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지옥왕의 부름 (3)
‘하비엘…… 아스라한.’
역사에 기록된 최강의 그랜드 마스터.
오늘날엔 지옥의 지배자가 된 남자.
그가 확실하다.
보자마자 알겠다.
문득, 전율이 일었다.
‘빛이 난다, 뒤통수에서 빛이!’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뒷모습일 뿐이었다. 그런데 완벽했다. 가볍게 뒷짐을 지고서 서 있는 자세가. 그 비율과 균형이. 단지 걸치고 있을 뿐인 정복의 핏감과 옷주름 하나마저. 그야말로 세기의 걸작이라 불릴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곁에 나란히 선 데미안이 긴장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온한 얼굴 같지만, 언제나 녀석과 붙어 다닌 덕분에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녀석, 긴장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건 아마도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들만이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지옥왕이 발산하는 위압감 때문인 거겠지.
그때였다.
“다행히 내 부름에 호응해 주었군.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나직한 목소리.
그와 함께 지옥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한때 세기의 미남이라 불리기도 했던 남자, 하비엘 아스라한. 곱슬거리는 은발 아래 빛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이쪽의 영혼을 구석구석 파악하듯 내려다보았다.
……꿀꺽.
‘분위기 장난 아니네.’
후손인 아스라한 변경백 가문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존잘력을 뿜뿜하는지 알겠다. 그들의 원조 맛집(?)인 저 존재가 저렇게 잘생긴 덕분이겠지. 아니. 이건 잘생겼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다. 어지간한 미남, 연예인들을 옆에 붙여놓는 것만으로도 건어물 가게를 차릴 수 있을 듯하니까.
‘저러니까 평생 붙어 다녔다는 주인을 하인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거겠지.’
그러고 보니 기록으로 접한 내용이 떠올랐다. 하비엘 아스라한, 인간 시절 저자의 엄청난 존잘력 때문에 그가 모셨던 주인이 종종 하인으로 오해받고 살았다고 했던가. 문득, 저자의 주군이었다는 전설의 영지 설계사에 대한 연민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눈앞의 지옥왕의 인사에 화답할 때다.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지옥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대강 이런 형식의 인사말이면 무난하겠지.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답례를 들은 지옥왕 하비엘이 살짝 코웃음을 쳤다.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라. 정말인가?”
“……예?”
“나는 원래라면 병으로 죽어 없어져야 했을 무력한 황태자가 아닌, 그의 껍질에 들어간 억척스러운 이를 부른 것이건만.”
“아…….”
“그렇지 않나, 인간, 이한?”
“…….”
역시 지옥왕이라는 건가. 처음부터 이쪽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나 보다. 그러나 라키엘은 당황하는 대신 뻔뻔하게 대꾸했다.
“저의 본질을 알아보아 주셔서 실로 감사합니다, 지옥왕이시여.”
“흐음. 나는 뻔뻔한 인간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그렇습니까?”
“인간이던 시절에 하도 시달려서.”
“…….”
“뭐 어쨌건, 그대가 내 전령인 1군단장을 통하여 흥미로운 요청을 했더군.”
“각서의 내용을 전달받으신 겁니까?”
“전달받았다마다.”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지옥왕 하비엘이 특유의 존잘력 가득한 얼굴에 피식거리는 웃음을 머금었다.
“출장비라. 이런 뻔뻔하고도 대범한 요구라니. 저쪽 세계에서 온 인간들은 다 이런 식인가? 혹시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이라도 받으며 자라는 건가 싶기도 하고.”
“…….”
무슨 뜻일까, 저 말은. 혹시 한국 출신의 사람을 겪어본 적이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걸 캐물을 기회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옥왕 하비엘이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대의 요청에 합리성이 충분함을 인정한다. 아니, 이 경우는 오히려 나의 배려가 부족했다고 봐야겠군.”
“그럼…….”
“그대가 요청한 출장비를 지급하도록 하지. 1년 치의 기대수명. 어떤가?”
“좋습니다!”
자고로 이득은 냉큼 취해야 한다. 확실하게 부작용 없는 소득이 보장되었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꿀꺽 삼켜야 한다. 그 진리에 따라 라키엘은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지옥왕이 다시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좋다. 지금 바로 지급하도록 하지.”
……딱!
지옥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딩동!
[미증유의 압도적인 힘이 당신의 염색체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당신의 염색체 말단을 담당하는 말단소립(Telomere)의 길이가 살짝 연장됩니다.]
[당신의 말단소립이 지닌 복제 한계 횟수,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가 확장됩니다.]
[그 결과, 당신에게 365일의 수명이 추가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2,098일]
[추가 보너스 : 당신은 말단소립 연장의 부가적 혜택으로 암에 걸릴 확률이 0.7% 감소합니다.]
“…….”
오오.
오오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쿨하게 지급된 1년의 수명! 거기에 암 당첨 확률까지 낮춰주는 부가 보너스까지. 생각보다 화끈한 지옥왕의 출장비 지급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장육부도 열렬히 반응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때아닌 수명 연장에 환호합니다.]
[심장 : 어? 내가 공짜로 3,700만 번을 더 뛸 수 있게 됐다고?]
[허파 : 허헣파하핰ㅋㅋㅋㅋㅋㅋ]
[대장 : 매일 모닝끙에 성공하면 365덩어리의 끙까를 생산할 수 있을 거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ㅋㅋㅋ그럼 오늘만 기념으로 술 한 잔만 마셔도 됨?]
[위장 : 크으 벌써부터 취한닼ㅋㅋ]
[콩팥 : 술? 수우울? 우리 몸뚱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음?]
[비장 : 충분함. 원래 몸은 쓸수록 단단해지잖아? 근육처럼 간도 그렇지. 소주 양주 막걸리로 매일 단련하면 간도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음.]
[방광 : 저기, 우린 그걸 간경화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오장육부가 난데없는 기대수명 연장에 단체 탭댄스를 추며 10,0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49,600]
생각보다 이득이 막대하다. 이쯤이면 이것만으로도 지옥행, 제법 성공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한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대가 요구한 각서의 내용을 이행했다. 하니 이제는 이쪽이 용건을 밝힐 차례겠지.”
지옥왕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 뭘까, 지옥왕의 용건은.
저세상의 대존잘(?)께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대가 인간계에서 인과의 매듭을 제법 꼬아놓아 버렸어. 그래서 그 매듭을 그대가 직접 풀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인과의 매듭……이라니요?”
혹시 이쪽이 소설 속 세계로 들어와서 소설의 내용을 마음대로 바꿔 버린 걸 말하는 걸까.
라키엘은 섬뜩한 짐작을 떠올리며 물었다.
“설마 운명이 원래의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강력한 힘 같은 것이 작용하거나, 뭐 그런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다.”
다행히 지옥왕 하비엘이 고개를 저었다.
“운명의 복원 현상을 떠올린 것이라면, 틀렸다. 그 현상은 이미 300년 전에 깨어졌어. 덕분에 이 세계가 학습을 해 버렸지. 때로는 예정된 복원의 힘보다, 무작위스러운 변질의 방향이 더욱 자연스러운 운명의 흐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 덕분에 이제 더는 운명의 복원 현상은 일어나지 않아.”
“아, 예…….”
고막으로는 말을 듣고 있는데, 이놈의 두뇌로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어쨌건 지옥왕 하비엘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언급한 인과의 매듭은 전혀 다른 일이야. 그대가 최근 수하로 거두게 된 본드래곤 때문이지.”
“뚜식이 말입니까?”
“그래. 그 뚜식…… 작명 센스가 참…… 어쨌건, 그 본드래곤은 흑마법사들의 주술에 의해 불완전한 상태로 탄생하였어. 덕분에 방사성 물질의 코어가 밀봉되지 않은 채로 임계치를 넘겼고, 대량의 방사선을 분출하게 되었지. 거기까진 알고 있겠지?”
“예, 대강은. 흑마법사들이 만들었다는 건 몰랐지만 말입니다.”
“실은 그 사실이 중요해.”
“흑마법사들 말입니까?”
“그래.”
지옥왕 하비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본드래곤이 폭주하며 국경의 수많은 마을을 초토화하던 당시, 그 방사선에는 대량의 흑마술이 깃들어 있었다. 즉, 수많은 희생자들이 흑마술 특유의 저주를 받으며 죽었다는 뜻이지.”
“…….”
불현듯 떠올랐다.
당시 뚜식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목격했던 수많은 참상들. 시신의 무더기. 지옥왕의 말이 이어졌다.
“흑마술의 저주를 받으며 죽은 영혼은 지옥이든 천계든 아무 곳으로도 올라오지 못해. 오염된 상태로 지상을 떠돌게 되지. 시간이 흘러서 오염이 정화되기까지 평균적으로 천 년의 시간 정도를 말이야.”
“그럼 지금 국경 지대의 희생자들도…….”
“아니. 지금은 오염이 정화되었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그대가 본드래곤의 코어를 완성시키는 바람에 흑마술의 영향이 사라져 버렸거든.”
“그럼 다행인 거 아닙니까?”
“글쎄.”
지옥왕 하비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차라리 천 년쯤 방황하다가 올라오는 게 나았을 거야. 지금 그들의 상태를 보면.”
“어째서…… 말입니까?”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으며 저주를 받았고, 떠돌이 망령의 상태에 적응하기도 전에 오염이 덜컥 정화되어 버렸고, 덕분에 다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옥에 올라오게 됐어. 그 결과 그들은 지금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겁니까?”
“그래. 그게 문제야.”
지옥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옥의 끝에는 환생의 문이 있어. 모든 영혼은 거기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부여받지. 그런데 망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환생의 문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생겨. 정상적인 윤회를 하지 못해. 예정된 새 삶을 받지 못해. 그 결과 미물로 태어나게 되지. 이를테면 파리나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 같은 것들로 말이야.”
“…….”
“억울하게 죽고, 죽은 후에도 고초를 겪은 이들이, 새 삶을 부여받는 과정에서마저 그런 참상을 겪어서야 되겠나?”
“물론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 권능으로 그들에게 죽었다는 인지를 부여할 수 없느냐고?”
“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지옥왕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지옥왕은 그대의 생각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야. 그저 지옥이라는 세계의 법칙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관리하는 최고위의 관리직일 뿐.”
“그럼…… 저를 불러 그 일을 말씀하시는 건…….”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서지.”
“어떤 도움입니까?”
궁금해졌다.
죽은 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죽었다는 실감을 못 하고 있다는 피해자의 영혼들.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그들에 대한 나름의 작은 속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뚜식이 때문에 죽은 이들이니까.
그런 뚜식이를 자신이 거느리게 됐으니까.
이쪽의 직접적인 잘못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앞으로 뚜식이를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한 번은 짚고 넘어가며 속죄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대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거지?’
불가능하거나 무리한 요구만 아니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무렵이었다.
“그대가 도울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지옥왕 하비엘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해자의 영혼들이 각자 생전에 앓고 있던 질환, 지금까지도 환각 같은 불편함과 통증을 느끼게 하여 그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게 만드는 수많은 질환을, 그대가 빠짐없이 치료해 주기를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