듯합니다.”
“그렇겠지? 이제부터 왕위 계승 경쟁에 끼어들겠다고 대놓고 티를 내는 거겠지?”
“그러니까 형님과 저를 함께 초청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 구실도 못 하던 놈이 감히.”
1왕자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다.
예전부터 부왕이 3왕자를 유독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3왕자 놈이 끔찍한 피부병에 걸려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덕분이었다.
하여 왕위는 내 것이라고. 딱히 자신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2왕자도 경쟁 상대가 아닐 것이라고. 한껏 마음을 놓고 지내온 터였는데…….
“…….”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3왕자 놈을 놔두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가봐야지.”
“초청에 응하려고요?”
“물론.”
1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놈의 상태가 어떤지를 내 눈으로 봐야겠다. 그래야 앞으로의 대책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동감입니다.”
두 왕자는 똑같은 눈빛을 나누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초청장에 적힌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함께 1왕자궁을 나섰다. 3왕자의 임시 요양소이자 초청 장소인 왕성 정원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3왕자와 조우하게 되었다.
“아……. 제 초청에…… 정말로 응해주셨군요?”
마침 초조한 기색으로 정원 별장 주위를 거닐던 3왕자.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17세 소년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형제들을 향한 원망이나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 100% 반가움의 미소였다.
“정말이지…….”
설마 정말로 초청에 응해줄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행여나 희미한 형제애나마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서성이던 참이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거였어.’
3왕자는 반성했다.
형님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뜬금없는 초청에도 선뜻 응해준 것이겠지. 이렇게 3년 만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하여 반가웠다.
예전엔 한때 싫어한 적도 있지만. 지금도 잠재적인 경쟁 상대인 것도 맞지만. 자신이 내민 손길에 선뜻 호응해준 형제들이 고마웠다. 앞으로는 건설적으로, 건전한 방식으로 경쟁을 이어가면서도 우애를 잃고 싶지 않다는 소망도 생겨났다.
하여 3왕자는 뛰었다.
자신을 선뜻 찾아와 준 고마운 형제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을 담아서. 순수한 기쁨과 호의로 두 팔을 활짝 펼치고서.
자신의 나체력을 한껏 드러내면서.
“어서 오십시오!”
훌러덜렁덜렁!
“……!”
1왕자와 2왕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은 절로 압도당하는 기분, 아니, 미증유의 공포를 느꼈다.
“어, 어어?”
“어어어?”
둘은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쪽으로 거침없이 달려오는 3왕자의 충격적인 모습에 어깨와 목이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반갑게 달려오는 3왕자가 이쪽으로 다가올수록.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저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으, 으아앗?”
“잠깐, 잠깐만!”
둘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3왕자와 반대편으로.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절박하게. 다급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후다닥 일어나고. 혼비백산을 하며. 생애 최고 속도를 갱신하며 달려갔다.
완벽한 도주였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1, 2왕자가 3왕자의 엄청난 기세에 짓눌린 나머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서 다급하게 도망을 쳐 버렸다는 소문이 왕도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