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지옥왕의 부름 (2)
“나!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예정에 없던 지옥행을 일방적으로 제안한 지옥왕께! 그에 합당한 소정의 출장비로! 일정량 이상의 수명과 건강 보장권의 지급을 요구한다아아!”
질렀다.
너무나 당당하게.
참으로 태연하게.
헬나이트를 향해 외쳤다.
- ……뭐?
설마 이런 요구는 상상도 못 했던 걸까. 헬나이트가 두개골을 갸웃. 이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어 왔다.
- 출장비?
“그렇다!”
- 수명과 건강 보장권을 달라고?
“그렇다니까!”
- 어째서?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 모든 수고에는 합당한 대가가 붙는다. 그게 없으면? 폭리이고 폭력이다.
알바를 하면 시급을 받는다. 할아버지 흰머리를 뽑아드려도 가닥당 10~100원은 챙길 수 있다. 예비군 훈련을 다녀와도 교통비가 지급된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무려 인간인 내가 지옥에 가야 하는 일이잖아, 그쪽의 요구대로라면?”
- 그렇지.
“그런데 내가 부담이 되겠어, 안 되겠어?”
- 지옥도 지내보면 괜찮은 곳이다.
“그건 그쪽 기준이고!”
라키엘은 헬나이트의 대꾸를 빼액 잘랐다.
“게다가 지옥왕의 부름이라고는 해도, 이게 무료봉사인 거면 말이 안 되잖아?”
- 그대의 노고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가?
“당연하지.”
어느새 대검을 늘어뜨린 채 물러나 있는 헬나이트. 그를 향해 라키엘이 일침하듯 말했다.
“그게 지옥이건 어디건 상관없어. 어쨌건, 남의 요청에 의해서 내 시간과 체력과 노력을 들여가며 어딘가를 다녀와야 하는 일이잖아? 그럼 날 불러들이는 쪽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게 뭘까?”
- 그게 출장비라는 건가?
“이제 슬슬 말이 통하는구만?”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헬나이트가 넌더리를 냈다.
- 그대는 감히, 위대한 지옥의 지배자께 출장비를 요구하겠다는 것인가?
“안 돼?”
- …….
“위대한 분이야말로 그런 기본을 지켜야, 위대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 허어. 진심인가?
“응, 매우.”
- ……내가 이런 종류의 인간을 또 보게 될 줄이야.
“뭐?”
- 설마 그대도 듣는 자의 고막과 영혼을 비틀고 파괴하는 가공할 노래 솜씨의 소유자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 다행히 아닌가 보군. 뭐, 그 얘긴 됐다.
아주 잠깐 떠오른 머나먼 과거. 어느 사악했던 영지 설계사에 대한 추억(?)을 되삼키며 헬나이트가 대검을 들어 올렸다. 데미안이 순간 움찔하며 라키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지옥의 기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서 대검을 허공에 털듯 휘둘렀다.
……츠츳!
그걸로 대검이 눈 녹듯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가 비게 된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 그대의 태도를 보아하니 호위와의 충돌은 더는 필요가 없겠군. 좋다. 그대의 출장비 요청에 정당하고 합당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그래? 말귀가 통해서 다행이군, 지오렉ㅅ…… 무슨 경이었더라?”
- 지오렉시우스. 부르기 힘들다면 렉시 경이라 불러도 된다.
“좋아. 렉시 경? 그럼 괜히 빙빙 돌리거나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만약 내가 당신을 따라서 지옥왕을 만나러 간다면, 출장비로 얼마를 줄 수 있지?”
- 수명 말인가?
“그래.”
다행히 헬나이트와 말이 제법 통한다. 그럼 얼마의 수명을 출장비로 받게 될까. 라키엘은 기대하며 헬나이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 그건 나도 모른다.
“뭐?”
-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그저 지옥왕의 명에 따라 지옥의 적을 부수고 짓밟는 한 자루 검이며 창일 뿐. 인간의 수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존재는 명계와 천계의 최상위급 공무원인 지옥왕과 천사장뿐이다.
“공무원……?”
- 그렇다.
“그럼 댁도 공직자였어?”
- 나는 아니다.
헬나이트가 아래턱뼈로 달각, 소리를 냈다.
- 엄밀히 따지자면 나는 공직자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협력 하청이랄까.
“…….”
- 그래서 월급도 나온다. 복지도 제법 빵빵하지.
“아니, 그런 것까지 알고 싶은 건 아니고.”
- 알겠다. 이야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샜군. 미안하다.
“그럼 내 출장비는?”
- 말했다시피 그건 지옥왕께서만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쯧. 댁한테는 권한이 조금도 없는 건가?”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실망한 기색을 여과 없이 뻔뻔하게 그대로 드러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헬나이트가 이쪽의 실망을 잠재우려는 듯, 황급히 대답했다.
- 하지만 성급하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째서?”
- 나는 지옥왕을 모시는 1군단장이다. 또한, 그대에게 그분의 부름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특사이기도 하지. 그러니 내게도 그대의 의견이 지닌 정당성을 지옥왕께 전달할 권한 정도는 있다.
“싸바싸바 좀 해준다는 건가?”
- 이를테면 그렇다.
“그럼 지옥왕께서 내 요구를 들어주시는 거?”
- 아마 그럴 것이다.
“……아마?”
- 그분은 지극히 합리적인 분이시고, 이미 그분의 특사인 내가 그대의 요구가 지닌 정당성을 인정한 상황이다. 그러니 그분께서 굳이 그대의 요구를 거절하실 일은 어지간하면 없을 것이지 않겠는가.
“쓰읍.”
라키엘은 혀를 찼다.
헬나이트 렉시 경이 물었다.
- 왜 그러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가?
“당연하지.”
라키엘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살짝 애매하잖아?”
- 애매하다니, 어떤 부분이?
“아마 그럴 거라니. 그분이 내 요구를 거절하는 일이 어지간하면 없을 거라니. 이거 대답이 전부 애매하잖아. 아무리 봐도 확답이 아닌데, 이건?”
- 어, 그건…….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만 거창하게 해가지고 날 지옥에 데려가 놓고선, 정작 나중에는 딴소리하는 거 아니야?”
- 아니다.
“아니긴 무슨. 내가 그런 거 얼마나 많이 봤는데.”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특히 그랬다.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남을 속이는 데에 능숙한지. 어쩌면 그렇게도 나중에 말을 바꾸고서 뻔뻔하게 구는 일에 익숙한지.
“렉시 경? 그쪽이 알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있던 곳에서는 제일 믿으면 안 될 말이 있었어. 그게 뭔지 알아?”
- 모른다.
“그럼 알려줄게. 그게 뭐냐면, ‘내가 나중에 잘 말해줄게’였어.”
- 그런……가?
“그래.”
정말로 그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 나중에 말을 바꾸지 않는 사람? 별로 못 봤다. 아니. 거의 못 봤다. 자기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저런 달콤한 말을 책임감 없이 내질렀다가, 정작 아쉬운 게 없어지면 말을 바꾸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래놓고는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하지. 내가 확답을 한 거였냐고.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나라고 무슨 수가 있겠냐고. 이거 하나 이해도 못 해주면 나는 어떡하냐고 말이야. 마치, 약속을 믿고 기다렸던 이쪽이 이해심이 없고 이기적인 사람인 것처럼 몰아가기까지 하더라니까.”
저거,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당해보면 비로소 느끼게 된다.
인류애 바사삭.
인간적인 신뢰 따위, 개나 주라고.
“그래서야. 헬나이트 렉시 경? 당신이 보장해준다는 말이 고맙기는 해.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말을 다 믿지는 못하겠어. 당연히 그걸 믿고서 지옥행을 결정하기도 망설여지고.”
-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럼 내가 뭘 하면 그대는 나를 믿어줄 것인가?
“각서.”
- 뭐?
“각서 쓰자고.”
라키엘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말로 하는 약속은 안 믿어. 서류든 뭐든 서로에게 공평한 증거를 남겨야지 않겠어?”
- 허어. 허허…….
“왜? 싫은가?”
- 아니. 그건 아니다. 다만…….
“다만?”
- 볼수록 예전에 알았던 어느 인간이 떠올라서 말이지.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은 새삼 떠오르는 추억의 인간을 회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흔쾌히 두개골을 끄덕였다.
- 좋다. 그대가 요구하는 각서, 쓰도록 하지. 그럼으로써 비로소 내 말에 믿음이 생긴다면 말이다.
“좋은 결정이야. 그럼.”
라키엘이 눈치를 보냈다.
눈치를 접수한 데미안이 난장판이 된 침실 한쪽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무사히 살아남은(?) 종이와 펜, 잉크병을 가지고 왔다.
“각서의 내용은 내가 정해도 될까?”
- 마음대로.
“통도 크셔라.”
슥슥쓰슥!
라키엘이 각서를 휘리릭 써내려갔다.
즉석에서 떠올린 내용은 간단했다.
[각서]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은,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옥으로 호출하며, 이에 따라 소정의 지옥 출장비로 1년 (인간계 기준, 365일) 이상의 보너스 수명을,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와 대면하는 ‘즉시’, ‘반드시’ 지급할 것을 굳게 약속합니다.]
[또한, 상기한 각서의 내용이 이행되지 않을 시,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은 위약금으로 10년 (인간계 기준, 3650일) 이상의 보너스 수명을 강제로 지급할 것이며, 이 또한 이행되지 않을 시, 본 각서의 이행에 대한 전권을 천계와 천사장에게 일임할 것임을 굳게 서약합니다.]
[계약 보증인 : 지옥 1군단장 지오렉시우스]
- …….
각서의 내용을 확인한 렉시 경의 목뼈가 딱 굳었다.
라키엘이 태연하게 물었다.
“왜? 문제 있어?”
- 아,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그럼?”
- 참 꼼꼼하구나 싶어서…….
“당연하지. 각서가 장난이야?”
- 심지어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천계의 개입이라니, 꼭 이 정도로까지 철저하게 써두어야 했나?
“아, 당연한 소리를 계속하시네. 보증 안 설 거야? 나 안 데려갈 거야?”
- 그건 아닌데…….
“그럼 서명.”
- ……여기?
“그렇지. 보기와는 다르게 서명 이쁘시네.”
- 이제 됐나?
“아니. 지장.”
- ……여기?
“그렇지. 보기와는 다르게 지문도 가지런하시고.”
- 이젠 됐겠지?
“아니.”
- 또 뭐가 있나?
“침 발라야지.”
- …….
“쓰읍.”
- ……할짝.
라키엘이 가리키는 각서 아래쪽에 영체만 남은 혓바닥을 갖다 대며, 지옥의 1군단장은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쑴펑쑴펑 샘솟는 현타를 느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적인 상사인 지옥왕께서 ‘반드시’ 데려오라고 지목하신 인간이다. 하니 무조건 데려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임무다. 그러니까…….
- 이젠 정말로 됐겠지?
“아니. 여기, 각서가 한 장 더 있는데?”
- 어째서!
“각서든 계약서든 동일한 내용으로 2부를 작성해서 서로 나눠 가지는 게 기본이잖아?”
- …….
스슥, 꾹, 할짝.
지오렉시우스 경은 뼛속 깊이 스미는 한탄을 꾹꾹 누르고서 서명과 지장, 침 바르기의 3종 세트(?)를 완료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 인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이 되어 버린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말했다.
- 이제는 진짜로 다 됐겠지. 그럼 출발 준비는 되었나?
“뭐, 대강은? 내 호위를 데려가도 되겠지?”
- 호출은 오직 그대만 받은 것이다만.
“그래도 혼자 가기는 싫은데.”
- 두려운가?
“아니. 억울해서.”
- 뭐?
“나 혼자 지옥에 가면 그동안 얘는 졸지에 휴가 받아서 놀게 될 거잖아.”
- …….
“그러니까 데려가야지. 월급도 비싸게 주는데.
- 그대라는 인간은 정말이지…….
“아 좀 갑시다 이제 좀. 답답해 죽겠네.”
- ……빌어먹을.
지오렉시우스 경이 치를 떨며 어둠의 마력을 개방했다. 그러자 허공에 검붉은 마법진과 함께 원형의 통로가 생성되었다.
콰아아아아-!
울부짖는 듯한 포효.
그 너머로 보이는 마경의 세상!
지오렉시우스 경이 자신이 개방한 통로를 가리켰다.
- 지옥왕의 어전으로 통하는 헬게이트다. 들어가도록.
“예. 실례합니다아.”
라키엘은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안전벨트 냅다 풀고 짐부터 꺼내는 한국인처럼 헬게이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내를 하던 헬나이트가 잠시 움찔했을 정도의 거리낌 없는 움직임이었다.
‘뭐, 어차피 지옥왕의 부름이니까. 내가 죄를 짓고 가는 것도 아니고.’
지옥의 절대 갑이 보증하는 지옥 투어.
이보다 안전한 여정이 어디 있겠는가.
그 생각으로 헬게이트를 건너갔다.
게이트를 건너는 감각은 별것 없었다.
투명한 막을 한 겹 통과하는 듯한 느낌.
그 너머에는 뜻밖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
톡.
헬게이트 너머 지옥에 내딛는 첫발. 의외로 깔끔한 대리석 바닥이었다. 지옥의 유황불? 검붉은 피가 흐르는 살벌한 광경?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사방이 맨들맨들, 고급지고 깔끔한 사무실의 새하얀 실내만이 펼쳐져 있을 뿐.
그리고 그 너머.
사무실 가장 안쪽.
한 남자가 드넓은 통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직 뒷모습뿐이었다.
그럼에도 조각상 같았다.
인류가 얻어낸 황금률의 비례를 가장 정성껏 적용한 듯한 뒷모습. 절로 스며 나오는 초월자의 압도적 분위기. 은발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벌써부터 느껴지는 세기의 걸작 같은 미모까지.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바로…….
역사에 기록된 최강의 그랜드 마스터.
현재는 지옥의 지배자가 된 남자.
‘……하비엘, 아스라한.’
저도 모르게 문득, 전율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