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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467화 (466/468)

467화. 공조를 요청합니다 (1)

누구나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게 꿈이여 생시여 싶은 그런 순간.

드라마,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소설 등등의 주인공이 자신의 뺨을 때려보거나, 다리를 꼬집어 보거나 하는 장면 말이다.

그래서 아픔이 느껴지면?

다들 그러곤 한다.

아, 이거 꿈이 아니구나.

철저한 팩트 기반의 현실이구나, 라고 말이다.

“……그래서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지옥으로 올라오게 된 피해자의 영혼들이, 자신이 아직 죽었다는 걸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말이지.”

“아파서, 인 겁니까?”

“그렇지.”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이 집무실 창밖을 가리켰다. 아까 그가 내려다보고 있던 방향. 그곳에 수많은 망자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을 보도록. 어때 보이나?”

“어, 뭔가, 다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럼 저들이 설마?”

“그래. 본드래곤에 의해 죽은 피해자들이다.”

“…….”

“마치 살아 있는 이들처럼 행동하고 있지? 다른 망자들과는 다르게.”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지옥왕이 가리킨 곳에 무수하게 모인 망자들의 앉은 자세나 행동거지가 어쩐지 눈에 익숙했다. 그건 바로…….

“꼭, 병원에 와서 접수하고 대기하는 환자들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알아볼 수 있었다. 분위기가 똑같았다. 다들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한 듯한 모습.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도 뭔가 활기가 떨어지는 듯한 모습. 전형적인 종합병원 대기실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광경이었다.

라키엘이 물었다.

“그럼 지옥왕께서 해주신 말씀대로라면, 저들이 살아생전에 앓고 있던 질환의 고통을 지금까지도 그대로 느끼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 고통과 불편함이 저들을 착각으로 빠뜨리고 있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거라는 착각 말이로군요.”

“그래.”

지옥왕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처음 저들의 상태를 파악했을 땐 당황스럽더군. 인간계의 시간으로 300년 동안 지옥을 통치하면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서. 그리고 이내 깨달았지. 이건 내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어째서입니까?”

“지옥왕인 내가 어째서 이걸 해결하지 못하느냐고?”

“외람되지만…… 예.”

“사실 당연한 이야기야.”

지옥왕 하비엘이 피식 웃었다.

“지옥은 오로지 망자를 받아들이고, 분류하고, 환생의 문으로 안내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는 공간이지. 그런 이곳에 병원이나 의료 시설이 있을 것 같은가?”

“아뇨. 하지만…….”

“안타깝지만 내겐 누군가를 치료하는 재주는 없어.”

“……그렇습니까.”

“어찌 보면 웃긴 일이지. 지옥왕의 권능? 저들을 어르고 달래서 진정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했지. 환각 상태로 만들기도 해보았고. 하지만 결국은 소용이 없었어. 저들이 느끼는 병마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으니까.”

“…….”

듣고 보니 알겠다.

인간 시절엔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는 그랜드 마스터. 현재는 지옥의 지배자가 된 남자. 하비엘 아스라한. 그런 그의 재능은 상대를 박살 내는 데에만 특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남을 어르고 달래며 치료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거고.

하지만…….

“아스라한 심법, 써보진 않으신 겁니까?”

“내가 창안한 심법?”

“예. 그거면 아마도…….”

“그 또한 소용이 없었어. 내가 지옥왕이 된 까닭에. 인간의 것과 마나의 파장이 달라져 버린 탓에. 섣부른 시도로 죄 없는 망자를 소멸시킬 뻔하기만 했지.”

“…….”

“그래서야.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어, 그러니까, 망자들의 다양한 질환을 치료해달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래.”

지옥왕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을지.

그런데 아까부터 마음은 쓰리다.

뚜식이를 추적하던 내내 보았던 수많은 참상들. 곳곳에 쓰러져 있던 참혹한 주검들. 그들이 저곳에 있다는 생각에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걱정이 드는 점이 있었다.

“혹시 실패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럼 성공하면…….”

“추가 보상을 주지.”

“얼마나…….”

“매우 넉넉하게.”

“구체적으로 어떤 보상을 얼마나…….”

“한 개의 보너스 목숨. 그렇게 훗날 두 차례에 걸쳐 맞이할 죽음의 순간에 주어질 완벽한 마취 서비스. 두 개의 목숨을 모두 소진한 이후에 지옥 방문시 VIP 라운지 이용권까지.”

“…….”

“참고로 지옥 VIP 라운지 입장 고객은 자신이 다음으로 환생할 종족과 지위, 즉 수저의 색깔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받게 되지. 이 정도 패키지면 어떨까. 이래도 부족한가?”

“……하겠습니다!”

냉큼 외쳤다.

이건 놓치면 안 된다.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건수다.

지난번 용왕에게 받았다가 날렸던 것과 동일한 보너스 목숨 1개, 거기에 고통 없는 죽음, 심지어 다이아수저 환생까지 가능해진다니!

‘……대박. 초대박.’

역시 지옥왕이다. 그만큼 화끈, 아니, 롸끈하다. 이래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거다.

라키엘은 기쁨의 앞구르기 뒤구르기를 시전하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냉정함을 부여잡으며 구체적인 진료 계획을 세웠다. 후다닥. 신속하게.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덕분에 진료 계획이 순식간에 잡혔다.

“하여 지옥왕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그렇습니다. 원활한 진료를 위한 부탁입니다.”

“말해보도록.”

“감사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진료기간 동안 이곳 지옥과 별궁 한의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헬게이트의 개설입니다.”

“……뭐?”

지옥왕 하비엘의 아름다운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왜지?”

“효율적인 진료를 위해서입니다.”

촵촵, 라키엘이 촉촉하게 적신 혓바닥을 놀리기 시작하였다.

“아까 지옥왕께서 말씀하셨지요. 망자를 받아들이고, 분류하고, 환생의 문으로 안내하는 것이 이곳 지옥의 주 업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치료하는 시설 따위는 없다고도 하셨고요.”

“그랬지.”

“그래서입니다. 의료 시설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혼자서 저 수천 명이 넘는 망자들을 일일이 다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으음.”

“시설도 없고, 인력도 없고, 약재나 도구는 물론이고 물자마저 없으면 아무리 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사실 의료 서비스라는 거, 그거 다 도구빨이거든요.”

그건 사실이다.

정말로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화타 싸다구 후려칠 한의사라도.

의료장비나 도구, 약재를 모조리 압수(?)당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 버린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그냥 의학 지식이 풍부한 사람 1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당연하지. 혈액 검사와 CT, MRI, 수술 도구를 봉인당한 의사라거나. 침술이랑 뜸, 한약을 압수당한 한의사라거나. 다들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없어지는 거거든.’

그런데 지금 지옥에서의 자신의 처지가 그와 같았다. 지옥왕이 맡기려는 환자는 수천이 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도구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떤 치료도 못 한다.

라키엘이 말했다.

“의료인은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의술 또한 뿅 하는 마술이 아닙니다. 엄연한 기술이고, 도구와 물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요. 한데 저는 지옥왕께서 맡기신 일을 꼭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성공적인 진료를 위해서, 저는 반드시 별궁 한의원의 인력과 물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주장이로군.”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대의 요청을 바로 허락할 수는 없어. 설령 그대의 주장이 피해 망자들을 위한 최선의 길일지라도 말이야.”

“예?”

라키엘은 멈칫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지옥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가 한 요청의 규모가 지옥 행정부 단독으로 결정하기엔 다소 큰 사안이라서 말이야.”

“아, 설마…….”

“짐작했나?”

“아마도, 예. 지옥과 인간계를 장기간 연결하는 통로를 개설하고, 두 세계의 인력과 물자가 지속적으로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차원의 법칙을 근본적으로 비틀거나 흔드는 일이라는 뭐, 그런 종류의 사안인 겁니까?”

“정확하다. 내가 사람을 잘 골랐군.”

지옥왕 하비엘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먼 과거.

자신이 인간이었던 시절.

나마란 영애와의 사이에서 얻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머나먼 후손의 몸을 차지한 자가 이런 녀석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흡족하다고. 아주 잠깐씩은 교활했던 옛 주인을 떠올리게 해서 살짝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마음에 든다고. 문득 흐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물론 그런 순간은 잠깐이었다.

지옥왕은 금방 자신의 공적인 입장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어쨌건, 그런 이유 때문에 그대의 요청은 지옥 행정부 단독의 결정으로는 강행할 수가 없어. 그래서 공조가 필요하지.”

“공조라시면…….”

“이곳 차원 모든 계의 행정을 아울러 총괄하는 최상급 행정기관, 천계와의 공조.”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지금.”

“알겠습니다.”

다행이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듯해서.

라키엘은 고개를 조아리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사이, 지옥왕 하비엘이 자신의 업무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아서, 천계와의 직통 핫라인 전화를 거는 듯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

핫라인 전화의 스피커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내 천계와 통화가 연결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만족도 237년 연속 1위! 천계 직통 ARS 서비스입니다. 언제나 차원계와 함께하는 천계 서비스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

뭐지, 이 ARS스러운 자동응대 목소리는. 아니, 암만 들어봐도 이거, ARS 맞는 거 같은데.

그 사이에도 천계 ARS가 핫라인 스피커를 통해 낭랑하게 잘도 떠들어댔다.

[천계 안전 근로법의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조치가 시행됨에 따라 모든 통화내용이 녹음되며, 폭언, 욕설, 무리한 요구가 반복될 경우 통화가 종료될 수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이거…… 뭡니까, 진짜?”

“237년 전부터 생긴 시스템이다. 잠시 기다리도록.”

“아, 예…….”

[안내 메뉴입니다. 긴급복지 위기 상담이 필요하신 분은 1번, 일반 민원 상담 2번, 행정 불편 신고는 3번, 건설업 하도급 부조리 신고는 4번, 노동환경 신고 문의는 5번, 공익제보 핫라인은 6번, 인권침해 상담 조사 및 구제는 7번, 식품위생 및 환경범죄 신고는 8번, 상담사 연결은 9번, 천사장 직통 연결은 0번, 다시 듣기는 별표를 눌러주십시오.]

꾸욱.

지옥왕이 버튼을 눌렀다.

[0번을 누르셨습니다.]

[천사장님을 소환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금 태평하게 흘러나오는 대기 중 음악소리.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저쪽에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어. 여보세요?]

뭔가 엄청나게 귀찮다는 듯한 천사장의 목소리. 아니, 그보다는 탱자탱자 놀고 있는데 왜 불렀느냐고 힐난하는 듯한 어투. 그걸 듣다 보니 문득, 이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 수화기를 든 천사장이 어쩐지, 꼭, 지옥왕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고.

그때였다.

지옥왕 하비엘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로이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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