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지옥왕의 부름 (1)
- 나는 지옥의 1군단장 지오렉시우스.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의 위대하신 명을 받들어 그대,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옥왕의 어전에 초청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왔노라.
“…….”
이쪽을 굽어보는 붉은 안광.
형형한 눈빛 너머로 엇비쳐 보이는 시커먼 해골. 그보다 더욱 깊은 어둠에 물들어 있는 강철의 갑옷과 군마.
살벌했다.
눈만 마주쳤는데도 전신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무리를 했나.’
아무래도 그래서일 거다. 이 정도로 리얼한 꿈을 야물딱지게 꾸고 있는 건. 기력이 떨어진 탓이겠지. 최근까지 계속 혹사를 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아침에 깨면 간만에 건강탕이나 달여봐야겠네.’
셀프 시침도 좋겠다.
그 후엔 적당한 아침 식사와 산책을 즐겨야지. 간식은 당분이 과하지 않게. 그랬다간 염증 수치가 올라갈 테니까. 입이 살짝 즐거운 정도로만 먹고 낮잠도 자는 거야. 그래. 좋다. 이게 바람직한 하루지.
‘아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구만.’
라키엘은 코를 후비적거리는 기분으로 다시금 편하게 누웠다. 한데 조금 전에 나타난 지옥의 1군단장인지 뭔지 하는 존재는 이쪽을 좀처럼 놔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 대답하라,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여.
“…….”
- 그대는 지옥왕의 부름이 한낱 악몽쯤으로 느껴지는 것인가?
네.
그런데요.
‘아이고 시끄러워.’
라키엘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베개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자신의 꿈(?)속에 나타나 단잠을 방해하는 지옥의 기사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안 사요. 안 사. 잡상인은 가라. 훠이훠이.’
- …….
‘기왕 악몽이면 좀 더 리얼하시든가. 뭔 지옥왕이 초청을 하고 말고셔. 진짜라고? 그럼 어디 초청장 좀 봅시다. 응?’
- 아, 초청장이라면 여기 있다.
‘……네?’
- 여기.
‘…….’
진짜다.
훠이훠이 내젓던 이쪽의 손바닥 위에 어느새 촵, 하고 올려진 초청장. 검붉은 봉투였다. 뜨거웠다. 마치 방금 지글지글 구워낸 계란프라이를 손바닥에 올려둔 것처럼.
‘앗 뜨뜨!’
반사적으로 손을 털었다.
지옥의 기사를 향해 반문했다.
‘뭡니까, 이거?’
- 말했잖나. 초청장이다. 지옥왕께서 보내신.
‘그러니까, 진짜로 지옥왕이 날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당신을 보낸 거라고요?’
- 이제야 이해를 했군. 그렇다.
‘아, 네. 하하하. 악몽 체험 잘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라키엘은 그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악몽치고는 꽤나 기묘하고 디테일하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 슬슬 꿈 내용의 장르 변경을 기다렸다.
‘기왕이면 다음 꿈은 좀 발랄한 내용이면 좋겠는데.’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다시 노곤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온몸이 시트 속으로 푹신푹신 감기는 느낌을 만끽하며. 라키엘은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방금까지 꾸던 악몽의 내용은 잊었다. 몽롱해졌다. 아늑한 나른함의 세계가 찾아왔다. 기분이 좋았다. 곁에서 밤샘 호위를 서고 있을 데미안에게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지? 데미안.’
그러니까 내일부터 휴가를 줄게.
내가 쉬는 만큼 너도 며칠쯤은 자유롭게 황도에서 쉬든가, 다른 사람들 만나면서 사교성을 늘리든가 해보라고. 그도 아니면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는 유사 백수 라이프라도 만끽하는 거, 제법 괜찮잖아?
물론 데미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진 않았다.
오히려 우렁찼(?)다.
“일어나십시오, 전하!”
“……!”
갑작스럽게 귓구멍을 쿡, 쑤시듯 파고드는 목소리. 아니, 다급한 외침. 한창 나른함에 몸을 맡기고 있던 라키엘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 직후, 이쪽을 제일 먼저 반긴 감각은 근처에서 터진 강렬한 충격파의 공기 싸다구였다.
투콱…… 파학!
“……궥!”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근처에서 커다란 힘이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몰려왔다. 무방비했던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볼따구와 코가 얼얼했다. 동시에 코 아래가 살짝 찝찝해졌다. 설마 쌍코피라도 터진 걸까.
그러나 손등으로 콧가를 훔치며 확인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하! 피하십시오!”
다급한 데미안의 외침.
동시에 묵직한 충격이 가슴팍을 때려왔다.
퍼억!
“컭!”
온몸이 뒤로 확 밀려났다. 그제야 보았다. 데미안 특유의 비율 좋은 긴 다리가 이쪽을 향해 쭉 뻗어와 있었다. 녀석의 신발 바닥이 보였다. 그 말은 즉…….
‘또 날 걷어찬 거냐!’
뭔 일이 터질 때마다 녀석한테 꼭 한 번은 걷어차이는 나. 과연 이게 우연일까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꾸었던, 아니, 꾸었다고 생각했던 악몽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 비켜라, 마계왕의 삿된 그릇이여.
후우웅!
엄청나게 거대한, 검붉은 빛깔의 대검이 수직으로 공간을 가르며 떨어졌다. 그 끝에 데미안이 있었다. 이쪽을 발차기로 멀리 날려 보낸 데미안이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녀석의 검이 새하얀 섬광에 휩싸였다.
투카학!
녀석의 검이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가 되어 공간을 올려쳤다. 검붉은 대검과 격돌했다. 사나운 굉음과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질주했다. 그 충격파 너머, 어쩐지 낯익은 형상의 철갑옷이 보였다.
‘지옥왕의…… 기사, 헬나이트?’
아까 꿈에서 보았던 그 해골 기사, 헬나이트다. 놈이 대검으로 데미안을 짓누르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에 맞서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용호상박. 덕분에 침실 내부는 이미 엉망진창이 된 채였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악몽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저 헬나이트도. 지옥왕의 초청도. 전부.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황태자인 이쪽의 침실이 폐품 수거장처럼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엄청난 충격파와 굉음이 가장 성대한 콘서트장 앰프보다도 요란하게 울리는 마당이었다. 이쯤이면 별궁은 물론이고, 인근의 황도 경비대가 모조리 몰려와야 정상일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아니었다.
데미안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을 구하러 달려온 이들? 쓰러진 이들? 없었다. 아니, 심지어 침실의 문조차 열리지 않았다.
라키엘은 그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마나의 흐름이 사방에 가득하고…… 침실을 둘러싸고 있구나.’
굉장히 강렬한 성질의 마나였다. 그런 마나가 폭주하듯 날뛰며 침실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마도 결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거겠지. 덕분에 침실 안쪽의 난리가 바깥에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 것일 테고.
즉, 이쪽과 데미안이 저 지옥의 기사와 오순도순 갇혔다는 뜻이다.
‘도망…… 칠 수 있을까?’
상황이 파악되자, 제일 먼저 도망부터 떠올랐다.
한데 그때였다.
- 누차 말하였다. 비켜라, 마계왕의 그릇이여.
“말도 안 되는 소리.”
콰츠칵! 투콱!
헬나이트와 데미안이 연거푸 격돌했다. 한 방 한 방이 묵직한 지옥 기사의 대검과, 송곳니처럼 예리한 데미안의 검격이 서로를 노리며 번득였다. 그때마다 거의 수류탄에 필적할 폭발과 충격파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덕분에 이쪽만 죽을 맛이었다.
‘……구와아아악!’
라키엘은 날아드는 파편에 기겁하며 반쯤 뭉개진 침대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베개 아래에 두었던 만년설을 집어 재빠르게 전개했다.
그 사이에도 지옥 기사와 데미안의 격돌이 계속 이어졌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언쟁과 함께였다.
- 인간도 아닌 한낱 그릇 주제에 고집을 부리는구나.
“그쪽도 인간이 아니긴 마찬가지인 듯한데?”
- 나야 헬나이트니까. 지옥왕을 모시는 위대한 기사니까.
“나는 전하를 모시는 호위다.”
- 그래서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그쪽이 전하에게 함부로 손을 대려 들었으니까.”
- 말하지 않았는가. 그대의 주군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그런 살벌한 몰골로 찾아와서 잠든 이의 목을 다짜고짜 틀어쥐려 했으면서?”
- 지옥의 인사법이다.
“인사법 한 번 고약하군.”
-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과거 지옥의 공기는 너무나 매캐해서 다들 기침을 달고 살았거든. 그런 상대방의 건강을 걱정하며 묻는 데에서 비롯된 인사법이다. 나름의 배려랄까.
“그렇게까지 자세한 설명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 궁금해하는 듯해서.
“아니. 궁금한 적 없어.”
- 그렇다면 용건은 없다. 이제 비켜라.
“말했을 텐데. 내 시체를 넘기 전에는 전하께 다가설 수 없을 거라고.”
……투콰학!
둘의 공격이 다시금 서로에게 막혔다. 헬나이트와 데미안이 검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한데 둘의 기세는 아까와 달라져 있었다.
라키엘은 그걸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데미안이 조금씩 불리해지고 있어.’
녀석의 호흡이 아까보다 살짝 거칠어져 있었다. 반면, 헬나이트는 여전히 안정된 모습이었다.
‘데미안과 달리 헬나이트는 체력이 무한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결과는 뻔하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데미안이 불리해질 것이다.
‘어떡하지?’
라키엘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상황은 알겠다. 지옥왕이 자신을 초청하려 헬나이트를 보냈고, 놈의 접근을 감지한 데미안이 검을 뽑은 거겠지. 거기서부터 시작된 전투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일 테고.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할까.
‘함께 싸워야 하나?’
아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은? 그것도 아니.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면 데미안을 열심히 응원이라도 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다.
‘이 초청, 거부할 수는 없겠는데.’
무려 지옥왕의 초청이다.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
괜히 뻗대다간 손해만 잔뜩 볼 것 같다.
지옥왕이라면 가히 신급의 절대자니까.
말 그대로 절대적인 갑, 그 자체니까.
그런 존재에게 개긴다고?
말도 안 된다.
차라리 냉큼 부름에 응하는 것이 이득일 터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끌려가는 건 말이 안 되지.’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의 부름에 응한다고 해도, 일방적인 호구가 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 끝이다, 인간 흉내를 내는 그릇이여.
이쪽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데미안과 헬나이트의 대치가 끝났다. 헬나이트의 대검이 미묘한 각도로 흔들렸다. 동시에 헬나이트의 전신에서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난폭한 마나의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
데미안의 균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녀석이 검을 끌어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256개의 멀티 마나하트를 전부 동원하려는 걸까. 녀석의 검이 이전보다 훨씬 압도적인 새하얀 섬광으로 뒤덮였다.
녀석이 외쳤다.
“전하! 엎드리십시오!”
아마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충돌과 충격파가 몰아닥치겠지. 그러나 라키엘은 데미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침대 뒤로 숨기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전하……?”
기겁하며 돌아보는 데미안.
움찔하며 쳐다보는 헬나이트.
둘의 무모한 충돌을 막기 위해 재빠르게 외쳤다.
“스토옵! 지옥왕의 전령, 지옥의 1군단장 지오렉시우스 경이여!”
- ……!
헬나이트가 데미안에게 뻗던 대검을 황급히 거두었다.
그를 향해 소리쳤다.
“경이 전달한 지옥왕의 초청에 응하겠다! 단! 조건이 있다아!”
- 조건……?
“그렇다!”
대검에 서린 기세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고서 이쪽을 쳐다보는 헬나이트.
그를 향해 요구했다.
너무나 당당하게.
맡겨둔 신용카드 내놓으라는 듯이.
“나,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예정에 없던 지옥행을 일방적으로 제안한 지옥왕께! 그에 합당한 소정의 출장비로! 일정량 이상의 수명과 건강 보장권의 지급을 요구한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