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뜻밖의 보상 (1)
“벌써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요?”
“그렇게 됐습니다.”
“허어. 못해도 두어 달은 더 계실 줄 알았더니.”
“3왕자의 경과가 생각보다 좋아서 말이지요.”
“쯧쯧. 이럴 줄 알았으면 그놈에게 황태자의 말을 조금 덜 새겨들으라고 충고나 해놓을 것을.”
“제가 그러라고 권유해도 그러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내가 그래 보였소?”
“예, 충분히.”
“허허. 이거 참. 이래서 내가 그대를 사위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니까.”
“……예?”
라키엘은 움찔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의미심장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하르미온의 국왕을 향해 되물었다.
“저기, 방금 무어라 말씀하신……?”
“사위라고 하였소.”
“흐음.”
“이런 내가 이상하오?”
“예.”
“어째서 말이오?”
“그게, 제가 알기로는 말입니다. 하르미온에는 왕자 셋만 있다고 들었습니다?”
“으음, 맞소.”
“그런데 어떻게 제가 하르미온 왕가와 혼약으로 맺어질 수 있다는 뜻이신지…….”
“불길한 상상이라도 떠올린 게요?”
“…….”
하르미온의 국왕, 하르난트 루들로 하르미온의 너털웃음이 어딘가 더욱 깊어(?)졌다.
“염려 마시오. 우리 하르미온이 섬기는 주신께서도 사람의 성별을 바꾸는 기적은 일으키지 않으시니까 말이오.”
“그, 그렇습니까.”
이거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쪽이 마젠타노로의 귀국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것으로 보이는 국왕. 그가 자꾸만 노골적으로 이쪽에게 보이는 미련에 찜찜함을 느끼며 라키엘이 어색하게 웃었다.
국왕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태연하게.
“딸이 없으면 딸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네?”
“양녀를 들여서라도 말이오.”
“…….”
“어떻소? 우리 왕가의 방계 중에도 미모와 재지가 출중한 아이들이 여럿 있소만.”
“…….”
“그대가 동의하기만 한다면 당장 그중의 하나를 양녀로 들여서 그대와 대면시킨 다음에 마젠타노의 황제께 기쁜 소식을 담은 서신을 보내어…….”
“그만. 거기까지.”
“…….”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허어. 아직 말을 다 하지도 않은 터인데.”
“안 들어도 뒤에 이어질 내용이 뻔히 들리고 보이고 느껴지고 감지되고 예상도 되고 살포시 험한 꿈에도 나올 거 같아서 말입니다.”
“쯧. 이래서 그대가 마음에 들고도 거슬린다니까. 똑똑해서 좋은데 눈치도 너무 빨라서 말이오.”
“칭찬 감사합니다.”
“생색도 안 내는 거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쪽의 너스레에 작은 탄식을 내뱉는 국왕.
다행히 국왕이 시도한 장인 어택(?)을 그럭저럭 돈좌시킨 듯했다. 그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라키엘이 말했다.
“요구에 응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3왕자가 이곳에 있으니 제 마음이 놓이기는 합니다.”
“3왕자 녀석 덕분에? 어째서 말이오?”
“장차 그가 하르미온의 국왕이 된다면, 우리 마젠타노와 긴밀하고도 건설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듯하여서 말입니다.”
“……허허, 그대는 우리 하르미온의 왕위 계승에 관여하려는 것이오?”
“마음속 사위의 작은 바람 정도로는 안 될까요?”
“그만. 거기까지.”
“…….”
“아깐 내 요청을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냉정하게 잘라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어, 아직 말씀을 다 드리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안 들어도 뒤에 이어질 은근하고 간교한 혀놀림이 뻔히 들리고 보이고 느껴지고 감지되고 예상도 되고 살며시 험한 꿈에도 나올 것 같아서 말이오.”
“어이쿠, 죄송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오.”
“설마, 제가 혼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여서 마음이 상하신 겁니까?”
“그 당연한 걸 말이라고 하오?”
“다시금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이제라도 좀 들어주시든가.”
“…….”
이 아저씨, 보기보다 엄청 끈질기구나.
라키엘은 화제 전환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꼈다.
“어쨌건, 내일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허어? 그렇게나 빠르게 말이오?”
“예.”
“그 또한 예상보다 너무 이른 듯한데.”
“오래 끌어서 서로에게 좋을 일이 없을 테니까요.”
라키엘은 짐짓 웃었다.
“하여 제가 감히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 싶습니다.”
“안 되오.”
“안 됩니까?”
“사위가 아니니까.”
“…….”
“……크흠흠! 그래, 어디 말해보시오. 무슨 부탁이오?”
“내일 저희 일행이 출발할 때 배웅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흐음? 원래 그러려고 했소만?”
“……네?”
“그래야 그대가 처음 제시했던 거래가 제대로 이행될 것이 아니오. 그러니까 그대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고.”
“그걸, 이미 감안하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국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권좌에서 평생을 보낸 정치 9단 다운 면모를 슬쩍 보여주었다.
“일찍이 그대가 처음부터 제안했지 않았소. 우리 셋째의 질환을 그대가 치료해주면, 우리는 그대에게 테니온을 양도하는 것으로 말이오.”
“그랬습니다.”
“한데 거래의 결과에 따라 테니온을 얻어가는 그대를 내가 공식적으로 배웅하면, 우리 하르미온의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소?”
“당연히 불만의 목소리를 내겠지요.”
“그렇지. 바로 그거요. 왕가의 공식적인 거래에 따라 테니온을 양도하는 것과, 그런 테니온을 얻어가는 자를 국왕이 직접 성대하게 배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 않겠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다.
국가의 영토, 무려 도시 하나를 인접국에 떼어주는 거래를 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르미온 정계의 귀족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심을 드러낼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야. 하르미온의 귀족들은 자신의 토지나 영지가 왕가의 거래에 도매급으로 팔려나갈 수도 있다는 경각심, 위기감을 느끼고 있겠지.’
한데 국왕마저 이쪽을 공식적으로 배웅해 버리면?
앞으로 비슷한 내용의 거래가 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국왕이 직접, 귀족들에게 선포하는 정치적 뉘앙스가 되어 버린다. 향후 귀족들의 국왕에 대한 지지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저도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여 배웅을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허허. 거기까지 생각했던 거요?”
“네. 서로에게 이득이 없는 민폐가 되니까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부탁은, 배웅도 하지 말아 주시고, 오늘 이후로는 제 근처에 오지도 말아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의 이번 체류기간 동안에는 말입니다.”
“이런. 매정하구려.”
“서로를 위한 길이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그대가 더 탐이 나서 큰일인데 말이오.”
“…….”
“차라리 납치라도 확.”
“…….”
“농담이오, 농담. 허허허.”
“…….”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아서 문제인 겁니다만. 방금 은근슬쩍 눈동자에 희멀건 광기가 엇비쳐 보이는 거 같기도 했고.
“어, 그럼 저는 살짝 졸려서 이만…….”
궁핍한 변명일지언정 살포시 구실을 붙이며 간신히 국왕을 쫓아냈(?)다. 그러고서야 참았던 숨이 푸훅 흘러나왔다.
‘이거, 빨리 도망 안 치면 강제로 눌러 앉혀지겠는데?’
스멀스멀 피어나는 위기감!
라키엘은 귀국 준비 짐싸기를 더욱 서둘렀다.
♣
“……그래서, 부왕께 배웅을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대신 배웅을 나온 거고?”
“네.”
다음 날이 밝았다.
아니, 아직은 밝기 직전이라고 해야 할까.
하르미온의 왕도, 하르마스의 가장 큰 성문인 대관문 주위는 아직 한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동쪽의 어스름조차 밝지 않은, 한국으로 치면 새벽 4시쯤의 새벽이기 때문이었다.
“쯧. 일부러 눈에 덜 띄려고 이 시간을 선택해서 출발하는 건데.”
“그러니 제가 남의 눈을 덜 의식하고 여기까지 나와서 형님을 배웅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아서라. 감기 걸리겠다.”
“전 괜찮습니다.”
“이 시간에 길바닥에서 홀라당 벗고 있는 주제에?”
“편하니까요.”
나름 이쪽을 배웅하겠답시고 잠도 안 자고 달려나온 3왕자 녀석이 맑게 웃었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기어이 덧붙였다.
“이렇게 보내드리려니 아쉽기도 하고요.”
“……설마, 너도 날?”
“네에?”
“장인어택에 이은 처남어택…… 아, 아니. 아니다.”
“…….”
“어쨌건, 앞으로도 탕약 꼬박꼬박 마시고. 연고 잘 바르고.”
“네. 이젠 형님 없이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래. 궁금한 거 생기면 서신 보내서 물어보고.”
“궁금한 거 없어도 보내면 안 될까요?”
“뭐 그러든가.”
“그리고 저기…….”
“쯧. 그만. 거기까지.”
“네?”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 오는 3왕자.
라키엘은 녀석을 향해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부터 신파 찍으려고 그랬지?”
“……네에?”
“그런 거 사양이다. 하지 마라.”
“어떤 걸 말씀하시는…….”
“뻔하잖아. 형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 전의 저는 희망을 잃은 채로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이제는 달라진 덕분에 미주알고주알, 앞으로도 이 은혜를 가슴에 담고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선사하며 살아가고 블라블라.”
“…….”
“맞지?”
“…….”
끄덕끄덕.
나름 열심히 준비했던 멘트를 순식간에 다 털린(?) 3왕자는 갓 뽑아낸 에스프레소 같은 자괴감을 살포시 느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그런 말 굳이 안 해도 서로 알잖아.”
“그, 그런 겁니까?”
“당연하지. 오늘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도 아닐 건데.”
“아,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면…….”
“사망 플래그?”
“플래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강 좀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막 그러지 않나요?”
“안 생겨. 그러니까 걱정은 접어두고. 대신 너는 내 당부 하나만 딱 지켜주면 좋겠는데.”
“당부……라니요?”
3왕자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3왕자의 수행원들에게 안 들릴 목소리로 속닥속닥 말해주었다.
“넌 오늘부터 당장 저기 올라가라.”
“네?”
“저기. 왕도 하르마스 어디에 있든 잘 보이는 예배당 첨탑 꼭대기 말이다.”
“저기는…… 왜요?”
“잘 보이는 곳이니까. 네 나체가.”
“네에?”
3왕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형님은 대체 무슨 당부를 하려는 걸까.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매일 벌거벗고 저기에 올라가. 그리고 태양 만세 포즈로 움직이지 말고 온종일 햇볕을 쬐는 거야.”
“무좀 치료에…… 좋은 겁니까?”
“네 정치적 입지에 좋은 거야.”
“어떻게요?”
“아직 네가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남은 무좀들이 네 전신을 뒤덮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처음엔 네 모습을 보고 기겁하겠지. 갑자기 나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도 민망한데, 그 모습이 일반적이지도 않으니까. 외면하고 싶고, 이상해 보이고, 배척하는 마음까지 들 거야.”
“그런데 대체 왜…….”
“하지만 너는 일광욕으로 상큼상큼 뽀송뽀송해지겠지. 한편으로는 약도 열심히 먹고, 연고도 열심히 바르고. 그런데 너를 볼 수많은 이들은 그 사실은 모르잖아? 그러니 아마도 차츰, 네 무좀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이런 생각을 할 거란 말이다. 신의 은총이 너에게 내린 거라고.”
“아……!”
“이젠 좀 이해가 되지?”
끄덕끄덕!
3왕자의 고갯짓에 힘이 들어갔다.
라키엘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그거 한 방이면 너는 그냥 국왕 후보 1순위가 되는 거야. 잘 해봐.”
툭툭.
3왕자 녀석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걸음을 돌렸다.
굳이 간지러운 인사는 더 나누지 않았다.
그랬다간 녀석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였다. 한편으로는 그간 녀석과 들었던 잔정 때문에 이쪽도 코가 시큰거릴 것 같…….
‘지는 않고, 어휴 숭해라.’
솔직히 좋은 녀석이기는 한데, 너무 노골적인 나체족을 바로 앞에서 계속 보고 있는 건 살짝 괴롭다.
라키엘은 자신의 안구 건강(?)을 위해 일행과 함께 재빠르게 출발했다. 뒤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3왕자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도 모를 미소가 입가에 살며시 새겨진 것은. 반가운 보상 메시지가 눈앞에 찬찬히 떠오른 것은.
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