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50화 (449/468)

450화. 벌거숭이 왕자님 (3)

“자네, 혹시 그 소식 들었나?”

하르미온의 왕도 하르마스.

이곳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시장의 상인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서 호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청을 뚫고서 종종걸음을 옮기는 아낙들의 걸음은 바빴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뛰어가는 사람들. 미처 털어내지 못한 졸음을 하품으로 달래는 사람들. 이른 산책을 나온 강아지까지. 도시 전체가 들썩이듯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여느 때와 달리 조금은 더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만에 왕도 구석까지 퍼진 어느 소문 때문이었다.

“그 소식이라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주점의 간판을 고치던 젊은 인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참 인부가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자네는 젊은 친구가 이렇게 소식이 느려서야.”

“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식인데요.”

“3왕자님에 대한 이야기일세.”

“3왕자님이요?”

“그렇지.”

“그분…… 얼마 전에 칩거하던 왕자궁을 잃지 않았습니까? 화재 때문에 말입니다.”

“그건 아는구만? 한데 그 소식이 끝이 아닐세.”

“그럼 뭡니까?”

“사실 3왕자님께서는…… 3년 동안 단순히 칩거만 하신 게 아닌 모양이야.”

고참 인부가 주위를 슬쩍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알고 보니 엄청난 무력을 지니고서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이 말일세.”

“무력……이라니요?”

젊은 인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이 대꾸했다.

“무슨 소설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그분, 이제 열일곱인가 그럴 텐데 무력이라 봤자…….”

“자네 말일세. 어제, 1왕자와 2왕자가 3왕자의 위세에 눌려 머리를 감싸쥐고 도망을 쳤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겠지?”

“……예?”

그게 무슨 소리일까.

고참 인부의 말이 이어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일세. 어디 목격자가 한둘이어야지.”

“누구한테 그 소리를 들으신 겁니까?”

“놀라지 말게. 당시 현장에 있던 3왕자의 시종이 내 아내의 사촌의 사돈댁의 옆집의 삼촌의 아들의 절친의 육촌의 아랫집의 여친의 강아지의 산책 친구의 엄마의 동창의 단골집 부부의 아들이란 말일세.”

“……그 정도면 그냥 가상의 인물 아닙니까?”

“떽. 무슨 허튼 소릴.”

“…….”

“어쨌건 믿을 만한 소식통이 전해온 생생한 목격담이란 말일세.”

“그래서,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있지.”

고참 인부가 어깨를 딱 펴며 말했다.

“앞으로 이어지게 될 왕위의 향방이 바뀌지 않겠는가, 이 말이야.”

“아…….”

“아무래도 말일세. 그동안 왕위 계승자 노릇을 하던 1왕자가 조금…… 못 미덥던 건 사실이 아닌가?”

“하긴, 좀 그렇긴 했지요?”

“그렇지. 그런데 이제 더 나은 후보가 나오게 된 거라, 이 말일세. 허허.”

“확실히 그건 좀 말이 되긴 하네요.”

고참 인부가 웃었다.

젊은 인부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 수군거림은 여기서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새 간판을 달고 있는 주점 앞에서, 신선한 달걀을 파는 공판장 앞뜰에서, 하품을 삼키는 출근길 달구지 위에서, 아침 기도를 준비하는 수도사들 사이에서마저도.

모두가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3왕자의 칩거가 알고 보니 엄청난 무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이었다더라. 덕분에 3왕자가 땅을 가르고 하늘을 뒤집을 신력을 얻게 되었다더라.

그 위세에 질린 1왕자와 2왕자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꼬리를 감추고 줄행랑을 쳤다더라, 등등.

게다가 부풀려지는 소문을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3왕자의 소식을 들은 국왕께서 몹시 흡족해하며 껄껄 웃었다더라. 심지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은 앞다투어 특별 사절을 보낼 준비마저 갖추고 있다더라.

향후 30년만 지나면 우리나라가 대륙 전체를 통일하게 될 거라고 예언자들이 떠들고 있다더라, 어쩌고저쩌고, 미주알고주알, 블라블라 등등까지.

“……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지고 있는 거, 당사자인 3왕자께선 들어봤습니까?”

“아, 아뇨, 절대로.”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침이 지나고 오후의 햇볕이 서서히 기우는 시간. 어느새 왕도 구석까지 파다하게 번진 소문을 3왕자에게 전한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3왕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네?”

“어제 말입니다. 1왕자와 2왕자를 보자마자 맹렬하게 달려갔다면서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아…….”

‘지금 이 모습 그대로’라는 라키엘의 지적에 3왕자가 살포시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나체 상태인 자신의 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어, 음, 그냥 반가워서 그랬던 건데 말이지요.”

“반가워서 말입니까?”

“네.”

3왕자가 말했다.

“그냥, 막상 얼굴을 보니까 조금 벅차오르더라구요. 사실 전에는 미워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고. 아무리 그래도 결국은 핏줄을 나눈 형제들인데, 서로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경쟁을 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나 싶기도 했고. 문득 들었던 그런 생각과 기분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조금 뭉클해져 버려서…….”

“그래서, 훌러덜렁덜렁?”

……끄덕.

“두 팔 벌리고서 부담스럽게 막 뛰어가고?”

……끄덕끄덕.

“다음부턴 그러지는 마시고.”

“……네.”

3왕자가 반성(?)하며 얼굴을 붉혔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맺혔다.

‘어쨌거나 나쁘진 않네.’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어제의 일 덕분에 1왕자와 2왕자에 대한 백성들의 여론이 완전히 식어 버렸다. 반대로 3왕자는 최고의 핫가이(?) 후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건 훗날의 자신과 마젠타노 제국에게도 결코 손해가 아닐 일이었다.

‘만약 3왕자가 이대로 기세를 타고서 정말로 다음 대의 국왕이 된다면 뭐, 그때부턴 하르미온과의 더 따끈따끈해질 관계를 기대해 볼 수 있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지금, 이쪽을 바라보는 3왕자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가장 큰 증거였다.

“그런데 황태자님?”

“예?”

“황태자님께서는, 혹시 하늘이 내려보내 주신 분이신가요?”

“……예?”

“그냥, 조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은 3왕자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밝혔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틀어박혀 기도만 하고 있던 제 앞에 이렇듯 불쑥 나타나 주셨잖아요. 그날, 3왕자궁이 불타는 것처럼 꾸며졌던 그날 말이지요.”

“……눈치채고 있었습니까? 3왕자궁의 화재가 가짜였다는 거?”

“처음에는 몰랐지만요.”

3왕자가 멋쩍게 웃었다.

“너무 철저하게 준비를 하셨던 덕에 알아채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뭐, 그래도 이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됐죠. 보시다시피, 그 꾸며진 화재 덕분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이렇게까지 나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3왕자가 자신의 팔뚝을 내보였다.

덕지덕지 붙어 있던 딱지의 절반 정도가 자연스럽게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올라오고 있는 뽀얀 새 살갗. 더는 예전의 갈라지고 진물투성이인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팔뚝뿐만이 아니었다.

얼굴 또한 그러했다. 머리에는 금빛 머리칼이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목덜미와 어깨, 등, 다리는 물론이었다.

심지어 무좀의 본진(?)인 발까지도 예전보다 제법 호전된 모습이었다.

“이게 다 황태자님 덕분입니다.”

“뭐,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차피 공짜 진료는 아닌 셈이니까.”

“테니온, 그 도시를 이양받기로 하신 거요?”

“예.”

“하지만 그래도 저는 감사한걸요.”

“그런가요.”

“네. 제게 새로운 자유로움의 행복도 알게 해주셨고요.”

“……설마.”

“맞아요. 한낱 의복에 얽매이지 않는 이 해방감, 자유, 떳떳함까지. 황태자님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겠지요.”

“…….”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응, 나도 끔찍해.

내가 세상에 어떤 괴물(?)을 풀어놓는 건가 싶어서.

라키엘은 배어 나오려는 쓴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전에 말했죠? 무좀 치료는 조금 낫는다 싶을 때부터가 진짜라고. 이런 시기에 어설프게 치료를 중단하면…….”

“내성이 생긴 더 강력한 진균 때문에 더 크게 고생하며 완치의 길이 한층 멀어진다, 라고 하셨죠.”

“기억하고 있군요.”

“당연하죠. 그래서, 이젠 제 시종들에게 탕약과 연고 제조법을 알려주고 떠나시려는 거죠?”

“……그것까지 눈치챈 겁니까?”

“조금은요?”

3왕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배어났다.

지금 보니, 어째서 하르미온의 국왕이 3왕자의 질환을 안타까워했는지가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똑똑하다. 그런데 악하지는 않다.

이 정도면 정치적 파트너로 두고두고 함께 가기에 썩 괜찮은 녀석일 듯하다.

게다가…….

“그럼, 앞으로 탕약 마시기와 연고 바르기를 꼬박꼬박 빼먹지 않는 것이 제게 숙제가 되겠군요. 맞죠?”

“그렇습니다.”

“또 그럼…… 가끔 제가 숙제에 소홀해지거나 하면 황태자께서 찾아오시기도 할까요?”

“예?”

“그게, 따끔하게 충고하러라도 얼굴 보러 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형.”

“……예?”

“저기 그냥, 둘만 있을 때는 형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어, 음.”

……이 녀석, 생각보다 훨씬 이쪽을 따르는구나. 그러고 보면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 녀석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결국,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나도 둘만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물론이죠!”

“어, 어어, 스톱, 스톱. 더 가까이 오진 말고.”

“네? 왜요?”

“좀 입든가!”

“아니, 벗고 지내야 치료에 좋다면서요?”

“내 눈엔 안 좋아!”

라키엘은 부담스럽게 다가오려는 3왕자 크리스탄을 발로 차서 밀어냈다. 물론 그럼에도 크리스탄은 키득대며 웃었다. 라키엘의 입가 또한 웃음을 머금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동시에 그는 느꼈다. 이제는 황도로, 별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3왕자 크리스탄의 시종들을 교육했다. 3왕자의 면역력 증강제인 ‘청상방풍탕’과 항진균 연고인 ‘무좀박멸고’의 정확한 제조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교육은 혹독했다.

심지어 3왕자 크리스탄마저도 교육의 대상이었을 정도였다.

“잘 들어, 크리스탄. 네가 마시고 바를 약이야. 그런데 제조법을 모르고 생판 남에게만 맡긴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적어도 이것들이 올바르게 만들어지는지를 네가 지켜보면서 감지할 수준은 되어야 해. 알겠어?”

“네, 형.”

크리스탄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제조법을 익혔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시종과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보름이 지났을 무렵, 크리스탄과 시종 시녀들은 레시피대로의 완벽한 청상방풍탕과 무좀박멸고를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라지만, 데미안 녀석은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이지?”

보름째의 교육을 마친 라키엘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데미안이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생긴 호위의 빈자리. 그 공백을 세르지오를 비롯한 특근대와 프란델 경을 위시한 근위기사들이 협동으로 채운 요즘이었다.

“내가 지난달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일부러 말은 안 했거든. 아마도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그런데 한 달이 되도록 코빼기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 자리를 비우는 건 좀 아니잖아? 그래서 묻는 건데 혹시 데미안 녀석, 나 몰래 여기서 연애라도 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프란델 경이 차렷자세로 대답했다.

“데미안 카이엔 경은 한 달 전부터 합당한 사유서를 제출하고서 호위 임무에서 임시로 열외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호위에서 열외? 합당한 사유서?”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프란델 경은 그 사유서를 승인한 거고?”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그 사유가 뭐였길래?”

라키엘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보아온 프란델 경은 일을 얼치기로 하는 자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때로는 지나치게 깐깐하다 싶을 정도로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쪽의 공식적인 최근접 호위인 데미안을 한 달이나 임무에서 열외시키는 일을 직접 승인하다니. 대체 얼마나 ‘합당한’ 사유였으면 그걸 승인했을까 싶었다.

프란델 경이 대답했다.

“사유는 카이엔 경의 자기 계발이었습니다, 전하.”

“자기 계발?”

“그렇습니다, 전하.”

“혹시 무슨 나 몰래 학원 등록했어?”

“……예?”

“아니면 과외라도 받아?”

“그, 그런 건 아니옵고…….”

“아니면?”

“멀티 마나하트를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 그래서…….”

“그래서?”

“카이엔 경이 한 달 내내, 이곳 하르미온의 모든 기사들을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차례차례 박살 내는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하.”

“……뭐?”

“게다가…….”

뒤이어지는 프란델 경의 더욱 충격적인 보고, 혹은 간증(?). 그걸 귓구멍으로 접수하는 순간, 라키엘은 자신의 고막을 한껏 의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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