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삐딱한 자세의 원인 (2)
“폐하께서는 혹여, 오른쪽 궁둥이에 슈퍼 울트라 왕뾰루지…… 아니, 농포성 종기가 생겨서 괴로운 것이 아니시옵니까?”
“……뭣?”
움찔!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정곡을 찔려 버린 까닭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 까닭에. 설마하니 장남이 자신의 증상을 맞춰 버릴 줄은 몰랐던 까닭에.
‘이걸…… 어찌?’
황제의 얼굴이 살짝 벌게졌다. 그는 문득 떠올렸다. 작년, 하반기 무렵부터 남몰래 자신을 괴롭혀 왔던 이 끔찍하고도 성가시기가 짝이 없는 질환을.
처음에는 사소한 뾰루지, 그 자체였다.
오른쪽 궁둥짝.
거기서도 살짝 안쪽(?).
그래서 남들에게 함부로 보이기가 참으로 민망한 부위.
그곳에 웬일로 제법 큰 뾰루지가 났다. 어쩐 일인가 싶었다. 참 재수도 없구나 싶기도 했다. 하여 그냥 놔두었다. 주치의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그저 사소한 뾰루지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것이 웃기기도 하거니와, 부위가 부위인지라 남사스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뾰루지가 좀 익었을 때는 짤까도 싶었지만…….’
참았다.
아니, 살짝 시도는 해보았다.
하지만 실패했다.
뾰루지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었다. 그래서 아무리 눌러도 짜지지가 않았다. 괜히 아프기만 했다. 그래서 다시 놔두었다. 얼굴에 나곤 하는 뾰루지처럼 그냥 놔두면 알아서 익다가 가라앉으리라 보았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익었던 뾰루지가 살짝 거슬렸던 것도 이틀 정도. 잠깐만 참으니까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면 그렇구나 싶었다. 그리고 잊었다. 궁둥짝 안쪽에 돋아났던 뾰루지의 존재 자체를. 그렇게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안심에 불과했다.
자신의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앞서의 뾰루지가 가라앉고 불과 한 달쯤 지났을까. 같은 자리에 또다시 뾰루지가 돋아났다. 수확철 농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사과처럼 발갛게도 익었다.
그런데 묘한 사실이 있었다.
같은 자리에 돋아난 왕뾰루지의 크기가…… 전보다 아주 살짝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단순한 착각이라 여기었건만…….’
그 생각 또한 보기 좋게 틀렸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뾰루지가 앞서보다 더 빵빵하게 부풀었다. 그만큼 더 성가시고, 아파졌다. 하지만 여전히 짜낼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뾰루지가 피부보다 훨씬 깊숙한 곳에 자리한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주치의에게 알린 것도 아니었다. 자칫 항문까지 살짝 보일 수 있는 자리이기에, 차마 알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여 참았다. 다행히 뾰루지는 3~4일쯤 전성기를 과시하다가 스스로 가라앉았다.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제는 이런 고약한 우연에 또 걸리는 일은 없겠지, 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리고 3주 뒤쯤에 또 같은 자리에 살짝 더 커져서 돋아난 뾰루지를 보며 강제로 깨달아야 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고.
필연이라고.
“…….”
그때부터였다.
황제는 3주에서 1개월의 텀을 두고서 똑같은 자리에, 조금씩 커지며 돋아나는 왕뾰루지 때문에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뾰루지는 부활(?)할 때마다 전성기의 기간도 길어졌다. 그만큼 더 불편하고, 아파졌다.
덕분에 반년쯤 지나 일곱 번째 뾰루지가 돋아난 지금은?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아팠다. 뾰루지가 난 부위에 의자가 닿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속옷이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던 것이었노라, 실은 말이로다.”
“그럼, 지금도 그렇게 아프신 것이고 말이옵니까?”
“그렇도다.”
“…….”
좌우를 모두 물린 후에야 자신의 사연(?)을 밝히는 황제의 침울한 표정! 비로소 라키엘은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우. 그거, 단순한 뾰루지가 아닌 듯하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아까 네가 무어라 하였지? 슈퍼 울트라…….”
“왕뾰루지는 아니고, 농포성 종기이옵니다.”
“농포성…… 종기?”
“그렇사옵니다.”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한쪽 궁둥짝을 스툴에 걸치지도 못하고서 삐딱하게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옵자면, 혐기성 세균의 감염, 피지선의 과도한 발달로 인하여 살갗 안쪽에 염증, 고름 주머니가 생겨난 것이옵니다.”
“고름……주머니?”
“예, 폐하. 단순한 뾰루지와는 발생 원인부터가 다르옵니다. 게다가 한번 생겨난 고름 주머니는 절대로,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종기가 성을 내었던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농포성 종기.
정확히 말하자면 피지낭종(sebaceous cyst).
이건 단순한 뾰루지가 아니다. 사실은 훨씬 심각한 질환이다. 무엇보다도 이 질환의 가장 고약한 점은, 단순히 약을 복용하는 정도로는 거의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은 그냥 뾰루지인 줄 알고 집에서 짜려고들 하지. 하지만 그거, 어지간해선 불가능해. 피지주머니 자체가 진피 아래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엄청 깊거든. 게다가 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기껏 집에서 고생고생하며 짜낸다 한들, 거의 100% 확률로 재발한다. 아무리 짜도 고름이 또 생긴다. 고름이 생기는 원인인 피지주머니 자체가 속에 남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실은 그렇게 짜면 짤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어설프게 짜내는 과정에서 피지주머니와 근처 혈관이 손상을 입으면서 2차 감염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기만 하면?
그것도 답이 없기는 똑같다.
고름주머니가 커지고, 더 커지다가 마침내 아래의 근육층에까지 파고든다. 근육의 광범위한 손상과 함께 혈액 속으로 고름과 박테리아가 퍼져 버린다. 고열에 시달리고, 정말로 심한 경우에는 패혈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지.’
바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도 심각한 피지낭종을 겪는 환자들은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버틴 끝에 너무나 아파서, 더는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동네 피부과 말고 외과로. 만약 황제 이 양반처럼 엉덩이, 특히 항문 근처인 경우에는 치질로 인한 염증 고름이 원인일 수도 있으니까 무조건 항문외과로 가서 초음파 검사도 받아야 하고.’
그것이 진리이다.
또한, 그런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이 피지낭종 때문에 제법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다. 힘없고 돈 없는 백성들만? 아니. 왕도 죽었다.
‘한국사 공부하다 보면 가끔 나오는 거 있지. 후백제의 견훤이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이 터져서 죽었다거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있잖아. 문종, 성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죽었고, 세조와 광해군을 비롯한 12명의 왕이 종기로 고생을 했다는 기록이 무수히 있지.’
그 시대 최상의 의료 혜택을 받는 왕들마저도 답이 없던 질환. 그만큼 과거에는 흔하면서도 좀처럼 답이 없는 무서운 질환이 농포성 종기, 피지낭종이었다.
‘고생 많이 하셨겠네.’
라키엘은 황제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그러나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이고. 지금은 따끔한 소리를 좀 해줘야겠다.
“폐하. 감히 제가 한말씀 올리어도 되겠사옵니까?”
“으음? 무엇을 말이더냐?”
“어찌하여 이토록 무책임하신 것이시옵니까?”
“……뭐?”
황제는 흠칫 놀랐다.
방금, 자신의 아들이 무어라 말한 걸까. 귀로는 들어놓고도 선뜻 믿기지가 않았다. 솔직히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어찌 이리도 무책임하신 것인지를 여쭈었사옵니다.”
“그게 무슨…….”
“폐하께서는 본 황실을 비롯하여 수백, 수천만 사람들의 운명과 안녕을 틀어쥐고 계신 분이시옵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리도 중한 질환을 앓으면서도 그것을 주치의에게 알리지 않으신 것이시옵니까?”
“뭐? 그것은…….”
“부끄러움 때문이시었사옵니까?”
“…….”
어, 맞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선뜻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덕분에 잠깐 말문이 막힌 사이에도 자신의 아들, 황태자의 서슬퍼런 직언이 가슴에 팍팍 꽂혀 왔다.
“실로 실망스럽사옵니다. 제가 지금껏 존경해 마지않았던 황제 폐하께서는 황실과 제국의 이익과 안녕에 관련된 통치를 그 어떤 일보다도 중히 여긴 분이시었사옵니다. 한데 이번의 이 일은 무엇이옵니까? 단지 부끄럽다는 개인적인 감정과 수치심 하나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보호받아야 할 폐하의 건강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옵니까.”
“…….”
“그 어떠한 개인적 수치심과 모멸감도, 설령 그 감정이 지배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황실과 제국의 이익과 안녕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저는 배웠사옵니다. 다른 이도 아닌 폐하께 직접, 폐하의 말씀과 솔선수범을 듣고 보면서 말이옵니다.”
“…….”
“한데 폐하께서는 정작 당신의 그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여 이토록 중한 질환을 반년이나 가까이 되는 기간동안 방치하고, 키웠으며, 그만큼 황실과 제국의 이익과 안녕을 스스로 위협하게 되셨사옵니다.”
“…….”
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궁둥짝의 왕뾰루지는 좀…….
“설마 아직도, 폐하를 괴롭히고 있는 그 질환을 한낱 사소한 뾰루지라 여기고 계신 것이시옵니까?”
“아니, 그것은…….”
“실로 실망이옵니다, 폐하.”
“…….”
뭐지, 이 갈굼 역전의 상황은?
황제는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언제나 아들을 갈구고 압박하며 시험하는 낙으로 살아왔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오랜만에 아들과 재회한 자리에서, 뜻하지 않은 빠따질(?)을 당하고 보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샘솟았다.
그것은 바로……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흡족함이었다.
“허, 허허? 허허허! 허허허허헛!”
행복한 큰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 것이시옵니까?”
저렇게 대놓고 불만스럽게 대드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했다. 감히 자신 앞에서 할 말을 다 하는 저 모습이 참으로 든든했다. 그걸 보며 비로소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너도 준비가 되었구나.
이제는 네가 자격을 갖췄구나.
‘나의 자리를 물려받을 준비가. 권좌에 앉아 황권을 적절하게 다룰 자격이. 마침내. 드디어. 허허헛, 허허허헛!’
라키엘을 보는 황제의 눈에 흐뭇함이 뚝뚝 배어났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건강 관리를 너무나 소홀히 했던 황제에 대한 빡침(?)을 의료인적 시각으로 따끔하게 지적하는 일이 중요할 뿐이었으니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돼. 황제는 중요하니까. 이 양반이 아파서 쓰러지면 그때부턴 당장 황실의 업무가 전부 나한테 몰빵이 될 거니까.’
……떠맡을 생각도 없는 업무 폭탄은 사양이다.
그래서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사옵니다. 폐하의 질환은 시일을 미룰 사안이 아니오니, 지금 당장 폐하의 주치의와 별궁의 가르딘 경을 불러 수술을 시작하여야겠사옵니다.”
“……뭐? 수술?”
“그렇사옵니다.”
‘수술’이라는 말에 황제의 웃음이 뚝, 끊겼다. 제국의 지배자는 수술이라는 말을 듣은 환자 대부분이 입에 담는 공통적인 물음을 던졌다.
“어떤 수술을 해야 한다는……말이더냐?”
살포시 불안했다.
몸에 칼을 댄다니.
그렇다면 설마 궁둥짝을?
그때였다.
라키엘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궁둥짝을 아주 그냥 부욱 째서 고름 다 뽑고, 씻어내고, 안쪽의 고름주머니도 야물딱지게 도려내야겠사옵니다?”
……움찔.
광대한 제국의 지배자.
황제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찔 스택을 2회째 적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