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황위를 계승하는 법 (2)
“아들아, 이제는 네가, 황좌에 앉을 때가 된 것 같구나.”
황제의 나직한 말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어찌 보면 반쯤은 충동적으로.
나머지 반쯤은 이성적으로.
하니 이제는 때가 되었노라는 솔직한 심정으로 꺼낸 폭탄선언이었다.
……쿠퍼쾅!
순간, 라키엘은 자신의 고막이 멸망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착각?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 같은데. 그래서 한없이 쌔한 느낌이 쑴펑쑴펑 드는데.
‘뭐지, 방금.’
꿀꺽.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어쩐지 삐거덕거리는 몸짓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폐하?”
“으음.”
“방금, 제가 무언가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제대로 들은 것 같다만.”
“예?”
“짐이 보기에 너의 귀나 청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하구나. 방금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을 보니 말이다.”
“아뇨. 도무지 이해가 아니 되고 있사옵니다만.”
“지금 너의 그 반응이 이해를 했다는 반증이 아니겠느냐?”
“아니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사옵니다. 저는 청력이 없사옵니다.”
“흐음. 대놓고 짐을 기만하기까지.”
“…….”
“그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짐이 한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한 것이 맞구나. 곁의 멀렉스 경도. 가르딘 경도. 다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아선 말이다.”
“…….”
삐거덕, 라키엘은 현실을 부정하고픈 심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마침 이쪽을 돌아보고 있던 가르딘 경과 눈이 마주쳤다. 가르딘 경의 눈빛은 뭔가 희열에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저건 꼭, 찐친처럼 친하게 지내며 자신을 밀어주던 상사가 임원으로 진급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랄까.
“……즈어어어언하아-!”
“하지 마. 하지 마, 그거!”
“…….”
라키엘은 감격의 바리톤 성량을 뽐내려던 가르딘 경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그리고 황제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가, 황위를 말이옵니까?”
“그러하노라.”
“어째서 말이옵니까?”
“이제는 충분히 준비가 된 듯하니 말이다.”
황제 아스테리온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는 한결 깊어진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근래 들어 짐은 너의 소식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였노라. 네가 호위를 위한답시고 국경으로 훌쩍 떠난 뒤부터 말이다.”
“그건 제 멋대로의 결정이었…….”
“하지만 수많은 공적을 낳은 결정이었지.”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전해 들을 수 있었도다. 너는 황가에 오랜 서운함을 지니고 있던 아스라한 가문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그들을 너만을 위한 충신으로 만들었지. 그뿐이었겠느냐. 긴 세월 그들을 괴롭혔던 고질병을 고쳐주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황실과 제국의 크나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있겠느냐.”
“그건 다만…….”
“멀티 마나하트. 들었도다. 덕분에 너의 호위인 카이엔 경이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소식 또한 말이다. 그 자체로도 황실의 전력이 더없이 강성해진 것일진대, 거기에 너는 국경을 들쑤신 괴수를 너의 수하로 삼기까지 하지 않았더냐.”
“뚜식이, 말이시옵니까?”
“작명 센스는 참으로 조악하기가 그지없어 차라리 가련할 지경이다만.”
“……크흠, 흠!”
“게다가 너는 본드래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잠재적인 경쟁국의 도시를 무혈의 방법으로 거두어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노라.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공적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또……있사옵니까?”
“너는 그 후의 외교적 갈등까지 완벽에 가까운 방법으로 봉합하였도다. 짐은 설마 네가 하르미온의 국왕을 직접 만나러 갈 줄은 상상도 못하였음이니.”
“…….”
“3왕자를 곤경에서 꺼내주며 자연스럽게 도시를 넘겨받은 과정을 들었을 때는 실로 감탄이 나오더구나.”
“그, 그러셨사옵니까.”
“그렇지. 하여 짐은 결정하였도다.”
“황위의…… 계승을 말이옵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구나.”
“하, 하오나!”
“하오나?”
“아직 폐하께서는 너무나 정정하시옵니다!”
이렇게 황위를 덜컥 물려받을 수는 없다. 업무폭탄의 지옥에 빠질 수는 없다. 그랬다간 보너스 수명을 얻는 활동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다.
라키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빼액 외쳤다.
그런데 이쪽의 이런 항변쯤은 얼마든지 받아칠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는 것일까. 황제의 입가에 ‘그럼 그렇지’라는 듯한 미소가 불길하게 씨익 걸렸다.
“짐이 정정하다라. 그래.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한데 너는 이건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이시옵니까?”
“본 황가의 ‘가장 정상적인’ 황위 계승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말이다.”
“아…….”
“프론테라식 계승법. 이제 떠올렸느냐?”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프론테라식 계승법.
이 나라를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돋움시킨 전설적인 최초의 여제, 샤를로트 프론테라 마젠타노로부터 시작된, 마젠타노 황가만의 독특한 황위 계승 방식.
소설 마검황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와서도 기록으로 접한 적이 있었다. 한데 그 계승법에는 여타의 왕가와 구별되는 특징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대의 건강이 쌩쌩한 시점에, 장성한 후계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것…… 맞사옵니까?”
“다행이로구나. 너의 기억력에 문제가 없는 듯하여서.”
“……크흑.”
“이 얼마나 훌륭하고 합리적인 계승법이더냐. 선대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황위를 물려주며 자신이 평생 쌓은 경험과 지식을 제대로 전수할 수 있고, 그만큼 후대는 안정적인 계승이 가능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
만족스럽게 말하는 황제.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딱 그거지.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인수인계를 위한 계승 체계.’
딱 그러했다.
선대가 억, 하고 죽어야 비로소 권력이 계승되는 여타의 왕가와 달리, 마젠타노 황가는 가급적 선대가 멀쩡하게 생존한 상태에서의 황위 계승을 대대로 장려하였다. 실제로도 이 체계에는 장점이 많았다. 안정적인 권력의 이양과 노하우의 전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물론…….
‘선대가 급사하거나 변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한데 황제는 그럴 틈(?)을 주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이쪽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는 좀 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키엘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후우. 하오나 폐하?”
“말해보거라.”
“저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듯하옵니다.”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니라.”
“아니옵니다. 확신이옵니다.”
“근거가 있느냐?”
“그것은…….”
“단지 일하기가 싫다는 핑계를 대는 척하며, 자격이 없음을 은근슬쩍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더냐?”
“…….”
“이제와서 그런들 소용이 없노라. 짐은 이미 너의 능력과 가능성을 모두 눈여겨보고 확신까지 마친 마당이니.”
“…….”
“너, 황제가 되어라.”
“…….”
이건 못 뺀다.
말 그대로 외통수다.
라키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절감했다. 한편으로는 이 사태의 원인을 순식간에 좌르륵 분석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잘해 버렸어. 그게 원인이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모든 사건의 해결에 진심을 담았다. 그 결과,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공적을 웅장하게 세워 버렸다.
그러니 황제가 저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젠장. 중간만 갔어야 했던 건데!’
라키엘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다. 어쩌면 가장 처음에, 2황자에게 넘어가려던 황태자위를 쟁취한 것부터가 잘못된 첫단추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냐. 그래도 그건 아니야.’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소설 내용에 따르면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은 뒤부터 마젠타노 황실의 몰락이 시작되었으니까. 앙부아즈의 급변과 쟈빌론의 왕위 등극, 군국주의화와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서 멸망하고 말았으니까.
당시에는 그런 전개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2황자 녀석과 맞섰고, 황태자위를 지켜냈다. 말 그대로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같은 결정을 내릴 정도로.
이후로도 상황들은 비슷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환자들을 살렸기에 보너스 수명을 얻었다. 수많은 위험을 헤쳐나오며 생존했다. 정말로 하나하나 짚어봐도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상황이다.
‘젠장.’
라키엘은 상황을 냉철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거절을 못 한다고. 이제 와서 황제가 되기 싫다고 한들, 아무런 약빨도 먹히지 않을 거라고. 결국, 자신은 황제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노라고.
“…….”
일, 하기 싫은데.
탱자탱자, 놀고 싶은데.
책임 없는 행복만 평생 누리고 싶었는데.
“……망할.”
“으음,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아, 아니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고 저도 모르게 독백을 하였사옵니다.”
“흐음. 아닌 듯한데.”
“…….”
“짐이 듣기엔 망할, 이라고 투덜거린 듯하였는데.”
“하온데 수술한 부위의 통증은 어떠시옵니까?”
“한때 아픈 손가락이었던 네가 이렇듯 훌륭하게 황제의 재목으로 자라주어 참으로 고맙도다.”
“혹여 거즈 너머로 피가 흐르는 느낌은 들지 않으시옵니까?”
“이것이 흐뭇함이라는 것일까. 짐도 늙었는지 자꾸만 눈물이 흐르려 드는구나.”
“아, 그리고 앞으로 환부를 관리할 방법은…….”
“황위 계승의 방법이야 많겠지만, 이번엔 차근차근 가보도록 하자꾸나.”
“하로면, 제가 앞으로 보내드릴 탕약은…….”
“질환의 개선을 위해 꾸준히 약을 복용하여야 하듯이, 너의 계승도 한 단계씩 꾸준히 가보는 의미에서 일을 하나 맡기도록 하마.”
“…….”
“짐의 말을 듣고 있느냐?”
“……경청하고 있사옵니다.”
말 돌리기, 실패.
이 아저씨가 제대로 작정했구나.
라키엘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황제의 첫 번째 숙제(?)가 하달되었다.
“아들아, 너도 웬록과 프라슨, 시크마르라는 이름을 알고 있겠지?”
“그것은, 하르미온과 함께 이번 본드래곤 사태에서 피해를 입은 국경의 3대 소국이 아니옵니까?”
“그렇지. 정확하다. 또한, 현재 그들의 특사단이 이곳 황도에 체류하고 있노라.”
“설마……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위함이옵니까?”
“그렇지. 한데 그들의 요구가 제법 과한 측면이 있더구나.”
“하면…….”
“눈치채었느냐?”
“제가 그 협상을, 해결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훌륭하구나. 정확하다.”
“…….”
“그럼 가보거라. 짐의 처방전이든 탕약이든 보내면 성실히 따르고 마시도록 하마.”
“예, 하오면…….”
“더 할 말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사실 할 말이야 많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꼬투리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결국, 라키엘은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파아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놓쳐 버린 부자 백수의 꿈에 대하여.
보내 버린 탱자탱자 황족 라이프에 대하여.
앞으로 펼쳐질 먹구름 같은 앞날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고, 번뇌하였다.
‘내가 황제라.’
믿기지가 않는다.
솔직히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거부하지 못하겠다.
한편으로는 부유한 백수의 삶도 놓기 싫다.
그러면 자신은 어떡해야 할까.
문득, 답은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밖으로 나오자마자 옆에 착 달라붙은 호위 데미안. 그리고 황위 계승 소식에 벌써부터 두근두근 입꼬리가 귀에 걸린 듯한 가르딘 경.
그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지시했다.
“2황자궁으로.”
“예? 별궁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벌써 무언가를 눈치챈 듯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는 데미안.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라키엘은 빵긋 웃었다.
“숙제 떠넘기고, 키워야지. 내가 편해지려면.”
그러하다.
라키엘은 방금 떠올렸던 해답을 되뇌었다.
‘부유한 백수가 불가능해졌다면? 일은 딴놈 시키고! 나는 권력 많고 한가한 바지사장을 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