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63화 (462/468)

463화. 황위를 계승하는 법 (3)

바지사장.

사실 제대로 된 용어는 아니다.

차라리 속어나 은어에 가깝다.

그러나 그 명칭이 지닌 뜻만은 명확하다.

‘이름만 사장으로 올려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래서 유명무실하다.

명함만 번드드르할 뿐.

권한도, 심지어 월급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지금은 저 바지사장이라는 개념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로 이름만 올려두는 거야. 실제로 일은 다른 유능한 놈들한데 다 떠맡기는 거지. 대신 권력은? 내가 쥐는 거고!’

일명, 힘 쎈 바지사장.

혹은, 짱 쎈 바지사장.

이제부터 자신의 장래희망(?)을 그걸로 삼아야겠다고 라키엘은 다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2황자궁이 특유의 정갈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후훗, 좋구나.’

2황자궁을 바라보는 라키엘의 눈빛이 흐뭇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서 실질적인 황제 업무를 처리해 줄 호구가 사는 곳이니 쳐다만 봐도 흐뭇해질 수밖에.

‘게다가 2황자 녀석, 엄청 성실하단 말이지. 책임감도 평균을 아득하게 뛰어넘고.’

그저 융통성이 조금 모자란 모범생.

그것이 2황자 녀석의 특징이었다.

그 특징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윤택한 바지사장 라이프에 가장 큰 공헌을 해 줄 것이다. 라키엘은 확신하며 2황자궁으로 들어섰다.

2황자 녀석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형님!”

저 멀리에서 반갑게 달려오는 목소리.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 있는 낭랑한 외침. 오랜만에 만나는 기쁨을 담아 가까워지는 달음박질.

2황자 녀석, 테오도르 팔레르모 마젠타노가 정원을 가르며 달려왔다.

“드디어 돌아오신 겁니까아!”

투두두두두!

녀석, 얼마나 반가우면 저렇게 전력으로 달려오는 걸까.

“보고 싶었습니다아!”

두두두둣두!

달려오는 녀석의 모습을 보자니 문득, 하르미온의 3왕자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쩐지 둘의 느낌이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나, 성실한 타입에게 인기가 좋은 편인 건가.

어쨌건 그동안 녀석도 별 탈 없이 잘 있었던 듯해서 반가웠다.

인사에 화답하며 손을 들어주었다.

다가오면 악수라도 해줘야지 싶었다.

그런데…….

“허억, 헉! 방금 소식을 들었습니다. 오늘 황도로 돌아오셨다면서요?”

“…….”

“제가 먼저 별궁으로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설마 형님께서 먼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

“형님?”

“어?”

“왜 그런 눈으로 저를 쳐다보시는 건지…….”

“어, 응. 너라면 오랜만에 봤는데 키가 2미터에 육박하게 된 동생을 보면 어떤 눈길을 보내게 될까?”

“아, 역시 그래서였군요.”

달려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배시시 웃는 2황자 녀석. 그런데 녀석이…… 좀 커졌다. 아니, 심하게 많이 커졌다!

거의 쟈빌론 정도?

어쩌면 그 이상?

한눈에 봐도 2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녀석이 키가 한창 자랄 나이가 살짝 지났다는 점이었다.

‘뭐지?’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혹시 이 녀석, 뭔가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닐까.

라키엘은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물었다.

“테오도르?”

“네, 형님.”

“너 혹시 누가 괴롭혔니?”

“네? 아뇨.”

“그럼 혹시 고민이라도 생겼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왜 이렇게 키가 커진 거야. 이거 어떻게 된 일인데.”

“아, 그게, 좋은 걸 많이 먹었습니다.”

“좋은 걸?”

“네.”

다시금 배시시 웃는 2황자.

녀석이 말했다.

“실비아 님 덕분에 말이죠.”

“실비아라면…… 엘프족의 집행자?”

“네.”

“그분이 아직도 여기에 있어?”

“네.”

“어째서?”

“그냥 잠시만 더 지내다가 돌아가실 거라고…….”

“그 잠시가 설마 50년쯤 되는 건 아니겠지?”

“…….”

“어쨌건, 무려 엘프족 집행자님이 너한테 뭘 먹였길래 이렇게 세로로 길어지셨어요?”

“에버글로우의 열매 씨앗이야.”

대답은 2황자 녀석 대신 서늘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가 대신 돌려주었다.

이윽고 2황자의 커다란 덩치 너머에서 엘프 여인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집행자 실비아였다.

“그냥 우리 일족이 흔히 가지고 다니면서 먹는 간식이지. 그걸 먹는 내 모습을 보고는 몇 개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줬지. 이런 결과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거, 설마 성장기고 뭐고 다 무시하고서 키를 키우는 씨앗입니까?”

“아니.”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장로님들에게 이야기로 들은 적은 있지만.”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아주 간혹, 희귀하게 이런 인간이 있다고 하더군. 에버글로우 씨앗에 반응해서 성장기가 돌아오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래서야. 그대의 동생은 새로운 성장기를 맞이해 버렸고, 덕분에 20센티 가까이 키가 자라 버렸어.”

“…….”

“그래도 안심해. 새롭게 찾아온 성장기도 거의 끝났으니까. 여기서 더 커질 일은 없겠지.”

“후우. 그렇습니까.”

“그렇지.”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그저 우연이 준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

쩝.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키며 2황자를 올려다보았다. 엘프족 집행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딱히 몸에 나쁜 일은 아니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

“그나저나 어째, 너는 볼 때마다 한 군데씩은 확 커져서 내 앞에 나타나는 것 같다? 저번에는 가로로 커지더니, 이번에는 세로로 쭉 늘어나 버렸네?”

“그, 그런가요?”

“응. 그래서 이젠 두려워.”

“두렵다니, 뭐가요?”

“다음번에 만날 때는 뭐가 또 커져 있을지.”

“…….”

“됐다. 나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일단 들어가자.”

“아, 네. 이쪽으로.”

훌쩍 커져 버린 2황자 녀석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갔다. 그곳에서 라키엘은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이러이러 해서, 저런저런 일들이 생긴 바람에, 폐하께서 그 일을 내게 맡기신 거야.”

“그러니까, 국경 3소국에서 온 특사단과 협상을 마무리하라는 명이신 겁니까?”

“그렇지. 이해가 빨라서 좋네.”

“형님의 어깨가 많이 무거우시겠군요.”

“그렇지. 날 이해해 줘서 고맙네.”

“그럼, 형님이 제게 찾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알겠어?”

“제가 돕겠습니다.”

“그렇지! 그거지!”

“…….”

“어, 흠흠! 어쨌건, 3소국의 요구가 생각보다 좀 과한 모양이야. 물론 저들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 난데없이 큰 피해를 입은 입장이니까. 그래서 우리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유례없이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일 테고.”

“제법 까다로운 협상이 될 것 같군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 형님을 도우면 될까요?”

“네가 협상을 해 줘.”

“……네?”

2황자 테오도르가 흠칫했다.

라키엘이 뻔뻔하게 말했다.

“사실 폐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지만, 그래서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인 것도 맞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말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노라 하심은……?”

“당장 밝힐 수는 없지만, 나한테 훨씬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 따로 있거든.”

“그런 겁니까.”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그 일과 폐하께서 맡기신 임무를 함께 처리하고 싶긴 한데…… 현실은 내 몸이 하나라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라키엘의 목소리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담겼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두 가지 일을 다 하고 싶다. 그런데 안 된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2황자가 물어왔다.

“한데 그럼, 형님께서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 겁니까?”

“내가 말했잖니. 지금 당장은 밝힐 수가 없다고.”

“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내가 이러는 거겠지?”

“네. 이해합니다, 형님.”

이쪽의 분위기에 전염이 되었는지 덩달아 비장해진 2황자. 녀석을 보며 라키엘은 차마 꺼내지 않은 뒷말을 삼켰다.

황제가 맡긴 임무보다 훨씬 중요하고 긴급한 일. 그건 바로, 자신의 휴가라고.

‘당연하지! 하르미온까지 가서 온갖 개고생을 하다가 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또 일 폭탄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혹사 라이프는 사양이다. 탱자탱자 쉬엄쉬엄 지내고 싶다. 그러니까 옛 성현들도 이런 말씀을 남기지 않았겠는가.

내일의 할 일을 오늘로 미루지 말라고.

라키엘은 시커먼(?) 본심을 싹 숨긴 채 얼굴 가득 철판을 깔았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란다. 내 몸이 하나라서 처리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면, 내 몸과 같은 너의 조력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해서.”

“아…… 형제니까 말입니까?”

“그렇지. 형제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니겠니?”

“형님?”

“응, 말하렴.”

“감사합니다. 저를 그렇게 보아주셔서.”

“감사는 무슨. 당연한 일인데.”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주면 내가 고맙고.”

“그럼, 오늘 당장 3소국의 특사단을 만나볼까요?”

“워워. 진정해. 일단 관련자료부터 보내줄게. 최소한의 정보는 숙지를 하고 테이블에 앉아야지 않겠어?”

“아, 네. 제가 성급했군요.”

“그렇지. 명심하렴. 협상은 인내심 싸움이야. 급하고 절실한 걸 티를 내는 쪽이 불리해져.”

“인내심 싸움…….”

“그렇지. 그것만 가슴에 새기면 돼.”

“알겠습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어떻게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끌어내겠습니다. 그들과 우리 모두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결과를 말이지요.”

“그래. 그거면 됐어.”

라키엘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로써 성실 그 자체인 2황자 녀석에게 숙제 떠넘기기, 성공. 목적을 이룬 라키엘은 룰루랄라 가벼운 걸음으로 별궁을 향했다.

별궁의 밤이 깊었다.

“으아아, 좋다아…….”

라키엘은 오랜만에 맛보는 본인 전용 침대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이 폭신함이란. 이 뽀송함이란. 이 편안함이란. 이래서 침대가 과학이라 불리던 걸까.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전하?”

“응?”

“이렇게 일을 함부로 떠넘겨도 되는 겁니까?”

“응.”

데미안의 물음에 라키엘은 대충 대답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 아니냐는 눈길을 돌려주었다.

“어쨌건 결과만 만들면 되는 거잖아?”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인데도 말입니까?”

“어차피 폐하께서도 만족하실걸?”

“과연, 그럴까요?”

“응.”

그러하다.

정말이다.

“넌 일 잘하는 지배자가 나을 거 같냐, 아니면 일 잘하는 놈들을 잘 부리는 지배자가 나을 거 같냐?”

“그건…….”

“당연히 후자지. 마젠타노 황가가 혼자 개인기로 다 쓸어먹을 수 있는 구멍가게도 아니고. 안 그래?”

“……어쩐지 이번 떠넘기기를 정당화하려는 궤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만.”

“아 결과만 잘 만들면 상관 안 하실 거라니까.”

라키엘은 확신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황제의 성향을 보면 확실하다.

어쩌면 이번 일 처리를 보면서 오히려 더욱 흡족해할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드디어 사람 쓰는 법까지 익혔구나, 라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나는 휴가다? 아무 일도 안 할 거야. 별궁 한의원만 살짝씩 둘러보고 관리할 거야. 나머지 시간엔 쉴 거야아…….”

“그런 겁니까…….”

“어.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제 말 걸지 말아줄래? 나 졸리거든.”

“예. 주무십시오.”

“너도 얼른 자든가.”

“호위 임무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럼 나만 잘게. 굿나잇.”

“예, 곁에 있겠습니다.”

“……드르렁.”

라키엘은 급격히 노곤해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나른함. 노곤함. 그동안 껴안고 있던 책임과 긴장을 비로소 내려놓은 뒤의 후련함. 해방감.

‘드디어……쉴 수 있겠구나.’

모처럼의 편안한 단잠이 찾아왔다.

아늑한 꿈의 세계가 펼쳐졌다.

나른하고.

노곤하고.

아늑하고.

후련한데.

어쩐지 스멀스멀.

어둠이 피어나고.

사방을 휘감다가.

낯선 실루엣이 꿈나라 방바닥 장판을 뚫고 스르륵 올라왔다.

……쿠우웅!

소리 없이 포효하는 강철의 군마.

그 위에 도사린 시커먼 갑옷의 해골 기사.

그가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지저의 밑바닥에서 끌어낸 듯한 목소리로 명하였다.

- 나는 지옥의 1군단장 지오렉시우스.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의 위대하신 명을 받들어 그대,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옥왕의 어전에 초청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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