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멀티 까는 마나하트 (1)
“카이엔 경이 한 달 내내, 이곳 하르미온의 모든 기사들을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차례차례 박살 내고 있는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하.”
“……뭐어?”
“게다가…….”
프란델 경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내용을 듣는 순간, 라키엘은 자신이 귓구멍으로 접수한 소리가 이 세상의 팩트인지를 양쪽 고막으로 한껏 의심해야 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으음, 데미안 경이 거의 매일, 24시간 쉬지 않고 대무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
“저도 소문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주 허풍이나 과장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부분도 있어서…….”
“대체 어떤 부분이?”
“목격자가 세르지오 경을 비롯한 특근대원들이라서 말입니다.”
“……흐음.”
라키엘은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매일, 24시간 풀 대무 중인 데미안이라.
인간의 몸으로 그게 가능한 걸까.
아니.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데미안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더라도 생물학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특근대원들이 목격했다니.
‘다른 이들은 몰라도 세르지오는 허풍과 거리가 먼 타입인데.’
검투사 출신치고 나름 중후하며 입이 무겁고 진중한 이가 세르지오다. 그런 그가 같은 검투사 출신인 데미안을 포장해 주려고 필요하지도 않은 허풍을 섞어서 보고를 올린다? 그런 일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라키엘이 물었다.
“쯧.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거기가 어디지?”
“예?”
“데미안이 무한 대무를 이어가고 있다는 곳.”
“아, 하르미온 근위대 전용 연무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직접 가보시려는 겁니까, 전하?”
“그래야지. 혹시나 세르지오의 보고가 진짜라면 말리려고.”
아무리 강한 이라도 휴식 없는 단련은 혹사일 뿐이다. 게다가 데미안은 아직 혈당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육신의 한계를 훌쩍 넘어가는 수준의 혹사를 겪는다면? 자칫 저혈당 쇼크로 큰일이 날 수도 있다.
말려야 한다.
“그러니까 다들 가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프란델 경과 근위대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하르미온 근위대의 전용 연무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덕분에 몇 가지 출입절차를 거치며 어렵지 않게 연무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연무장은 넓었다.
한 국가의 최상위 기사들의 전용 연무장답게, 일단 면적과 규모부터가 여타의 연무장과 격을 달리했다. 체력 단련 기구부터 온갖 훈련 시설들이 최상급 헬스장처럼 착착 갖추어져 있음은 물론. 개중에는 자유로운 대무를 위한 공간도 따로 갖추어져 있었다.
가로와 세로 각각 15미터의 면적.
그 둘레를 단단하게 둘러싼 철창.
얼룩진 핏자국과 땀방울의 열기로 가득한 연무대 위. 이미 패배한 듯한 근위기사들의 시선과 탄식이 한데 얽혀 들끓는 바로 그 무대 위에, 한 자루 검을 송곳니처럼 품은 녀석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자유로운 모습.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
한때 지하 검투장의 폭군으로 군림했던 사내.
데미안이었다.
‘똑같네.’
예전, 지하 검투장에서 처음 녀석의 모습을 대면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와 너무나 흡사했다.
녀석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여전히 훤칠한 키와 균형 잡힌 체격도, 치렁한 검은 머리칼도, 굳게 다물린 입매도, 좌중을 쓸어보는 무감정한 눈빛도, 모두.
‘앞선 한판(?)을 끝내고 잠깐 숨 돌리는 타이밍인가.’
그나저나 녀석은 괜찮은 걸까.
며칠째 24시간 대무를 이어왔다고 했는데.
사람이라면 당연히 버틸 수 없는 강행군인데.
그나마 다행히 녀석의 안색이나 자세에서는 별다른 피로나 혹사의 징후를 찾아볼 수가 없는 점이 다행이었다.
‘세르지오가 안 어울리게 뻥을 쳤던 건가.’
그 생각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철컹! 카르르륵!
철창 한쪽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쪽의 출입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들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데미안의 다음 상대로 추정되는 사내가 철창 안쪽 연무대 공간으로 첫걸음을 디뎠다.
쿠웅!
내디딘 것만으로 지축을 흔드는 육중한 발소리.
거대한 짐승이나 괴수?
아니었다.
일개 사나운 짐승이나 괴수라면 고요히 서 있는 자세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을 선사할 수는 없으리라. 철창 너머에서 구경하던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들을 들뜨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드디어 단장님께서 나서신 건가.”
“지난번 대결에서는 스무 합을 겨룬 끝에 단장님이 스스로 물러나셨는데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네.”
“어째서?”
“기억나지 않나? 지난번의 단장님께선 손에 익지 않은 보통의 철검을 사용하셨지 않았나.”
“……아.”
“그러니 오늘이 진짜일 것일세.”
“하면, 결과는 어떨까?”
“나는 단장님의 승리를 믿네.”
“나도…… 동감이야.”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들이 낮게 나누는 대화가 얼핏 들려왔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연무대 위로 올라온 저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가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단장인 듯했다.
‘트라케너 무스코……라고 했나.’
전에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났다. 잠재적인 경쟁국 중의 하나인 하르미온. 그곳에서 가장 명성이 드높고 용맹과 충성을 겸비한 인물이 무스코 경이라고.
그때였다.
……후우웅!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단장, 무스코 경이 양손에 나누어 쥔 두 자루의 할버드를 허공에서 휘둘렀다. 두 자루 할버드의 모양은 독특했다. 왼쪽은 길고, 낭창낭창하고, 날카로웠다. 오른쪽은 짧고, 단단하고, 육중했다.
단지 무기의 모양뿐만이 아니었다. 두 자루의 할버드를 서서히 감싸는 두 갈래 오러의 성질 또한 그러했다.
츠스스스스……!
왼쪽의 오러는 더없이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서 날뛰어댔다.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잘라낼 면도칼 같은 기세였다. 반면, 오른쪽의 오러는 공사용 오함마를 열 배는 뻥튀기 시킨 것처럼 묵직한 포스를 줄줄이 뿜어내고 있었다.
“하르미온의 기사, 트라케너 무스코가 그대, 마젠타노의 데미안 카이엔 경에게 도전하는 바이오!”
투쿠우웅-!
무스코 경의 한마디 인사와 함께 연무장이 그의 기세로 가득 찼다.
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기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런 사람이랑 싸운다고? 아직 혈당 문제가 극복이 되지도 않은 몸으로?’
이건 좀 무리가 아닐까.
물론 정상인 상태의 데미안이라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상대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래 실력의 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인 데미안이다. 반면, 상대는 마젠타노에서 본 그 어떤 소드마스터보다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쪽 폐하의 호위인 근위기사단장 로베르토 경이랑 싸우면…… 아무래도 장기전 끝에 로베르토 경이 살짝 밀릴지도.’
그 정도로 만만치 않은 포스가 느껴졌다.
잠깐 고민이 되었다.
이 대결, 말려야 하나.
그때였다.
투확!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무스코 경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신속한 돌진이었다.
후와악-!
5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는 무스코 경. 그가 왼쪽의 길고 날카로운 할버드로 공간을 긁었다. 그 끝에 데미안이 있었다.
콰츠츳!
할버드에서 뿜어져 나온 오러에 공간이 수십 갈래로 찢겼다. 그 순간, 고요히 서 있던 데미안의 눈이 번득였다고 느껴진 건 이쪽의 착각이었을까.
……츠핏!
데미안의 실루엣이 잠시 흔들렸다.
그것은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다.
선명하고 서늘한 섬광이 데미안과 무스코 경 사이를 단 한 차례, 오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허?”
오른쪽의 육중한 할버드를 내리찍으려던 무스코 경이 움찔. 헛숨을 들이켜며 동작을 멈추었다. 불신과 불안이 반씩 섞인 눈빛을 데미안에게 던졌다. 그것이 무스코 경이 오늘의 연무대 위에서 보인 마지막 몸짓이 되었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힘이 풀리는 무릎.
무스코 경의 전신이 허물어졌다.
어느새 힘없이 놓쳐 버린 두 자루의 할버드와 함께였다.
쿠우웅!
육중한 굉음과 함께 쓰러진 무스코 경.
다시 일어나 싸우는 것?
꿈도 꿀 수 없었다.
‘깔끔한…… 기절이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무스코 경의 상태를 살폈다. 경혈 스캐닝 덕분에 보였다. 그의 신체에 맴도는 모든 마나의 흐름이 아주 교과서적인 ‘숙면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무려 소드마스터를 한큐에 재운 것이었다.
‘어딜 친 거지? 보이지도 않았어.’
마치 그 예전, 처음 만났던 날, 지하 검투장에서 트롤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던 때처럼, 너무나 깔끔하고도 파괴적인 일격인 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의아했다.
데미안 녀석, 여전히 혈당 트러블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는데. 혹시 방금의 일격을 위해 지나친 무리를 한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녀석을 살폈다. 그러자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였다.
녀석의 심장.
마나하트.
그곳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현상이.
‘……어?’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실눈을 떴다. 이상했다.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고 있는데도 데미안의 마나하트가 잘 보이지 않았다. 없어져서?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가 엄청, 겹쳐진 것처럼 마구잡이로 엉켜 있는데?’
마나하트가 있어야 할 가슴 중앙.
그곳에 마구잡이로 얽힌 실타래 같은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너무나 복잡했다. 마치 6살짜리 꼬맹이가 아무렇게나 어질러 놓은 레고 블럭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복잡하게 꼬인 수많은 흐름들 때문에 마나하트가 가려져서 보이지가 않는 것이었다.
‘뭐지?’
이런 현상은 처음 봤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연무대를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데미안 녀석도 이쪽을 본 걸까. 녀석이 검을 갈무리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야, 괜찮냐?”
마침내 철창을 사이에 두고 녀석과 마주하자마자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녀석이 태연스레 대꾸해 왔다.
그러더니 어깨를 살포시 으쓱.
“믿었던 근위기사단장마저 일격에 무너졌으니, 저들은 별로 안 괜찮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
녀석의 눈빛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선 침울해진 하르미온의 근위기사들이 자신들의 단장을 들것으로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저쪽이야 알 바가 아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아니, 저들 말고. 너 말이야. 넌 괜찮냐고.”
“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괜찮습니다.”
“24시간 대무했다는 거, 진짜야?”
“아닙니다.”
“그럼?”
“정확히는 22시간 정도씩 대무한 것 같습니다.”
“설마, 매일?”
“예, 전하.”
“…….”
“22시간 정도를 겨루고, 나머지 시간을 조금씩 쪼개서 먹고, 눈을 붙이고를 했습니다.”
“그게…… 가능해?”
“해보니까 되더군요.”
“어떻게?”
“마나하트의 숫자가 늘어난 덕분인 것 같습니다.”
“멀티 마나하트?”
“네, 전하.”
데미안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거였나. 녀석이 미친 것처럼 대무에 매달렸던 이유도. 그렇게 초인적으로 싸워대면서도 지치지 않는 인간 에너x이저의 위용을 과시했던 비결도.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이는 마나하트 주위의 엄청나게 중첩된 마나의 흐름까지도.
‘전부 멀티 마나하트의 숫자가 늘어난 덕분이었던 거네.’
비로소 조금은 걱정이 놓였다.
그러자 한편으론 궁금해졌다.
“마나하트가…… 몇 개가 된 건데?”
물으면서는 약간 기대도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멀티 마나하트의 숫자가 2개였던 데미안이었다. 그 후로 약 1개월 정도 무한 대무의 특훈을 했으니까…….
‘한 5개쯤으로 늘었으려나? 아니, 그건 좀 심한가? 그래도 데미안은 자타공인 소설 주인공 버프를 받는 천재니까.’
어쩌면 5개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멀티 마나하트의 최고 권위자(?)인 아스라한 변경백이 평생을 훈련해서 10개를 보유하고 있으니, 한 달 만에 그 절반인 5개를 생성한 거면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5개의 멀티 마나하트라면, 혈당을 소모하는 녀석의 새로운 검술이 더욱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그쯤이면 아마…….
‘혈당 트러블의 한계에서 훨씬 자유로워진다고 봐야겠지.’
즉, 당뇨를 거의 극복한 셈이 되는 것이다.
무려 5개의 멀티 마나하트!
덕분에 1형 당뇨 극복!
기적에 가까운 성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그때였다.
데미안 녀석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멀티 마나하트의 숫자를 물으신 거라면, 지금 기준으로는 256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