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52화 (451/468)

452화. 멀티 까는 마나하트 (2)

“멀티 마나하트의 숫자를 물으신 거라면, 지금 기준으로는 256개입니다.”

“…….”

내가 무슨 소리를 접수한 걸까. 혹시 지금 내 고막이랑 달팽이관이 휴먼 에러를 빡세게 일으키고 있는 걸까.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XL 사이즈 면봉을 찾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그리고 데미안을 향해 되물었다.

“2.56개?”

“256개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다.”

“…….”

진짜구나.

말도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녀석의 예상을 초월하는 천재성에 놀라야 하는 걸까.

‘주인공 버프 진짜…….’

데미안이 정정해주는 말을 들었음에도 실감이 나지가 않았다. 나름 예상했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성과를 들어 버린 탓이리라. 예를 들자면, 주유소에서 경차에 기름을 만땅으로 넣었을 뿐인데 결제금액이 12억 원이 떠 있는 걸 보는 기분?

“아니, 근데 그게 말이 돼?”

“네, 전하.”

“어떻게?”

“이미 실현이 된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네가 갑자기 256개나 되는 멀티 마나하트를 지니게 된 거냐고. 그것도 달랑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사실 이거야말로 아스라한 변경백이 들으면 탄식과 함께 쏘주 한 병을 말없이 까게 될 소식이 아닐까. 내가 그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 자신이 평생 피똥 싸듯이 훈련을 거듭하여 10개의 자랑스러운 마나하트를 지니게 됐는데, 누구는 한 달 벼락치기 훈련으로 무려 256개를 보유하는 사기적인 기염을 토해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비결이 따로 있었던 거겠지?”

“네, 전하.”

흑발의 호위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비결은…… 분열에 있었습니다.”

“분열?”

“네.”

고개를 끄덕.

데미안은 문득, 한 달쯤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황태자를 따라 덜컥 이곳 하르미온의 왕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가. 당시까지도 자신은 깊디깊은 고민에 휩싸여 있었더랬다.

“그것은 멀티 마나하트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숫자를 늘리고 싶었습니다. 아스라한 변경백 덕분에 익힌 멀티태스킹 능력을 강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혈당을 조절하는 검술이 완성되고, 더는 전하께 짐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어이, 그 누구도 너를 짐이라고 여기…….”

“지는 않겠지만, 저는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랬냐.”

“예.”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당뇨병.

이 끔찍하게도 지긋지긋한 질환에 걸린 이후로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죄책감? 한심함? 그보다는 사무치는 듯한 무력감에 몸을 떨어야 했던 매일이었다.

검의 위력이 반토막이 났다.

몸이 전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량의 저하.

그 감정은 자괴감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점점 마음을 좀먹어 왔다. 마치 썩어 버린 사과의 한쪽 귀퉁이처럼. 썩은 부위가 전염병처럼 차츰 번져가듯. 스스로를 향한 남모를 회의감과 의문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이대로면 제가 검사로서의 가치를 잃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하지만 멀티 마나하트를 무사히 장착했잖아?”

“두 개 남짓이 고작이었지요.”

당시를 떠올리는 데미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배어났다.

“멀티 마나하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드디어 제 역할을 되찾을 길을 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섣부른 환호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본드래곤, 뚜식 공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그 착각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으니까요.”

사실이었다.

두 개의 멀티 마나하트.

그걸로는 혈당을 소모하는 검기를 두 번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결국엔 이동이 가능한 2회짜리 자율적 검기 발사대……밖에 되지 않는 거였지요. 그때까지의 저는.”

“그래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거야? 멀티 마나하트를 발전시키려고?”

“네, 전하.”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거구나.”

“행운이 겸비된 우연이었습니다.”

데미안의 씁쓸하던 미소에 조금은 뿌듯한 감정이 배어났다.

“한 달 전이었지요. 전하께서 3왕자를 훌러덩 벗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종일 전하의 곁을 지키고, 전하께서 잠든 뒤에는 세르지오 씨와 프란델 경에게 호위 임무를 인계하고는 별채 뒤뜰로 내려갔습니다.”

“혼자 훈련?”

“네. 하지만 잘 되지가 않더군요. 아무리 해도 마나하트의 숫자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설령 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확신만 들더군요. 마치, 아스라한 변경백이 평생을 매달렸지만 10개의 마나하트를 얻는 데에 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초조했겠구나.”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화풀이를 하듯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던 거겠지요.”

“네가…… 그랬다고?”

“예, 전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

녀석이 그랬다니, 조금은 뜻밖이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검을 잡고 있을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냉철한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잠깐이나마 빡쳐서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허공에 검을 휘둘러댔다니. 들으면서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데미안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제가 마구잡이로 휘둘렀던 검격에 맞아 갈라져 버린, 바닥의 이름 모를 잡초의 잎사귀를 말입니다.”

“그게…… 깨달음의 단서였다고?”

“네. 그 잎사귀, 액자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중앙이 갈라져 있더군요. 덕분에 두 갈래로 갈라진 모습을 보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마.”

“짐작하신 겁니까?”

“어……. 갈라짐, 분열, 숫자가 늘어났어, 뭐 이런?”

“정확하십니다.”

데미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래서 주군이 좋다.

이야기가 잘 통하니까.

그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작정 숫자를 ‘늘려야겠다’라고 생각했던 바를 말이지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방향을 바꾸었다.

훈련 방식도 바꾸었다.

애초에 정규 검술 교육 따위는 받아본 적도 없는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홀로 고상하게 검을 휘두른다 한들 제대로 훈련이 될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 하르미온 근위대의 연무장을 찾아갔습니다.”

오로지 실전.

검과 검이 부딪치고, 숨결이 끊어질 듯 가슴을 조이고, 그 와중에도 쏟아지는 상대의 맹공을 받아쳐야만 비로소 살아남고 이겨낼 수 있을 실전. 자신의 답은 실전에 있다. 오직 그 생각으로 근위대를 찾아갔다.

처음은 가벼운 대무 신청이었다.

근위대 기사들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반기는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자신의 이름이 이곳 하르미온에도 퍼져 있었다. 덕분에 쉽사리 근위기사와 검을 맞댈 수 있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최대한 짧은 시간에,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근위기사를 박살 냈다. 단숨에. 반격의 여지도 없이. 허망함과 치욕을 느낄 정도로.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를 배려하는 말랑한 대무 따위는 해본 적도 없는 자신이었으니까. 그게 당연했다. 한데 근위기사들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항의했다.

고작 대무인데 일격에 손목 골절이라니,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항의에 대한 대답은 말 대신 검으로 했다.

다음 상대를 가리켰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끝없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대일 대결의 연속이었지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근위기사들의 긍지가 제대로 상처 입었으니까 말입니다.”

싸우고 또 싸우고.

겨루고 또 겨루고.

이기고 또 이겼다.

그러나 하르미온의 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거듭된 패배와 함께 손상된 자부심을 되찾으려 들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말단 종자부터 기사단장까지, 모두가 나섰다.

“그렇게 아예 번호표 뽑고 기다리면서까지 너와 겨뤘다는 거구만.”

“그렇습니다. 덕분에 일곱 차례의 분열에 성공했고요.”

“일곱……번?”

“네, 전하.”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첫 분열에 성공했던 때가 떠올랐다.

다섯 번째 도전자와 격돌했던 순간이었다. 혈당이 요동치며 급격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견뎌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쓰러지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며 버텼다. 간신히 이겨냈다. 그러자 보답 같은 성과가 품에 안겼다.

극한의 혹사에 지친 마나하트가 경련했다. 마나의 흐름이 뒤엉켰다. 엉망진창으로. 피를 토하듯이. 쥐어짜이듯이.

그리고 갈기갈기 찢겼다.

“그것이 첫 분열이었습니다. 두 개의 마나하트가…… 정확히 두 배인 넷으로 늘어나더군요.”

“두 배? 설마.”

“네. 분열할 때마다.”

두 번째 분열에서는 넷에서 여덟로. 다음엔 여덟에서 열여섯 갈래로. 그다음엔 열여섯에서 서른두 갈래로 찢겼다.

“그렇게 총 일곱 번의 분열을 이루어냈습니다. 덕분에 둘이었던 마나하트가 256개로 갈라지게 된 것이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전하께서 잘 믿기지 않으시듯이, 저도 처음에는 잘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명확히 알게 된 사실이 있었지요. 분열의 비결은 혹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이.”

“예, 전하.”

“보통 사람들은 너처럼 혹사를 한다고 그냥 강해지거나 발전하진 않거든?”

“압니다.”

“어휴 그렇게 대답하니까 더 재수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무슨.”

라키엘은 그만 너털웃음을 그려내고 말았다. 다 듣고 보니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졌다.

‘마나하트를 늘리는 게 아니라 분열시켜야 한다는 깨달음 조금에, 혹사를 양념으로 얹으니까 그냥 막 세포 분열처럼 멀티 마나하트가 쭉쭉 늘어났다고? 이건 무슨.’

이런 내용을 소설로 썼다면 아마 욕을 오지게 먹었을 거다.

주인공 보정 사기라고.

그런데 어쩌겠나.

지금 눈앞의 이 결과는 소설이 아니라 현실인데.

‘그래도…… 다행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256개의 멀티 마나하트라.

솔직히 다섯 개 정도만 갖추어져도 1형 당뇨병을 거의 극복하게 될 거라고 봤는데. 그런데 무려 256개다. 이건 그냥 극복 정도가 아니라, 당뇨병을 발판 삼아서 더욱 초월적인 경지에 올라 버린 셈이었다.

대략 예를 들자면, 3미터 깊이 풀장에 빠뜨렸더니, 어푸어푸 하다가 익사의 위기감을 느끼고는, 풀장 바닥을 박차고 점프했는데, 에베레스트 꼭대기를 뛰어넘어 인공위성이랑 하이파이브를 하고 착지해 버린 상황이랄까.

“뭐 어쨌건. 그럼 이름은 정했고?”

“……예?”

“이름 말이야. 네가 창안한 새로운 멀티 마나하트의 심법 이름.”

“심법의 이름, 말입니까?”

“어.”

얼떨떨한 듯이 되물어 오는 데미안 녀석.

그 모습에 피식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럼 너, 앞으로도 그거 혈당 심법! 이러면서 사용하고 다닐 거야?”

“…….”

“네이밍이 좀 그렇잖아?”

“아뇨. 딱히 이름을 붙이겠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했습니다.”

“어째서?”

“유치하니까요.”

“…….”

녀석의 일침이 생각보다 날카롭다. 덕분에 내심 마음에 품고 있던, 새 심법에 붙여줄 생각이었던 이름을 입속으로 되삼킬 수밖에 없었다.

‘카이엔 심법이라고 불러줄까 싶었더니. 그래 됐다.’

네가 별로라면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계의 진짜 주인공은 너니까.

“그럼 가자.”

라키엘은 엉망이 된 연무장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데미안이 즉시 옆으로 착 붙어 왔다.

“모시겠습니다.”

“쯧. 어디로 가는 건지는 알고?”

“알 필요가 있습니까?”

“없냐?”

“예. 전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그저 따를 뿐이니까요.”

“만약에 내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냐.”

“예.”

어느새 이쪽과 비슷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녀석.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씩 실감이 들었다.

이제는, 별궁으로 돌아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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