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58화 (457/468)

458화. 인생뼈컷 페스티벌 (3)

인생뼈컷 페스티벌은 명절에 힘입어 성황리에 끝났다.

처음엔 주저함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라키엔데의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갖은 상술과 꼼수에 절어 있는 라키엘의 유혹(?)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결국엔 굴복했다. 너도나도 바겐세일 오픈런을 뛰듯이 줄을 섰다.

그리고 기꺼이 2마젠의 기부금을 지불했다. 형편이 부족하면? 빌려서라도 냈다. 그마저도 안 되는 이들은? 자원봉사 지원자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써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페스티벌이 이어진 기간 내내 뚜식이는 쉼 없이 엑스레이를 찍어대야 했다. 수많은 이들의 뼈다귀 사진이 회벽돌에 새겨졌다. 포즈도 다양했다. 전통의 브이, 얼짱각도, 커플 하트샷, 각종 컨셉과 엽기가 난무하는 다양한 뼈다귀 사진이 양산되었다.

덕분에…….

“기부금만으로도 도시의 복구공사비 절반 이상이 충당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덕분에 브레다 시장은 연신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는 상태이고 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뚜식 경도 이번 일로 자신감을 되찾은 듯합니다. 더는 우울한 기색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 그럴 거야.”

“페스티벌에 참여한 사람들도 대단히 만족한 눈치입니다. 자신의 뼈다귀 모습이 새겨진 벽돌이 광장의 어느 부분에 쓰일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더군요.”

“그래. 그럴 만하지.”

“그런데 전하께서는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으음?”

한창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향해 집중하던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금 보고와 질문을 연이어 던진 데미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나?”

“예, 전하. 뭔가 중요한 서류 작업이신 듯한데, 그걸 어째서 혼자서 직접 하고 계신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이거?”

라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쌓인 각종 서류와 자료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홍보자료 만드는 중이야.”

“홍보…… 자료라심은?”

“엑스레이 의료 서비스.”

황태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거든. 사람들은 낯선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자신의 몸과 관련된,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이 생기면 굉장히 불안해한다, 라고 말이야.”

“그럼 혹시, 황도에 돌아가시면 별궁 한의원에서 써먹으실…….”

“어, 정답.”

라키엘이 자료집에 쓰일 커다란 종이 한 장을 팔랑 들어 보였다. 이름 모를 어린아이가 괴발개발 그린 듯한 그림이었다. 한데 그림의 내용이 특이했다. 뚜식이가 재채기를 하면 주위의 사람들 신체 일부의 뼈다귀가 밖으로 비쳐 보이고, 모두가 그런 자신의 모습에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대략 즐거운 인생뼈컷.”

라키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데미안이 물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겁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지.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법이거든. 그래서 이런 형식의 그림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제법 덜어주기도 하는 거고.”

“그래서 이름 모를 어린아이의 그림까지 동원하시다니, 제대로 홍보에 작정을 하신 거로군요.”

“어린아이?”

“예.”

“아닌데?”

“예?”

“내가 그린 건데?”

“…….”

“내 그림이 그렇게 이상해?”

“예.”

“와,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거 보소.”

“어떻게 해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는 명확한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조금만 순화해서 말해주면 안 돼?”

“자고로 훌륭한 군주에게는 따끔한 충언이 필요한 법이라 들었습니다.”

“충언이 아니라 언어폭력 아닌가?”

“아닙니다.”

“어째서?”

“저는 전하를 보호하는 사람이니까요.”

“이야, 그 보호 참 맵다 매워.”

“어쨌거나, 그런 그림과 이곳 사람들의 증언 등등을 조합해서 홍보 자료집을 만드시는 거였군요.”

“그렇지. 말 돌리기 잘하네.”

“저도 돕겠습니다.”

“어쭈. 만회 시도까지.”

“저는 전하를 돕는 사람이니까요.”

“퍽이나.”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데미안의 입가에도 비슷한 온도의 미소가 희미하게 그려졌다.

“그럼, 이제는 황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겁니까?”

“그래야지. 너무 오래 떠나 있었잖아.”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너 때문이지.”

“……네?”

곁에서 서류를 정리하려던 데미안이 움찔했다. 라키엘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장난스러운 색으로 변했다.

“애초에 너한테 멀티 마나하트를 장착해 주려고 황도를 떠났고, 아스라한 변경백령으로 갔고, 거기서 뚜식이가 일으킨 사건에 개입하게 됐고, 이 도시에서 투닥거렸고, 이 도시를 얻었고, 하르미온의 왕도까지 다녀온 거 아니냐?”

“그건…….”

“그러니까 그 모든 일의 원인이 바로 너인 거지. 이야. 이런 호위 또 없습니다. 주군을 변경까지 보내서 막 굴려 아주. 응?”

“…….”

“그래서, 좋냐?”

“예. 좋습니다.”

“오. 반항이야?”

“저는 반항하면 안 됩니까?”

“안 되지. 호위인데.”

“갑질을 노골적으로 하시는군요.”

“억울하면 네가 황태자 하든가.”

“치사하십니다.”

“그래도 고맙지?”

“예?”

“덕분에 멀티 마나하트, 무진장 늘렸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렇지만?”

“모르겠습니다. 뭔가 지금 부아가 치밀기는 하는데, 그걸 딱히 명쾌하게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응, 너 농락당한 거야.”

“…….”

딱밤이라도 한 대 칠까.

데미안은 아주 짧은 순간 진지한 고민을 떠올렸다. 치고 싶다. 한 대라도 딱콩 때려보고 싶다. 그러면 참 후련할 텐데. 오늘 밤엔 잠도 잘 올 것 같은데.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할 거리도 될 듯한데.

“너 지금, 나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아닙니다.”

“응 맞네.”

“해 볼래?”

“……!”

“이야. 눈빛 흔들렸다.”

“……아닙니다.”

“말이랑 눈빛이 좀 다른데?”

“정말로 아닙니다.”

“뭐, 그래. 그렇게 믿어줄게.”

“…….”

“뭐하냐. 왜 자료를 들고 우두커니 있어. 정리를 하려면 좀 팍팍 제대로 하든가. 이렇게. 이렇게. 응?”

“……전하.”

“으음?”

“아닙니다…….”

“응. 방금 속으로 욕했구나. 알았어. 이해할게. 난 관대하고 자비로운 주군이니까.”

“…….”

“그런데 누가 자료 정리하면서 그렇게 잡담이나 계속 나누래? 정리하자, 정리.”

“…….”

“아이고 신난다, 랄루랄.”

“…….”

아주 가끔이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지금처럼 한없이 얄미운 듯하면서도 사실은 더없이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당신이 왜 굳이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어서.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제가 별스러운 말로 고맙다고 말씀드릴 것이 부담스러워서. 하여 일부러 이러심을 저만은 조금이나마 느낄 수가 있어서. 더욱 당신께 고맙습니다, 전하.

물론 데미안은 그런 마음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황태자가 원하는 대로 쓴웃음만 잔뜩 머금고서 한마디를 툭 내뱉었을 뿐이었다.

“참 짓궂으십니다.”

“어허. 쓰읍. 잡담 금지.”

“…….”

에라이.

데미안은 더욱 쓰게 배어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주군의 서류 정리를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라키엔데에서의 평온한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황도를 향한 출발 준비는 간소했다.

그저 마차 한 대.

우루스와 뚜식이, 수행원들.

아스라한 변경백과 정예 가솔들.

호위 군단에서 차출한 50기가량의 기병만을 대동한, 나름 검소한(?) 일행이 꾸려졌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는 과정만큼은 간소하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라키엔데의 시민 대부분이 광장과 대로로 쏟아져나와서 이쪽을 배웅하려 한 까닭이었다.

즉, 대한민국이 월드컵 결승전에라도 진출한 듯한 뜨거운 열기가 온 도시를 도가니처럼 보글보글 채워 버렸다. 물론 그 열광적인 열기는 모조리 이쪽을 향해 쏟아졌다.

“황태자 전하아아!”

“꼭 돌아오십시오!”

“다시 전하를 뵙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이 저의 다음 생일이 될 것이옵니다아!”

“저는 전하께서 돌아오실 날까지 숨을 참고 있겠습니다! 흐읍!”

마차 밖에서 가히 폭동이라도 일어난 듯한 함성과 외침이 연거푸 들려왔다. 마차가 통째로 울리고 귀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아니, 너무나 큰 함성 때문에 곁에 있는 데미안의 말소리가 죄다 파묻힐 지경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다들…… 고맙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많은 이들에게 열렬한 배웅을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뜨거운 성원을 받아 본 적이 있었나.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벅차는 감격이라는 착각.

동시에 한편으로 슬며시 떠오르는 걱정까지.

‘아침에…… 시장 브레다가 정식으로 충성맹세를 올렸지.’

출발에 앞서 마지막 아침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식탁이 치워지기도 전에 시장 브레다가 돌연 한쪽 무릎을 꿇었더랬다. 그리고 정식 기사의 예와 함께 충성맹세를 올렸던가.

‘앞으로 영원히, 저 브레다 테니바흐와 후손이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한, 저와 후손의 섬김을 받을 대상이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와 그의 후손일 것임을, 심장과 명예, 피와 긍지, 영혼과 헌신을 바쳐 굳게 맹세하나이다.’

……라고 했다.

자신의 가문이 영원히 이쪽과 후손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겠다는, 기사들의 서약 중에서도 가장 우직한 맹세인 ‘바이에른의 맹약’을 바친 것이었다.

‘그거, 소설 마검황에서도 딱 한 번만 나왔던 건데.’

거의 엔딩 무렵이었던가.

마침내 황제로 등극하던 데미안이 가신들에게 받은 맹세였다.

한데 그걸 이쪽이, 시장 브레다에게서 받아 버렸다.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게 한 번이 아니라서 더더욱.

‘전하! 저 또한 동일한 맹약을 전하께 바치나이다!’

시장 브레다가 ‘바이에른의 맹약’을 바쳤다는 소식을 들은 탓이었을까. 분명 자신의 숙소에서 출발 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했을 아스라한 변경백이 바람처럼 호다닥 달려왔다. 달려온 기세 그대로 무릎을 촵 꿇었다. 이쪽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똑같은 ‘바이에른의 맹약’부터 냅다 이쪽의 고막에 꽂아 넣었다.

‘……그놈의 라이벌 의식이란.’

브레다 시장의 가문과 대대로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던 아스라한 변경백이었다. 그런데 이쪽을 향한 충성맹세에서 뒤처졌다 싶으니 초조해졌던 거겠지. 그래서 더욱 고맙고,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슬며시 들기도 했다.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이 국경의 거물들인 시장 브레다와 아스라한 변경백 같은 이들에게도 귀하고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건데…….’

그럼 나,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다가 진짜로 덜컥 황제가 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빼도 박도 못하고 황좌에 앉게 될 것 같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쑴펑쑴펑 샘솟는다. 단순한 예감? 아니다, 이건. 엄연한 예측이다. 그것도 제법 유력한 예측. 학원 간다고 거짓말하고 피씨방 갔다가 엄마한테 걸렸을 때 혼이 날 거라는 사실만큼이나 선명하고도 또렷한 예측 말이다.

“……큰일 났네.”

“예?”

마차를 둘러싼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도 이쪽의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마차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미안이 이쪽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다.

“아냐, 아무것도.”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넌지시 시선을 돌렸다.

“쟈빌론 씨, 어디 불편하진 않아?”

“……읍읍!”

마찬가지로 마차 맞은편 자리. 데미안의 옆자리. 그곳에서 마나하트가 봉쇄당한 채 새우튀김처럼 꽁꽁 묶이고 입에 3단 재갈까지 물린 쟈빌론이 시퍼런 안광을 번득이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그래. 숨은 쉬어지니까 됐네.”

“으읍! 읍읍!”

“데미안? 조용히 시켜.”

“예, 전하.”

딱!

데미안이 멀티 마나하트의 힘을 실은 딱밤으로 쟈빌론의 이마를 후려쳤다. 그걸로 끝. 감히 자신을 이렇게 다룰 수는 없노라고 분노를 담아 항변하던 쟈빌론은 딥슬립의 안락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생각했다.

저 인간을 어떻게 처리할까.

물론 정해둔 답은 있었다.

“국경 여행 기념품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시겠지, 황제 폐하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황도.

나만의 보금자리인 별궁.

그곳을 향한 여정은 길고도 짧았다. 매일 마차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터덜터덜 실려 가고. 중간에 아쉬워하는 아스라한 변경백이 일행을 떠나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고. 다시 실려 가고. 마차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그렇게 거의 20일이 지나 궁둥짝에 땀띠가 밸 무렵, 라키엘과 일행은 마침내 황도 마젠타로 입성하였다.

한데 그곳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황제는……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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