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공조를 요청합니다 (2)
“오랜만입니다, 로이드 님.”
지옥왕 하비엘이 말했다.
듣던 라키엘은 움찔했다.
‘……뭐?’
로이드?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다.
언젠가 들어본 이름이다.
그게 어디에서였냐면…….
[오랜만은 개뿔. 그래서 내가 반갑니? 응?]
“그럴 리가요. 혹시 뭐 잘못 드셨습니까?”
[너 때문에 자다가 깨기는 했는데.]
“이 시간에 말입니까?”
[이보세요. 여기 천국은 새벽이야, 이 사람아.]
“아, 지옥과 시차가 있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사람 다 깨워놓고는. 그래. 무슨 용건이야?]
……듣다 보니 알겠다.
확실하다.
지옥왕 하비엘 아스라한.
그와 이렇듯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러면서 ‘로이드’라는 이름을 지닌 존재는 단 한 명.
‘로이드 프론테라.’
문득 기억이 났다.
기록으로 본 적이 있었다.
마젠타노가 아직 왕국으로 불리던 마지막 시절의 천재적인 영지 설계사라 하였던가. 하비엘 아스라한의 젊은 마스터. 역사에 새겨진 수많은 업적을 세운 남자. 마젠타노를 제국으로 만든 최초의 여제, 샤를로트 프론테라 마젠타노의 아버지.
‘그런데…… 그 사람이 천사장이라고?’
새록새록 돋아나는 놀라움.
한편으로 또 떠오른 기억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기록에 따르자면 로이드 프론테라는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기적이라 했다.
쪼잔하다고 했다.
수전노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돈을 사랑하던 자라고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천사장?
“…….”
천계, 어떤 곳일까.
조금은 기분이 아득(?)해지려는 가운데, 지옥왕과 천사장의 비현실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그다지 큰 용건은 아닙니다. 천계의 공조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공조오?]
“예, 로이드 님.”
[무슨 공조길래 이런 꼭두새벽에 전화를 거셨어요?]
“여긴 오후입니다.”
[받는 사람 기준으로 해야지. 소송 당하고 싶어?]
“설마 무단으로 잠을 깨운 것에 대한 정신적인 피해를 언급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요?”
[어 맞는데?]
“정신적인 피해는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쓰읍.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로이드 님, 맑은 연못이 있는 푸른 숲에 평화로이 누워 있다는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전히 기분 구린데.]
“할부와 신용대출을 전부 갚았다고 상상해보시지요.”
[아, 후련해졌다.]
“다행이군요.”
[그래서, 무슨 일로 공조를?]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는 헬게이트를 인간계와 연결하려 합니다.”
[혹시 지상 침략하세요?]
“그건 아닙니다.”
[아니면 누가 너 빡치게 했어?]
“그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만?]
“흑마법사의 저주를 받아 갑작스럽게 희생된 수천 이상의 망자들이…… 어쩌고저쩌고…… 그들이 죽음을 실감하지 못해서…… 이러쿵저러쿵…… 인간계 병원 시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하여…… 블라블라…… 하게 된 것입니다.”
[쓰읍. 거창해라.]
“로이드 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이런 일은 지옥왕의 단독 결정으로는 추진할 수 없는 사항이라 피치 못하게 연락을 드리게 됐습니다. 공조, 가능하시겠습니까?”
[가능은 한데.]
“……설마.”
[눈치챘어?]
“공짜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거겠지요?”
[당연하지.]
천사장 로이드 프론테라의 대답하는 목소리에 반짝,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세상에 공짜가 있겠냐? 응?]
“…….”
[공조문 작성하려면 우리 공무원 일 시켜야 하지? 일하는 만큼 시급 줘야겠지? 게다가 공문 출력하는 종이에도 돈이 들겠지? 종이를 만들기 위해 제지업자가 노력해야겠지? 제지업자한테 나무를 공급하려면 운송비가 들겠지? 그 나무를 베어내는 나무꾼의 식대랑 출퇴근 비용도 거저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게 아니겠지? 심지어 나무가 공짜로 자라지도 않아요. 씨앗 심어야지, 물 주고 거름 줘야지, 산불 안 나게 감시해야지,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
“…….”
[그런데 그걸 공짜로 받겠다고?]
“하지만 로이드 님.”
[어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였지?]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정확히는 로이드 님이 아주 살짝 이득을 더 보는 5.3 : 4.7의 기브 앤 테이크.”
[저기서 내가 살짝 더 이득을 보는 0.3이 무슨 비율이다?]
“원천세.”
[그거까지 알면서 왜 자꾸 공짜를 밝혀? 우리가 장사 하루 이틀 하니?]
“……아닙니다.”
[그럼 내가 이긴 거지?]
“인정합니다. 얼굴은 언제나 제가 이기지만요.”
[어엄…….]
“키와 비율도 그렇고.”
[…….]
“그럼 공조 협의에 따른 거래 계약서, 비서를 통해 양식을 보내주시죠.”
[어째 한 마디를 안 져.]
“로이드 님만 하겠습니까.”
“…….”
내가 지금 듣는 이 대화는 도대체 뭘까. 암만 들어봐도 이건, 지옥왕과 지옥지옥왕의 대화 같은 느낌인데.
라키엘은 머리가 살짝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한때 제국 창건의 쌍두마차였던 두 영웅이 어떤 사연을 거쳐서 지옥왕과 천사장이 된 건지. 게다가 사실은 지옥에 훨씬 더 어울릴 것 같은 저 로이드라는 사람이 어떻게 무려 천사장이 된 건지. 그가 다스리는 천계는 과연 무사(?)할지. 천사들은 안녕하실지까지도.
하지만 그런 궁금증을 풀 기회는 없었다. 어느새 지옥왕 하비엘이 천사장과의 통화를 마친 까닭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냐. 내가 연락하도록 하지.]
“설마 그쪽 기준으로 낮에 말입니까?”
[어. 당연하지.]
“그럼 여긴 한밤중일 겁니다만.”
[어. 당연하지.]
“자장가라도 불러주실 겁니까?”
[그건 안 당연한데?]
“그럼 제가 먼저 연락드리지요. 낮에. 이쪽 기준으로.”
[응 차단.]
“…….”
[잘 있어라, 그럼.]
“알겠습니다. 로이드 님도. 그럼.”
딸깍.
통화가 끝났다.
지옥왕 하비엘은 오랜만에 느낀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리움과 얄미움이 반반씩 뒤섞인 묘한 기분. 입 끝에 절로 미소를 걸어 버리는 얄궂은 그런 느낌.
하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대도 다 들었겠지. 천계가 공조에 협의했다.”
“예, 들었습니다. 지옥왕이시여.”
“그럼 그대가 원했던 기간제 오픈형 헬게이트를 열어주도록 하지. 일단 그전에…….”
지옥왕 하비엘이 자신의 집무실 창밖을 가리켰다.
“헬게이트가 준비되는 동안 그대는 앞으로 치료할 망자들을 먼저 만나보면 좋겠군.”
“인솔 준비를 할 겸 말입니까?”
“그렇지.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군.”
“알겠습니다.”
라키엘은 재빨리 인사하고는 지옥왕의 어전에서 물러났다. 앞으로 치료할 피해 망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지옥의 사탄들이 안내했다. 그런데 사탄들의 태도가 매우 정중했다. 아니, 이 경우엔 매너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
앞장서서 안내를 하는 사탄 비서.
아무리 봐도 사탄 같지가 않다.
그냥 피부색이 사람보다 확연하게 붉은 정도?
그것만 빼면 칼각으로 차려입은 정장이라든가, 5성급 중에서도 최상급 호텔리어 뺨 치는 매너라든가, 시종일관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는 접객 태도가 그러했다.
주변 환경도 그랬다.
‘여기…… 지옥 맞나.’
깔끔했다.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유황불?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다. 공기가 살짝 매캐하기는 했지만, 그냥 유황온천 근처에서 나는 냄새 정도일 뿐이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사방이 현대적인 건물과 사무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공무원 정장을 차려입은 수많은 사탄들이 서류 가방이며 파일을 들고서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한데 그런 이쪽의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지옥왕 님의 특별지시 덕분입니다.”
이쪽을 안내하던 비서 사탄이 정중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워낙 깔끔하고 단정한 것을 선호하셔서요. 덕분에 지옥 정비 사업을 시작한 지가 인간계의 시간 기준으로 200년 정도가 되었고, 오늘날엔 지금의 모습이 완전히 정착되었습니다.”
“그런…… 가?”
“예, 인간의 황태자시여. 사실 현임 지옥왕께서 권좌에 앉으셨던 당시에는 지옥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난장판이었달까요.”
“난장판이라…….”
“아마 상상할 수도 없으실 겁니다. 전전임 지옥왕의 오판 때문에 지옥이 뒤집어졌고, 후임이었던 전임 지옥왕은 임시로 짧은 기간의 수습만을 맡았을 뿐이니까 말입니다. 덕분에 현임 지옥왕께서 권좌를 이어받으시던 때에는…… 그냥 폐허밖에 없었지요. 환생의 문과 지옥 열차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걸 개혁하신 건가, 현임 지옥왕께서?”
“그렇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역대 지옥의 왕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빼어난 분으로 기록되실 겁니다. 아, 다 왔습니다. 이쪽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착한 곳은 드넓은 광장 비슷한 곳이었다. 피해 망자들은 광장 곳곳에 임시로 놓인 관짝에서 머물고 있었다. 한데 망자 중에 자신의 관에 드러누운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는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런데 관짝에 일부러 눕는 사람은 없다. 미친 사람이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아니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쯧.’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새삼 이쪽이 이제부터 마주해야 할 이들이 어떤 일을 겪은, 어떤 처지의 사람들인지가 선명하게 자각이 되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설레임? 아니, 불안감과 부담감으로.
‘그때 그 사람들이야.’
뚜식이를 추격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당시에 매일 목도해야 했던 참상들도 함께 떠올랐다. 산 채로 불에 타 죽은 사람들. 아기를 꼭 안은 채 숯이 되어 있던 여인. 서로를 보듬은 채 눈물자국조차 검게 그을려 있던 주검들. 수많은 파괴와 고통, 대량 학살에 버금가던 지옥도의 광경들까지.
지금, 저들이 그 사람들이다. 그렇게 희생된 이들이 저기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저들을 대면하고, 치료해야 한다.
불현듯 고개를 드는 부담감.
문득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이럴수록 정면돌파 말고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였다.
“이봐.”
라키엘은 안내하던 비서 사탄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내 차림이 어떻지?”
“옷차림…… 말씀이십니까?”
“그래. 혹시 거울을 쓸 수 있을까? 가급적이면 큰 것으로.”
“알겠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얼마든지.”
갑자기 거울을 달라고 했다.
비서 사탄의 입장에선 제법 뜬금없는 요구였을 터다. 그럼에도 그는 신속하게 움직여 주었고, 불과 3분도 지나지 않아 전신거울 하나를 가져와 대령했다.
“…….”
거울 앞에 섰다.
스스로의 차림을 점검했다.
새하얀 머슬린 셔츠의 구김을 풀었다. 목에 두른 크라바트를 고쳐맸다. 쥐스토코르 코트의 허리선과 버클 정렬을 점검했다. 흐트러진 몇 올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완벽하다. 이쯤이면 됐다.
그 후에야 라키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로소 광장의 망자들이 보이는 곳으로 나아갔다.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성급하지도 않게. 적당한 걸음으로. 안타까운 피해자들과 눈길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피하지 않고서. 망자들 앞에 섰다.
망자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울음을 짓다가.
누군가는 불안감을 되삼키며.
자신이 처한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낯선 지옥의 광경 앞에서 저마다의 두려움을 애써 삼키며.
라키엘은 그 모든 불안감과 두려움과 울음이 섞인 눈빛이 자신을 향해 모이길 기다렸다. 침묵했다. 그리고 마침내 망자들이 빠짐없이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느낀 순간,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여기에 우리 국경의 마을인 럭펠린, 이보르작, 랑드레와 유피셸 촌락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또한, 아르마스 요새와 프리제 감시 초소의 병사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참담한 기억 속에 남은 마을의 이름들. 한때는 척박함 속에서도 행복하게 빛났을 이름들. 하여 남몰래 가슴에 새겨두었던 이름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그리고 루시트, 몰린 촌락과 덕스웰 계곡의 화전촌, 하울튼 주둔기지까지.”
“…….”
망자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 뒤로도 라키엘은 계속하여 가슴에 새겨두었던 이름들을 꺼냈다. 수많은 마을과 촌락, 국경 수비대 병영, 심지어 국경 건너편 하르미온과 3대 소국에 소속된 촌락들의 이름까지도.
그제야 망자 중의 한 사람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으음, 저기…… 제가 이보르작 촌락의 촌장입니다만…… 귀공자께서는, 누구십니까?”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감에 물든 목소리. 행여나 높은 분 앞에서 경을 칠까 조심스러운 태도. 그 모습이 라키엘의 가슴 한쪽을 다시금 저며냈다. 라키엘은 목소리가 잠기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나는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이며, 그대들이 억울한 사연으로 지옥에 억류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급히 달려왔도다. 그대들을 보금자리로 데려가기 위해서.”
당신들이 황가의 백성이니까.
어떻게든 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라키엘이 대답하였고, 피해 망자들의 눈시울이 작은 깨달음으로 희미하게 떨렸다.